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고 싶은 서구 - 탈출과 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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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하고 싶은 서구 - 탈출과 귀속
  • 권근영
  • 승인 2022.12.12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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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설계하는 인천 문화]
삶의 기억과 흔적이 있는 길(2) 석남역 8번 출구 – 석남 체육공원 - 서구문화회관 – 가정중앙시장역
글 = 권근영 15분연극제X인천 대표
‘15분연극제’에서는 인천에서 나고 자란 혹은 인천에 터를 잡은 연극인의 삶의 기억과 흔적이 묻은 장소를 함께 걷는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인천의 작은 동네, 자주 가던 곳, 이야기와 사건, 아주 소소한, 개인의 기억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 일부를 기록해 공유합니다. 

 

기획 : 권근영 / 공연예술가, 15분연극제X인천 대표

안내자 : 한아름 / 작‧연출가

사진 : 이도준

함께 걸은 날 : 2021년 5월 16일(일) 오전 10시, 2022년 7월 16일(토) 오전 10시

함께 걷는 길 : 석남역 8번 출구 – 모텔 골목 – 석남 체육공원 - 학교들 - 서구문화회관 – 가정중앙시장역

 

안녕하세요. 저는 서구 석남동 출신 한아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컨셉은 탈출과 귀속입니다. 탈출하고 싶은 욕구와 귀속의 경험에 대해서 같이 걸으며 차차 설명 드릴게요.

일단 여기 석남역에서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특별해요. 저는 역 이름을 가진 동네에서 너무 살고 싶었어요. 자기 동네 이름을 전철역 이름으로 말한다는 거는 어느 정도 역세권 안에 산다는 것이잖아요. 제 주변과 제가 속한 지역 같은 경우에는 역세권이 아니었고, 어떤 뚜렷한 직업을 갖고 사는 분이 없었어요. 일용직에 근무하시는 분도 많았고, 저희 어머니도 자영업의 직종을 계속 바꾸시면서 저를 키워주셨습니다.

서울 가니까 친구들이 다 “너 어디 살아?” “나 역삼” “나는 서초” 이렇게 대답하는데, 저는 “나 인천 사는데” 이렇게밖에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서울은 모든 것이 역세권이고 모든 동네가 뚜렷하게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저한테 엄청 매력적이어서, 저는 탈출을 하고 싶었나 봐요.

2006년,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석남역을 만들겠다고 했어요. 개발 한다고 소문이 나서 어떤 사람들은 비싼 값에 집을 팔고 나가기도 했어요. 주인 잃은 집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석남역이 완공된 건 2016년이에요. 지금은 석남역에 7호선이 연결되었는데 서울과 연결돼 있으니까. 사람들이 다시 오는 것 같기도 해요.

저희 동네 특징이, 버려진 건지, 버릴 건지, 보관하는 건지, 아니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기다리는 건지, 방치인지, 끝인지 시작인지 모를 건물들과 사물들이 굉장히 많은 동네라는 겁니다. 지금 걷는 이 길이 제가 다 청소년기에 걸었던 길이에요. 이런 길들은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걸으면 정말 무섭잖아요. 치안도 안 좋고.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어요.

여기가 저희 집으로 가는 통로인데, 여기서부터 모텔 골목이 시작됩니다. 저 위에 청소년 통행 제한 표시 보이시죠?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이 길로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청소년 통행 제한 구역이라고 돼있어요. 나는 청소년인데 우리 집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를 지나갈 때마다 항상 불안한 마음이었어요. 내가 이 길을 지나가도 되나? 그리고 사실 모텔이라는 공간이 숙박업소일 뿐인데 너무 뚜렷하게 청소년은 금지라고 하니까 괜히 이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다 무서워 보였던 거 같아요.

지금은 모텔들이 많이 사라진 거예요. 대신 아파트나 원룸으로 변형이 되었어요. 그래도 많이 남아 있긴 하죠. 저는 맨날 여기 갈 때 저기서부터 막 뛰어갔어요.

여기 아파트 3층에 화초가 많은 집이 저희집입니다. 지금 엄마 아빠가 계시고, 화초가 많은 거는 제가 20살에 여기를 떠나고 나서부터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개별적인 이름이 붙더라고요. 엄마가 저 대신 키우신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저희 엄마는 요쿠르트 장사를 하시다가 그 다음에는 화장품 가게를 하셨어요. 거기서 번 돈으로 이 집을 사셨습니다. 엄마가 이 집을 살 때가 제가 9살 때였거든요. 그때 26년 차 된 집이고, 재건축을 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샀다고 해요. 근데 제가 지금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재건축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에요. 명절 때마다 주변에 현수막이 걸리지만, 회사 이름만 달라지고 큰 변화는 없어요.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엄마가 했던 화장품 가게가 있었는데, 지금은 병원이 됐어요. 짜장면집부터 성인용품집까지 가게가 많았어요. 저희 엄마 화장품 가게는 가장 모서리 부분에 있었어요. 대부분이 지역에서 올라오신 분들이었고, 약간 판잣집 상업촌 같았어요. 다른 가게들과 마찬가지로 저희 가게도 확장해서 샤워실로 쓰거나 피부 마사지실로 쓰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저희 오빠랑 저랑 9살 차이가 나거든요. 나중에 알았는데 가장 엄마 손이 필요한 저를 위해, 엄마가 계속 직업을 바꾸셨던 거였어요. 가게 건물도 초등학교랑 집 사이에 있었구요. 저 중학생 때는 학교랑 가까운 곳에서 노래방을 하셨어요. 항상 제가 위험하지 않게 근처에서 장사를 하셨던 거에요. 엄마의 상업 장소가 다 저를 위해서라는 걸 알고 나중에 엄청 울었었어요.

