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관광명소 대룡시장과 지척 ... 박두성 생가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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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관광명소 대룡시장과 지척 ... 박두성 생가 찾아가는 길
  • 김시언
  • 승인 2022.10.25 0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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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이야기]
(4) 박두성 생가
[인천in]이 10월부터 매주 ‘지붕없는 박물관’ 강화를 탐구하는 김시언 시인의 '강화이야기’를 매주 연재합니다. 강화가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살아 숨쉬는 그 역사와 생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냅니다. 필자는 30여 년 전부터 인천에서 강화를 드나들며 익혀오다, 9년 전부터 강화에 살며 작은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복원된 박두성 생가

 

11월 4일은 한글 점자의 날

11월 4일은 한글 점자의 날이다. 송암 박두성 선생이 한글 점자를 만들어 반포한 날이다. 1926년 11월 4일에 반포했으니 4년 뒤면 100주년이 된다. 일요일 점심 무렵, ‘시각장애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두성 선생의 생가를 찾아나섰다. 박두성 선생의 생가는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달우물마을에 있다.

교동대교 앞 검문소 앞에 교동도로 들어가는 차가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언제부턴가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교동도로 들어가려면 사람이 무척 많아졌다. 해병이 나눠준 종이에 이름과 연락처 등을 간단히 기입하고 민통선임시출입증을 받고 교동대교로 들어섰다. 길이 2,110미터인 교동대교를 넘을 때면 늘 놀랍다. 북한 땅이 이렇게 가까운 데 있구나 싶기 때문이다. 대교 왼편으로 저 멀리 북한 땅이 보인다. 북한 땅을 나란히 두면서 대교를 건넌다. 늘 그랬듯이, 이렇게 눈앞에 북한이 있다는 사실이 늘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필자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형을 꼭 만나고 싶어했지만, 끝끝내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교동’이라는 말만으로도 늘 설레고 또 가슴 아프다.

 

한산한 길 끝 즈음에

교동도는 배로 가야 할 때도 여러 번 다녔다. 그때는 하점면 창후리에서 배를 타고 교동 월선포까지 15분 남짓이면 도착했다. 휴가철이나 주말에는 창후리에서나 월선포에서나 길게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드나들었다. 교동에 좀 오래 머물러야 할 때면 숙소를 잡아야 했지만, 2014년 7월에 교동대교가 개통되고는 당일치기로도 충분히 다녀갈 수 있는 곳이 됐다. 다리가 개통됐을 때 식당을 하는 분이 한 말이 생각난다. “교동대교가 생겨서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이 많아요. 예전에는 공무원 등 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먹고 자고 갔는데 이제는 한나절에 일을 다 보니까 그냥 가더라구요.”

평일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 말은 주말이나 휴일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교동대교를 지나 대룡시장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시장 골목마다 가득 메우고 있는 게 보였다. 시장은 박두성 생가를 보고 나오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대룡시장을 지나 교동중고등학교 정문을 지나자마자 길이 금세 한산해졌다. 오가는 차가 거의 없었다. 이 길에 비하면 대룡시장 부근은 그야말로 번화가였다. 그 길 끝 즈음에 ‘박두성 생가 입구 600미터’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바로 옆이 교동교회, 그 옆이 월선포였다.

발 디딜 틈 없는 대룡시장 골목길.
발 디딜 틈 없는 대룡시장 골목길.
새로 지어진 교동교회.
새로 지어진 교동교회.

 

훈맹정음을 창안해 발표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는 특수한 문자다. 즉 손끝으로 읽을 수 있도록 돌출된 점을 행렬상의 6개 위치에 배합해 63개의 부호를 구별하도록 한 것이다. 1824년 맹인인 브라유가 고안했고, 이를 맹인을 위한 독서법으로 확대한 사람은 프랑스인 아위다.

한국에서는 브라유의 점자보다 1870년경에 W.B.웨이트가 고안한 4점 점자 뉴욕 포인트가 먼저 들어왔다. 그것은 1880년대에 평양에 의료선교사로 왔던 미국인 여자선교사 R.S.홀이 그곳의 맹인 여성들을 모아 뉴욕포인트를 변형한 이른바 평양점자에 의해 십계명과 4복음서가 점역(點譯)되기도 했으나 사용에 따른 불편 때문에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1926년 11월 4일 브라유의 6점 점자의 활용을 통한 한글점자 연구를 계속해 오던 제생원 맹아부(지금의 서울맹아학교)의 교사 박두성이 훈맹정음(訓盲正音)을 창안해 발표했다. 훈맹정음은 발표 뒤 수정과 보완작업을 계속했고, 1982년 ‘한국점자통일안’이 새롭게 선보였다. 박두성 선생은 1962년 국민포장을 수여받았고, 1992년 10월에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송암점자도서관에는 입력 봉사와 녹음 봉사하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입력봉사는 컴퓨터에 글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변환돼 출력이 이루어지는데, 고등학생부터 성인까지 참여할 수 있다. 녹음 봉사는 시각장애인과 노인 등 독서에 어려운 분들을 돕는 일이다. 책을 낭독하거나 CD와 테이프 제작을 위한 녹음을 진행하는 봉사활동이다. 간단한 테스트를 거치고, 이를 통과한 사람들은 교육을 거쳐 녹음 봉사를 할 수 있다.

생가터에 있는 훈맹정음 점자.
생가터에 있는 훈맹정음 점자.

 

선생의 업적과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

생가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작은 건물 몇 채 있었고, 훈맹정음에 대한 설명과 박두성 선생의 연보, 어록이 쓰여진 안내판이 있었다. 찾는 이가 아무도 없어 썰렁했지만, 선생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만든 마음이 곳곳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생가 옆쪽으로 교동대교가 보였고, 바닷가 쪽으로는 해안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해안도로가 완공되면 박두성 생가를 사람들의 발길이 더 잦아질 것이고, 박두성 선생의 업적과 발자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선생이 다녔다는 교동교회는 생가로 들어가는 길옆에 있었다. 교회는 새로 지어져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평일에는 한산하던 월선포는 휴일이라 그런지 차박을 하거나 낚시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배는 다니지 않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쉬는 공간이 되는 듯했다.

돌아나오는 길, 대룡시장은 여전히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많았다. 골목마다 음식을 맛보거나 사려는 사람이 길게 줄 서 있었고, 식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박두성 생가에서 5분 남짓 걸리는 거리라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대룡시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면, 이 가운데 몇몇은 박두성 생가를 찾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박두성 선생은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동시에 애맹사상가로 그 업적은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 배를 타고내리던 월선포.
교동대교가 생기기 전 배를 타고내리던 월선포.
생가 옆으로 해안도로가 공사 중이다.
생가 옆으로 해안도로가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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