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곳리 통제영학당, 통제영에선 학당 세운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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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곳리 통제영학당, 통제영에선 학당 세운 적 없는데
  • 배성수
  • 승인 2022.11.1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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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19) 바로잡아야 할 문화재 명칭, 통제영학당 -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2001년 4월 인천광역시는 강화읍 갑곳리 1061번지 일대 6,381㎡ 부지를 통제영학당지(統制營學堂址)라는 이름으로 지방기념물 제49호에 지정했다. 통제영은 조선후기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군(水軍)을 총괄 지휘하던 군영으로 경남 통영시에 본영을 두고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하 통제영)을 말한다. 통제영학당이라면 통제영에서 세운 학당일 터인데 그것을 본영이 있는 통영도 아니고, 관할 구역도 아닌 강화도에 두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통제영학당이 왜 강화도에?

초짜 학예사 시절 강화도 군사유적을 조사하러 다녔을 때의 이야기다. 갑곶나루 주변 외성 일대를 돌아보던 중 안내를 맡았던 어르신이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가 조선시대 통제영학당이 있던 자리”라고 알려주었다. 한마디 덧붙이기를 “부산의 어느 교수님 말이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란다. 학위논문으로 조선시대 군사제도를 준비하고 있던 터라 통제영학당이라는 말이 귀에 꽂혔고, ‘통제영에서 운영했던 학당이 왜 강화도에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일정에 쫓기던 때였기에 깊이 고민할 겨를 없이 그저 ‘어르신이 통어영을 통제영으로 잘못 알고 있겠거니’하고 넘겨야 했다. 통제영 외에 경기, 충청, 황해도 수군을 총괄하던 삼도수군통어영(이하 통어영)이 교동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통어영학당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면 일면 타당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탓인지 통제영학당은 기억에서 이내 잊히고 말았다.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49호 ‘통제영학당지’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49호 ‘통제영학당지’

그리고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나보다. 해군사관학교의 효시였던 통제영학당 터가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가 한국 근대해양교류사 연구에 평생을 바쳤던 고 김재승(1943~2011) 선생이다. 그는 한국근대해군창설사라는 책에서 통제영학당이 근대식 해군 장교를 양성할 목적으로 창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였음을 밝혀냈다. 앞서 강화 어르신의 말씀에 등장했던 부산의 어느 교수님이 그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통제영학당 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에 그간 잊고 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신문 기사에서 통제영학당이 왜 강화도에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었다. 김재승 선생의 저서에도 ‘당시 근대식 해군 창설을 준비하면서 통일된 용어가 없어 옛 명칭을 관습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2005년부터 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에서 이곳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지만, 조선시대 건물터만 확인되었을 뿐 통제영학당의 명칭과 관련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2006년 실시된 통제영학당지 발굴조사
2006년 실시된 통제영학당지 발굴조사

 

인천 바다를 지켜라, 기연해방영에서 해연총제영(海沿摠制營)으로

통제영학당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선 당시 조선의 수군 편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수군 조직은 서남 해안을 관할하던 통제영과 서해안을 총괄하던 통어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울과 가까운 인천이 개항하면서 조선 정부는 서울과 인천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만의 방어에 집중해야했고, 1883년 12월 경기도 연해의 방어를 총괄할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창설하고 부평에 본부를 두었다. 처음에는 경기도의 해안 방어를 위한 육군 조직으로 편성했지만, 얼마 안 있어 수군까지 포함시키면서 지금의 해병대와 비슷한 조직이 되었고 그 범위도 충청도와 황해도까지 넓혔다. 그러나 1888년 4월 군제 개편 때 친군영(親軍營)의 우영, 후영과 함께 통위영으로 통합되면서 4년여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기연해방영이 통위영에 통합되자 해안 방어가 취약해졌고, 이를 대신할 군영을 다시 설치해야 한다는 논의가 조정에서 계속되었다. 1893년 1월 고종은 경기 연안 방어를 담당할 해연총제영(이하 총제영)을 강화도에 창설하고,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였던 민응식을 총제사에 임명했다. 기연해방영이 인천 개항 후 서울의 초입에 해당하는 경기만 방어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면, 총제영 창설에는 경기도 해안 방어를 비롯해서 근대식 해군 체제를 도입하겠다는 고종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개항을 전후해서 경험했던 서구열강의 강력한 해군력은 고종에게 우리도 서둘러 근대 해군을 양성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인천 앞바다는 각국의 상선은 물론 군함도 집결하는 곳이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곳의 해군력을 키워야 했다. 총제영을 강화도에 두었던 이유, 총제사에게 강화유수와 진무사를 겸임시켰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해군사관학교의 효시라는 통제영학당도 근대 해군을 양성하려 했던 고종의 의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공회 선교잡지 'The Morning Calm' 79호(1899)에 게재된 해연총제영 사진
성공회 선교잡지 'The Morning Calm' 79호(1899)에 게재된 해연총제영 사진

