다섯 살을 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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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을 사는 소녀
  • 이세기
  • 승인 2022.10.14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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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손바닥소설 - 북창서굴]
(17) 천천히 가을
감나무와 쪽빛 하늘
감나무와 쪽빛 하늘

 

골목 네거리 은하주택 다동 입구에 의자 셋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옆 화분에서 맨드라미가 빨갛게 자라고 있다. 하루 네 번 이른 아침과 저녁이면 열두 살 난 소녀가 감자라는 이름의 누렁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서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다.

첫 번째 집을 막 지났다. 공중에 가을이 왔는지 담 너머 감나무에 샛노랗게 감이 익어가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을 만났다.

감자 나왔어?

중고매장 주인 아저씨가 빨간 부리와 초록색 날개를 가진 암컷 앵무새를 어깨에 얹고 지나가며 물었다.

네. 소녀가 대답했다.

미용실 여주인이 열네 살과 세 살짜리 말티즈 두 마리를 유모차에 싣고 지나갔다.

감자 새끼는 언제 갖냐?

아직 감자가 마음을 열지 않았어요. 소녀가 대답했다.

올려다본 하늘엔 저 멀리 산을 넘어가는 기러기 떼가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날아가고 있었다.

철물점이 있는 꺾어진 골목 입구에서 육십이 넘은 노처녀 단발머리 아주머니가 행인에게 천원만 달라고 오늘도 두 손을 내밀었다.

그 앞으로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손수레에 고장 난 선풍기와 상자 폐지를 잔뜩 싣고 고물상으로 가기 위해 가겟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

발조심 하세요! 발아래 박각시 애벌레가 기어가고 있어요.

열두 살 소녀가 다섯 살 먹은 아이처럼 말했다.

가을엔 발을 조심해야 해!

손님이 있는 것을 본 적 없는 그릇 공방을 하는 젊은 삼촌이 맞장구를 쳤다.

문 앞에는 황금투구 머리를 한 마징가Z 조각상이 서 있다.

내년에는 창에 박각시가 날아올 거야!

네. 소녀가 대답했다.

길가에는 더이상 자라지 않는 키가 큰 강아지풀과 짐을 주렁주렁 매단 세 바퀴 자전거가 서 있다.

그 위로 이사한 빈집 장독대 위에 고양이가 웅크린 채 물끄러미 감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소녀는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쪽빛 하늘에 구름떼가 헤엄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감자와 소녀가 감나무가 있는 첫 번째 집이자 마지막 집을 지났다.

버스 안에서는 상어 입 하면 안 돼요.

소녀는 늘 그 자리에서 같은 말을 되뇌었다.

천천히 오늘 하루도 천천히, 먹이를 찾는 비둘기에게도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은 하루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열두 살에 다섯 살을 사는 해맑은 얼굴을 한 소녀가 느린 걸음으로 의자 셋이 놓여 있는 다세대 주택 입구로 들어가며 외쳤다.

올해는 감이 많이 열렸네요.

장독대 위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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