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창고를 아트플랫폼으로, 문화행정의 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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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창고를 아트플랫폼으로, 문화행정의 뚝심
  • 양진채
  • 승인 2022.11.18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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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2) 황흥구 선생 - 행정가에게 듣는 문화기관 설립(상) / 양진채 소설가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상반기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두번째 순서는 황흥구 선생으로 양진채 소설가가 만났다.

 

황흥구 전 인천시 문화예술과장이 10월 11일 한국근대문학관 쉼터에서 인터뷰하면서 인천의 문화 기관설립 과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시작하는 말

황흥구 선생은 1952년생으로 만18세이던 1970년 11월에 인천시 5급을(乙)(지금의 9급)로 공직에 발을 들여 2012년 12월까지 42년을 근무했다. 선생은 특별히 1997년 인천시 문화예술계장을 시작으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관장, 인천시 문화예술과장 등 문화예술 분야의 행정을 맡아왔다. 중구, 동구, 남동구 부구청장을 지냈으며 인천시 인재개발원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했다. 공직에 있던 1996년 5월 『수필과 비평』에 수필로 등단했고, 2010년 11월 수필집 『그 여자네 집』을 펴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는 7대 시의원으로 문화복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고, 인터뷰 이후에 제3대 인천시 사회서비스원의 원장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선생이 문화예술 쪽의 공직을 맡던 시기에 인천문화재단, 아트플랫폼, 이민사박물관 등 인천의 중요 기관이나 시설들이 건립되었고, 그 과정에서 선생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번 황흥구 선생의 인터뷰는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던 한 공무원의 입장에서 인천시의 여러 문화 기관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설립되었는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보고, 또 문화예술인과의 교류, 작품 활동 등 개인적인 활동을 통해 당시 인천의 문화예술 모습도 짐작해보려 한다. 인터뷰는 10월 11일 오후 한국근대문학관 쉼터에서 이루어졌다.

 

양진채 :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은 수필가로 인천문인협회 행사에서 잠시 뵙기도 했고, 또 시의원으로 활동하실 때, 시에서 계간 『학산문학』 발행 예산을 줄이는 바람에 편집주간으로서 한 번 찾아뵈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올해 기호일보 등에 쓰신 인천 관련 다양한 얘기도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공직에, 특히 문화예술 쪽에 몸담고 계시면서 많은 활동을 하신 건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모쪼록 이 인터뷰가 선생님의 많은 경험을 기반으로 인천의 문화예술 단체나 시설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기록하는 좋은 자료가 되도록 진행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먼저 어떻게 공무원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황흥구 : 제가 52년생이에요. 고3 때인데 가정 형편상 취직할 마음을 먹고 있던 차에 우연히 시청을 지나다가 게시판을 보게 됐는데 5급 을류, 그러니까 지금의 9급 공무원을 뽑는다는 공고문을 보고 시험을 쳐 합격하게 되면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죠. 그때가 1970년, 만 18세였을 때예요. 그때부터 2012년 12월까지 근무했어요. 42년 1개월을 근무한 거죠. 아마 인천시 공무원으로서는 제가 제일 오래 일을 했을 거예요. 저는 정년퇴직한 뒤에도 6개월을 더 일했으니까요.

퇴직 1년 6개월 전쯤 인재개발원 원장 할 때인데 원내 계약직 교수요원 채용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인재개발원 원장하다 교수로 가게 됐는데 계약 기간이 2년이다 보니 2012년 6월에 퇴임을 해야 했는데 12월 말까지 한 거죠. 정년퇴직을 하고도 6개월을 더 일했던 셈이지요.

42년을 공무원 생활을 하고, 선출직 공무원인 시의원 4년을 했죠. 공무원은 ‘국민의 봉사자이고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하는 사명감은 공직에 들어와서 알게 되었지만 퇴직하고 나니 공직은 저에게 소명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양진채 : 그런데 공무원은 대부분 한 분야에서 오래 일을 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문화예술 한 분야의 일을 주로 하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황흥구 : 제가 89년도에 사무관으로 승진했어요. 시청의 몇 군데 계장을 거치면서 1997년도에 문화예술계장으로 발탁되었는데, 그때 제가 수필로 등단하고 시청공무원들의 문예지인 『문학산』을 발행하는 동우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어요. 아마 인사 담당하는 쪽에서 그래도 저를 문화예술에 대해 문외한은 아니겠구나 생각하고 발탁한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계속 약 8여 년(97,3~05,1)간 문화예술계장, 문화예술회관장, 문화예술과장직을 연이어 맡게 되었는데 한 분야에 연속해서 근무하는 건 아주 드문 경우였습니다.