 

여기는 석남 체육공원인데요, 저 어릴 때 사방치기 선생님이라고 있었어요. 저희한테 전통 놀이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에요. 정말 아무런 대가 없이 여기서 아이들이랑 놀아주셨어요. 비석치기, 사방치기, 줄넘기 놀이 이런 거 배웠어요. 덕분에 여기에 방치되어 있고 심심해하던 그 상가 지역의 어린아이들이 여기서 같이 놀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고 그랬었어요. 마을에 이렇게 넓은 공원이 있는 건 정말 좋은 거 같아요. 사방치기 선생님 한 번 꼭 뵙고 싶어요. 그럼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요, 그럼 육교를 건너가야 해요. 지금은 사람만 지나다닐 수 있는데, 여기서 물건을 파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그리고 주말마다 바이킹 그거 아시죠? 어린이용 바이킹! 이런 게 와서 저도 많이 타고 놀았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진짜 많은 물건을 늘어놓고 팔던 곳인데 지금은 그냥 지나치는 통로가 돼버렸네요.

 

저 어렸을 때 서구문화회관은 진짜 마을 주민들의 유입이 자유로웠던 공간이에요. 제 첫 인생 무대이기도 하고요. 여기서 피아노 연주회를 개량 한복 입고 했어요. 그러고 바로 옆에 고등학교 있고, 초등학교 있으니까 애들이 수학여행 때 춤 연습하러 여기 많이 왔었어요. 진짜 개방적이고 친근한 공간이었어요.

저 고등학생 때는 서구문화회관에서 학교 축제를 했는데, 제가 연출을 하고 그랬어요. 원래 연극에 대한 진로희망이 있던 건 아니었고, 사회 선생님이 수행평가로 연극을 만들어 보라고 하셨어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미워하던 것들을 이해하게 됐어요. 그 때 처음 연극을 만나게 됐고, 연극과에도 진학하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서구를 탈출 하려고 했는데, 서울에 동료들이 서구문화회관에 와서 공연 한다고 했을 때 정말 이상했어요. 근데 공연도 좋고. 제가 여기서 공연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거 같아요. 요즘 제 목표는 여기서 공연을 올리는 거에요. 엄마가 제 공연을 배다리 마을에서 2018년에 한 번 보시고, 아무것도 못 보셨거든요. 엄마랑 가족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제 공연을 보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인천지하철 2호선 가정중앙시장역이에요. 저 쪽에 저희 엄마 노래방이 있어요. 이 동네 주변, 가정동, 서구청까지 여기 인근이 정말 상업적으로 활발한 도시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파트 생기면 장사가 잘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엄마가 아니래요. “원래 나의 공간은 나처럼 일하는 사람들이 쉬러 오는 공간인데, 내 주변에 일하는 사람들은 다 사라졌고, 여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로 소비를 하러 가지, 여기서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아무리 아파트가 들어와도 엄마의 소득 활동은 그렇게 변화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굉장히 마음 아팠던 부분이고, 아 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엄마한테 “그럼 지금 이 나이가 되어도 가장 하고 싶은 거, 아직 못했던 게 있다면 하고 싶은 게 뭐야?” 라고 물어봤을 때 엄마가 하셨던 말씀이, “너 같은 딸 하나 더 낳고 싶어”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 그때 펑펑 울었어요.

인천 서구에서 살면서 나라는 존재가 되게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사실 엄마에게는 나를 키우면서 여기에 공간 하나 하나 역사가 쌓여 있는 거잖아요. 엄마는 다 그렇게 밟아가고 계셨고, 엄마의 일생이 그렇게 해내셨고, 그 일들 가운데서 나는 자랐고, 살아있고, 연극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여러분을 만나고 있고. 이러니까 제 기억이 탈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잘 깊숙하게 들여다봐서, 누군가 다시 읽을 수 있게 여기에 무언가를 조망해야 하는 게 저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서 제목을 <탈출과 귀속>으로 잡고, 함께 걸어보았습니다. 대화도 많이 나누면서 같이 걷고, 오미자 차도 맛있게 먹어주시고, 저희 어머니에게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해요.

 

마치며. <탈출하고 싶은 서구_탈출과 귀속>

내 고장 인천을 탈출의 근거로 삼아 서울로 왔습니다. 이제 저는 서울 시민입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자꾸 넌 인천이라 말 할까요.

그저 싫어 매일 탈출하고 싶었던 그곳을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걸음을 멈춘 후 길을 되돌아보며 이제야 이유를 알아 단숨에 화해합니다. 그 화해의 경험을 함께 산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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