 

조선수사해방학당과 총제영학당, 그리고 통제영학당

근대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강화도에 창설된 총제영. 그리고 강화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 둘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관련성을 찾는다면 통제영학당이 왜 강화도에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릴 것이다. 조선시대의 장교, 즉 무관(武官)은 교육과정을 거쳐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무과’라는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했다. 대부분 병서의 내용이나 무예실력으로 무관을 선발했기 때문에 근대식 병력 운용과 전술에는 맞지 않았다.

근대 해군을 표방하며 창설한 총제영이니 만큼 여기서 근무할 장교를 선발하는 과정도 기존과는 다른 방식을 취해야 했다. 즉 과거급제자에게 무관의 벼슬을 내리는 대신 교육과정을 신설해 해군 장교를 양성하는 새로운 방식을 택했고, 총제영은 강화도 갑곶에 장교 양성교육을 담당할 학당을 설립했다. 총제영에서 설립한 학당이라면 당연히 총제영학당으로 불러야했을 터인데 어떤 이유에선지 통제영학당으로 잘못 전해졌고, 이제는 문화재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해군총제영 첩보'(1894. 3) 중 총제영학당 외국 교사 관저(좌)와 학당 및 기숙사(우)
일본의 '해군총제영 첩보'(1894. 3) 중 총제영학당 외국 교사 관저(좌)와 학당 및 기숙사(우)

1893년 9월 총제영은 전국에서 모집한 50명의 양반가 자제 중 38명을 선발한 뒤 영국인 교관과 조교를 초빙하여 영어와 이학(理學), 화학(化學) 등 기초 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영국 교관의 초빙을 위해 조선 정부가 영국 총영사에게 보낸 공문에 학당 이름을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으로 적고 있다. 즉, 조선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이 학당의 이름은 조선수사해방학당이었다. 총제영에서 설립한 학당이기에 ‘총제영학당’이라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1894년 6월 갑오개혁으로 해연총제영이 해체되자 이 학당도 자연스레 폐지되었고, 영국 교관과 생도들은 서울에 신설된 관립 한성영어학교에 편입되었다. 개교 기간이 9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아 당시 주민들도 이 학당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저 수군과 관련된 학당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조선시대 수군을 총괄했던 군영 ‘통제영’의 이름이 학당에 붙어 전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2009년 4월 해군참모총장이 통제영학당 옛터 비석
2009년 4월 해군참모총장이 통제영학당 옛터 비석

2007년 강화문화원에서는 강화군의 지원으로 ‘통제영학당지 학술조사’를 실시했다. 여러 명의 강화도 연구자들이 참여한 이 조사에서 통제영학당이 잘못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다양한 국내외 자료를 분석하여 문화재로 지정된 갑곳리 1061번지는 외국인 교사의 거주구역이고, 학당과 생도들의 기숙사는 지금 천주교 갑곶 순교성지가 자리 잡은 갑곳리 1000번지 일대였다는 것도 확인했다. 강화군의 지원 사업이었기에 조만간 문화재 명칭이 바로 잡힐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로부터 1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갑곳리 1061번지 그곳에는 ‘통제영학당지’의 문화재 안내판이 서있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 옆으로 2009년 4월 해군참모총장이 세웠다는 ‘통제영학당 옛 터’ 비석이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문화재청과 대한민국 해군이 공식 인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는 조선수사해방학당이나 총제영학당이 아니라 통제영학당이 되어버렸다. 정작 통제영은 어떠한 학당도 운영한 적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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