양진채 : 네에, 공무원으로서 문화예술 쪽으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신 게 아닌가 짐작되는데요, 그럼 그 얘기는 조금 뒤 기관 얘기하면서 상세하게 듣기로 하고요, 선생님은 수필로 등단도 하셨어요. 문학을 창작하는 일도, 등단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어떻게 수필가가 되셨는지, 그러니까 문화예술 쪽으로 어떻게 발을 딛게 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황흥구 : 『문학산』이라는 시청에서 발행하는 공무원 대상 문예지에서 1990년도에 인천시 전 공무원을 대상으로 백일장 대회를 열었어요. 거기에 제가 「고향」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는데 장원을 했어요. 그때 한상렬 수필가가 심사위원장이었는데, 시상식이 끝난 뒤에 제게 작품이 아주 좋으니 문인협회에 들어오라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그래도 글을 많이 써본 게 아니라서 처음에는 그 분이 지도하는 제물포수필 문학에 들어가 3, 4년 있었고, 1998년도 ‘제1회 전국 공무원문예대전’에서 수필로 동상을 받으면서 정식으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지금은 문인협회 회원이면서 제물포수필문학과 제가 거주하는 남동구의 남동문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클래식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1985년도쯤엔가 최영섭 선생님이 수봉문화회관에서 ‘인천영상음악 감상회’를 매달 마지막 금요일 저녁때 열었어요. 연주실황 비디오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클래식 오리지널 음반도 들려주며 해설도 해주고 하셨죠. 최영섭 선생님이 예전에 동아방송에서 클래식음악 해설을 했는데, 이제 고향에 돌아와서 방송에서 하듯 음악을 선곡하고 해설을 해주는 감상회를 연 것이었어요. 그때 저도 거기에 가서 매번 듣기도 했고요, 사실 교통 여건도 좋지 않아서 몇 명되지 않았어요, 그러던 차에 제가 1998년도에 종합문화회관 관장으로 왔잖아요, 그때부터 회관의 국제회의장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여건이 전보다 나으니까 회원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끝나면 최영섭 선생님과 건너편 먹자골목에서 늦게까지 맥주를 마시곤 했죠. 막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시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1997년도 문화예술계장으로 있을 때부터 ‘해반문화사랑회’에도 가입해 예술인들과 많은 교류와 소통이 있었지요.

양진채 : 네에, 수필가로서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관심이 많으셨고, ‘해반문화사랑회’에도 가입하셨다니 지역의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문화예술회관 관장도 지냈습니다. 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관장 직을 맡으셨는데 당시 문화예술회관에 대한 지역 관심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합니다. 기억에 남는 공연이나 행사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셔요.

문화예술 계장으로 1년 반 정도 있다가 서기관(4급)으로 진급되어 1998년 10월에 문화예술회관 관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예술회관이 개관(1994년)한 지 4년 되었는데 지역예술인들의 회관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대관이 어렵다, 무대장치가 형편없다, 불친절하다’ 등 각종 민원이 제가 시청 계장으로 있을 때에도 이쪽으로 많이 들어 왔어요. 저는 처음 진급되어 간 자리이니까 의욕이 넘쳤죠. 가자마자 회관 분위기를 바꿔보자고 가장 기본적인 화장실부터 싹 개조하고 화장지도 떨어지지 않도록 수시로 확인했어요. 그리고 회관의 고질 민원을 잘 알고 있으니까 수시로 직원 교육을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직원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반대로 문화예술인들은 불만이 줄어들면서 회관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기록이었습니다. 문화예술회관 상주단체로 인천시립예술단이 있어요. 이 안에는 시립교향악단, 시립합창단, 시립무용단. 시립극단이 있는데 이들이 공연한 내용이 제대로 기록돼 있지 않은 거예요. 또 예술회관의 대공연장, 소공연장, 전시 등의 대관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게 없었고요. 그래서 이걸 전부 날짜 별로 발췌해서 기록하고 팜플렛 등을 보관하라고 했죠. 그래서 개관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공연이나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전부 발췌해 공연백서를 만들었죠. 문화예술회관이 인천의 공연이나 전시의 중요한 무대이기 때문에 대관 기록을 잘 해놓으면 인천 문화예술의 흐름을 가늠하는 잣대로써 중요한 자료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소위 아카이빙 작업이라 할까요? 그 이후로 이 백서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지는 확인 못했지만 백서를 만들었다는 얘길 못 들어서, 이런 백서가 얼마나 중요한 기록인지 모를까봐 좀 아쉽죠.

