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너는 이제 몹쓸 말이다
상태바
'다문화', 너는 이제 몹쓸 말이다
  • 김성미경
  • 승인 2011.08.18 0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치칼럼] 김성미경 / 인천여성의전화 회장


결혼이민자가 올리는 전통혼례 모습

지난 7월 22일 노르웨이 우퇴이아 섬에서 발생한 테러에 의해 사상자가 73명이나 났다. 범인은 노르웨이 인 브레이빅이라는 남성이었고 그는 유럽식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모고한 인명을 살상하였다. 그를 두고 기독교 근본주의자, 반 이슬람주의자, 반 다문화주의자라는 수사들이 붙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사회를 술렁이게 했던 것은 그가 일본, 대만과 더불어 한국을 지명하며 가부장주의적, 혈통중심주의적인 반 다문화정책을 펴고 있는 나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 세계 5인의 인사에 꼽았던 것은 사람들을 헛웃음 치게 했지만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브레이빅의 끔찍한 테러와 더불어 발표된 2083 유럽독립선언서를 인터넷에 게시하면서 다문화사회에 대한 비판적 표명을 통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반 이슬람, 반 이민자 정서에 대하여 공감하며 한국에서도 반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온라인 카페들이 수면에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외국인 범죄사례를 공유하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며 근거없는 비난을 통해 이민자들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연합뉴스 2011.7.25)

물론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의 이민자 정책인 다문화정책과 한국의 다문화정책은 같지 않다. 유럽 다문화정책의 배경은 부족한 노동력을 이민정책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해결해 가고자 했던 것이었으며, 이민자가 가족 단위로 정착하게 되면서 언어와 문화적 장벽으로 인하여 사회갈등 원인이 되자 다양한 정책들을 펴게 된 것이다. 경제적으로 활황기에는 이주노동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다가도 요즘같은 경제침체기에는 정부 실업대책에 대한 허망한 분노가 이주노동자들에게 향한다. 이주노동자뿐 아니라 이주민 전체, 이(異)인종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져 끔직한 폭력사태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주류사회에서도 주류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비주류인 이민자들에 대하여 분노를 풀어내는 것은 물론 이민자들 자신도 그 사회에서 불평등한 소수자로 살아가는 데 대한 분노가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경우 현재 다문화정책 내용은 외국인 이민자나 이주노동자 가족단위 정주정책이 아니라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한 외국인 배우자에 대한 복지혜택을 말하며, 결혼이주자 중에서도 특히 외국인 여성을 그 수혜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정책이다. 결혼이주의 80% 이상이 여성임을 감안할 때 다문화정책은 결혼이주여성들을 그 대상으로 하게 되는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유럽과 미국의 이민자정책을 의미하는 다문화주의 혹은 정책은 한국적 상황과는 그 맥락이 매우 다르며 엄밀히 한국이 '다문화정책을 펼치는 다문화주의 국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혼이주여성들, 그중에서도 특히 아시아계 여성들을 지칭하는 말이 된 '다문화'라는 단어는 이미 그 자체로 차별적 언어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점에서 브레이빅이 한국의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 공감이 간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한국인 남성 배우자를 중심으로 한 부계혈통에 입각하여 출산과 연계하여 국적부여를 결정하는 가부장적 정책의 정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주여성들이 결혼의 진정성 없이 '위장결혼'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며 동시에 이혼을 하게 된다면 가차없이 모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결혼이주여성들의 증가는 한국의 노동시장을 교란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주여성들이 결혼을 위해서 입국한 것이 아니라 노동을 목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쉽게 이혼하여 가정이 파괴되며, 노동시장은 포화상태가 되어 한국인 취업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이주여성들의 국적부여에 관련해서는 남편에게 그 절대 권력을 주고 있다. 마치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선녀의 날개옷과 같은 의미로 체류자격 안정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결혼 7년차가 되는 어떤 이주여성은 남편이 국적취득을 거부하고 있는 관계로 아직도 '국민의 배우자' 자격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다문화'란 '차이'가 '차별'로 되지 않도록 사회적 소수자들의 특수성을 기중으로 하여 상호 인정과 소통을 통한 민주사회에 이르는 정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인 '다문화' 여성들은 '다문화'가 함축하고 있는 차별적 시선, 즉 '가난한' 한국남자에게로 결혼해 온, '불쌍한' 외국인 부모를 둔, 영원히 가난한 외국인이라 의미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또한 한국인 배우자 역시 피곤해졌다. 단지 외국국적 아내를 맞이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다문화가정' 일원이 되어 국가의 관리를 받기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에서 중요한 것이 '평등한 분배에 관한 정의'였다면 지구화시대 정의는 '분배' 뿐만 아니라 '인정'과 '대표'에 관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문제는 계급적 문제, 즉 사람들이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분배를 통해 더욱 고통 받게 되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분의 불평등 즉, 성, 인종, 종교, 문화적 가치들로 인해 무시 받게 되는 이중적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적 대표권을 갖는 문제는 매우 중요해진다. 정치적인 것은 분배와 인정에 관한 정의로운 규칙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 분배와 인정 범위 안에 누가 배제되고 포함될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낸시 프레이저, 2010) 

이제부터라도 브레이빅이 불만스러워 했던 이민자 통합정책인 유럽식 다문화주의에 대해서도 한국식 '다문화'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분배와 인정, 대표' 측면에서 고민의 출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입장과 생각과 실천을 가진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지구에서는 '다문화'라는 말이 특별히 지칭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평등하지 않는 사회 구조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많은 다른 '나'를 위한 특별한 조치도 동시에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차이'와 '다름'의 기준을 설정할 때 주류 기득권 중심이 아닌 소수자성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함께 새로이 세우고 만들어가는 소통과 인정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차별적 의미의 '다문화', 너는 이제 몹쓸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