또 기억에 남는 일은 2000년에 예술회관 광장에 건립한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에 얽힌 스토리예요. 한번은 새얼문화재단의 지용택 이사장님이 찾아 오셔서 최영섭 선생님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를 세우려고 하는데 마땅한 부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선생의 고향인 강화도도 그렇고, 대공원이나 자유공원도 마땅치 않고 이곳 문화예술회관이 좋은데 또 여기도 안 된다고 하니 저한테 와서 하소연하는 거예요. 문화예술회관도 공원 부지였어요. 공원은 본래 공원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해서 건축물의 비중이 몇 프로로 제한이 돼 있는데 중앙공원에 문화예술회관 건물이 들어서며 건축물 시설률이 이미 초과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공무원들이 여기다 뭔가를 짓는다는 건 불법이라고 반대한 거죠.

들어보니 사실 엄격하게 적용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노래비가 돌이니 돌을 건축물로 보느냐가 문제인데 안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제가 책임진다고 밀어붙였죠. 관장이 책임지겠다고 보증을 선거죠. 결국 우여곡절 끝에 노래비가 세워졌어요. 그리고 8월 15일 제막식에 맞춰 저녁때는 경축음악회를 개최했는데 제가 또 최영섭 선생님을 등장시켜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교향악단 연주에 맞춰 지휘하도록 깜짝 이벤트를 만들었어요. 그날 대성황이었고,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님도 엄청 흡족해 하셨죠. 그때부터 좋은 의미로 저를 별종 공무원으로 불렀어요.

또 기억에 남는 공연은 청소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 있는 음악회’를 연 거예요. 사실 여름철이나 겨울철에는 다른 공연단체도 마찬가지지만 시립예술단 공연이 거의 없어요. 청소년들은 오히려 방학이 되어야 그나마 예술을 즐길 수 있는데 그때는 또 공연이 없으니 문제인 거죠. 그래서 방학을 맞은 청소년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해보면 어떨까 고민했던 겁니다.

최영섭 선생님과는 수봉문화회관에서 영상음악회가 있을 때부터, 그 이후 제가 문화예술회관 관장일 때 회관 국제회의실에서 매달 한 번씩 해설이 있는 영상음악회를 열고 있었던 때라 최영섭 선생님하고는 친하게 지냈지요. 그래서 최 선생님한테 방학 때 청소년들에게 수준에 맞게 클래식음악 해설을 해주면 어떻겠냐고 부탁했지요. 그때는 방학숙제 중 문화예술 체험이나 공연을 보고 감상문을 쓰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교육청에 공연 일정 공문도 보내서 참여해 달라고 한 거죠. 그랬더니 학교마다 학생들에게 알려주어 엄청 밀려들었어요. 하루에 두세 번씩 열어야 했으니까요. 한번은 학생들이 너무 많이 와서 회관 청원경찰이 공연장에 못 들어가게 말리기도 하고, 인원이 차면 공연장 문을 닫았다가 공연이 끝나면 다시 열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합니다.

양진채 : 문화예술회관 광장에 세워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를 자주 봤었는데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공무원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최영섭 선생님과의 인연이나 활동도 의미 있네요. 선생님이 이런 무대를 펼쳐주니까 최영섭 선생님도 인천 고향에 와서 이런 봉사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문화예술과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합니다. 2001년도부터 문화예술과장으로 있으면서 인천문화재단 발족, 아트플랫폼 구축, 이민사박물관 건립 등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먼저 인천문화재단 발족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황흥구 : 2001년도 문화예술 과장으로 있을 당시 문화예술과에는 문화예술계, 문화진흥계, 문화재계 등 세 개 계 뿐이었어요. 지금은 문화예술과에서 파생된 과만 해도 네 개 과나 되는데 당시 문화예술진흥기금 업무를 담당자 2명이 접수하고, 심사하고 모든 걸 다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업무만 본 게 아니라 다른 업무도 보면서 처리해야 했어요.

제가 문화예술 계장으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한계에 다다른 거죠, 또한 지역문화발전 차원에서 예술인에게 체계적인 지원과 지역의 문화자원 발굴이 필요했습니다. 문화예술과에서 이 일을 하기에는 공무원들의 잦은 인사이동으로 전문성이 떨어지고, 업무도 과중해 문화예술에 대한 전문 ‘싱크탱크’ 역할을 할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꾸준히 있었어요. 그때는 이미 서울도 문화재단이 있고 경기도에도 있었고요. 이제 문화재단을 만들어 문화예술 정책 개발도 하고, 독자적인 지역문화를 키워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어요. 조례를 만들고 예술인들 의견 수렴을 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문화재단 설립을 위한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해 수십 차례의 공청회, 간담회 등을 통하여 예술단체나 시민단체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면서 차차 재단을 만들어 나갔죠.

2003년 인천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와 이사들을 선정할 ‘추천위원회’가 구성 됐고, 11월 23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인천문화재단설립발기인대회’를 열어 10명의 ‘인천문화재단 이사 추천위원회’ 위원을 선정했죠. 추천위원에는 저를 포함해 당시 안병배 시의원, 최정학 당시 연수문화원장, 이종구 교수, 유봉희 당시 다인아트 대표, 류재형 당시 한국가톨릭사진가연합회장, 이정박 당시 남동구 문화예술인회장, 윤혜경 당시 재능대 교수, 김경수 당시 인천일보 문화부장, 김기수 당시 인천시교육청 교육국장 등이 선정됐고, 재단사무실은 우리은행 구월동 지점 4층에 마련했죠. 초대 대표이사로 인하대학교 최원식 교수가 임명됐고요. 2004년 12월 1일 인천문화재단이 공식 출범하고, 10일 인천문화재단 출범식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18년이 돼 오는군요.

인천아트플랫폼과 건너편 한국근대문학관은 인천시가 해안동 일대 붉은 벽돌창고를 매입해 문화시설로 변신시킨 것이다.

양진채 : 문화재단이 있고 없고는 도시의 문화 수준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여곡절을 겪고 우리은행 건물에서, 또 토지금고 건물, 문화재단의 독립 건물로 이전, 현재의 문화재단까지 오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네요. 아트플랫폼은 어떻게 구축되었을까요. 문화재단 설립과정을 보니 아트플랫폼도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문화재단이 필수 필요조건을 갖췄다면 아트플랫폼은 결이 좀 다르니까요.

황흥구 : 계장으로 있을 때 예술인들과 교류하면서 ‘해반문화사랑회’에서 일본 요코하마시를 가는데 같이 가게 됐습니다. 요코하마에는 해변가에 ‘아카랭가’라고 하는, 기존에 있던 붉은 벽돌창고를 활용해 전시장, 공연장, 상점 등이 어울어진 문화컴플렉스를 만들어 놨더라구요. 이곳에서 쇼핑도 하고 문화예술도 즐기고 관광명소가 되었어요. 그걸 보고 해반문화사랑회의 최정숙 이사장이 벽돌창고가 저렇게 변한 걸 보니 너무 좋다고, 인천도 창고 건물이 많으니 저렇게 한 번 변신해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 남은 것이라고는 중구청 앞의 해안동 일대에 일제 당시 보세창고로 쓰던 건물들도 대부분 철공소, 선박부품 공작소로 쓰고 있는데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거죠.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여기 근대문학관 쉼터에서 부터 신흥동 삼성아파트 있는 데까지 붉은 벽돌창고 건물들이 밀집해 있어 우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비로 요코하마도 몇 차례 가봤죠. 지금 시에서 매입을 안 하면 전부 헐어 없어질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창고를 매입해 요코하마처럼 만들어보자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촌‘사업으로 명명하여 계획을 세워 추진하게 되었는데, 당시 최기선 시장님까지 결재를 받았지만 워낙 예산이 많이 들기도 했고 창고를 무슨 문화시설로 만드느냐는 인식이 팽배해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관장으로 있다가 2001년 1월, 2년 6개월 만에 문화예술과장으로 올라오면서, 캐비넷 속에서 잠자던 ‘예촌’사업을 다시 꺼냈지요. 안상수 시장이 당선되면서 재임 기간에 이 일을 해놓으면 큰 업적을 남길 것이라며 설득했지요. 계장 때 추계 예산이 250억 원이었는데 500억으로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 했어요. 다시 시장님을 찾아가 반드시 추진해야 할 사업인데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 도시계획 차원에서 이 사업을 추진해야 빠르겠다고 설득했습니다. 도시계획과에서 땅과 건물 등 매입을 추진하고 컨텐츠는 문화예술과에서 추진하는 것으로 다시 설득한 거죠. 아트플랫폼 추진하는 동안 애로사항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퇴직하고도 아트플랫폼에 애착이 있어 시의원으로 있으면서 주위의 건물을 더 매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금 재단 사무실로 사용하는 건너편 등기소 건물을 매입하는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공직사회의 인사이동이 잦지만 저 같은 경우는 운 좋게도 계속 문화예술 쪽에서 일할 수 있게 돼 이런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양진채 : 예상했던 것처럼 정말 어렵게 아트플랫폼을 계획하고 진행하셨네요. 선생님 말씀 듣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할 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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