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의 중심은 계산동이었다, 80여 년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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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의 중심은 계산동이었다, 80여 년 전까지
  • 배성수
  • 승인 2022.12.1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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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수가 바라보는 인천 문화유산]
(20) 부평동 다시보기 1 - 부평이라는 이름
배성수 / 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

 

‘부평’이라는 이름이 붙은 초등학교를 보면 조금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부평동·부평서·부평남·부평북 초등학교는 모두 부평구에 있는데 정작 부평초등학교는 계양구 계산동에 위치한다. 학교 이름에 들어간 동·서·남·북의 기준은 무엇이며, 왜 부평초등학교만 멀리 계산동에 떨어져 있을까?

 

‘부평’이라는 이름의 시작

이 질문의 해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부평의 중심이 계산동에서 부평동으로 옮겨진 탓이다. 불과 80여 년 전까지 계산동은 부평의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관아가 있던 곳이자, 일제강점기 면사무소가 위치했던 명실상부한 부평의 읍내였다. 계산동에 있던 부평의 중심이 지금 부평역 앞으로 옮겨진 것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을 전후해서다. 전쟁 지원을 위해 조병창을 비롯한 각종 군수공장이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모여들며 한적한 농촌 마을이던 부평역 일대가 도시로 변해갔다. 도시화에 따른 중심의 이동은 지명까지 옮겨버렸다. 부평이라는 이름은 부평역 일대로 옮겨붙었고, 600년 가까이 부평 읍내로 불리던 계양산 남쪽 기슭은 계산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역사 속에 ‘부평’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인 1310년이다. 그 전까지 부평의 지명은 주부토군, 장제군, 수주, 안남도호부, 계양도호부, 길주목 등 시대에 따라 자주 변해왔다. 충선왕 때 붙여진 부평이란 이름은 그 후 1914년까지 600년 넘게 이곳의 행정 지명으로 쓰였다. 조선시대 부평의 영역은 생각보다 넓어서 지금 인천광역시 부평구·계양구·서구에 경기도 부천시 전역, 그리고 서울시 구로구와 강서구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인 1914년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를 위해 전국의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했다. 전국 12개 주요 도시는 ‘부(府)’로, 나머지 촌락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220개 지역을 ‘군(郡)’으로 편제했다. 이때 지금의 중구와 동구 지역만 인천부로 정하고, 인천도호부의 나머지 지역과 부평도호부 전역을 통합하여 부천군이 되었다. 계산동에서 부평동 사이의 공간이 모두 부천군 부내면에 속하게 되면서 부평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는 듯 했다.

 

18세기 중엽 제작된 광여도 중 부평부 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
18세기 중엽 제작된 광여도 중 부평부 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

 

학교 이름 ‘부평’

이제 처음 던졌던 질문의 답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자. 1895년 7월 갑오개혁에 따라 ‘소학교령’이 공포되면서 본격적으로 근대식 초등교육이 시작되었다. 도읍 한성을 비롯하여 인천, 부산 등 주요 도시마다 하나둘 공립소학교가 생겨났으며, 소학교 건립 열풍은 전국 각 고을로 퍼져갔다. 1899년 부평에도 공립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인천과 강화에 비해 3년 정도 늦은 시점이었다. 다른 고을과 마찬가지로 새 건물 지을 돈이 없어 관아 일부를 빌려 개교했고, 학교에 고을 이름을 붙여 ‘부평군 공립소학교’라 했다. 그 후 학제 개편에 따라 부평공립보통학교, 부평공립심상소학교로 불리다 1940년 4월 대정공립소학교가 되었다. 경인시가지계획의 일환으로 인천부의 영역을 확장할 때 상리라 불리던 계산동을 대정정(大正町)이라는 일본식 지명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당시 군수공업도시로 변해가던 부평역 일대도 인천부에 포함되었고 소화정(昭和町)이란 지명이 붙었다.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모여들어 인구가 늘면서 학교 설립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인천부는 두 곳에 공립소학교를 설립했다. 마찬가지로 행정 지명을 학교 이름으로 사용했는데 부평역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학교를 ‘소화동 공립소학교’, 서쪽의 학교를 ‘소화서 공립소학교’라 불렀다. 그리고 1941년 3월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변경하는 일제강점기 마지막 학제개편에 따라 세 곳의 소학교도 국민학교가 되었다.

 

1940년대 초 부평국민학교로 쓰이던 부평도호부 관아
1940년대 초 부평국민학교로 쓰이던 부평도호부 관아

 

광복이 되며 일본식 행정지명을 우리식으로 고쳐 붙이는 절차가 뒤따랐다. 대정정은 계산동으로 소화정은 부평동이 되었다. 당연히 학교 이름도 바꾸어야 했다. 부평동의 소화동, 소화서국민학교는 부평동, 부평서국민학교가 되었고, 계산동의 대정국민학교는 계동국민학교로 이름을 변경했다. 광복 당시 부평은 이미 부평역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부평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계산동 대정국민학교의 이름을 바꿀 때 원래 붙어있던 부평 대신 계산동의 준말인 계동(桂洞)을 붙였다. 50년 이상 사용해 온 교명이라 해도 지명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학생은 물론 주민들 사이에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 계동국민학교의 이름을 다시 부평국민학교로 바꾸었다. 20여 년만에 원래의 학교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아마도 1년 전 인천시를 네 개의 구(區)로 나누는 구제(區制)를 실시했을 때 계산동과 부평동 모두 북구에 속했던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같은 행정구역으로 묶이면서 거리가 조금 있더라도 부평이라는 교명을 사용하며 발생하는 혼란은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교 이름을 되찾아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동창생들의 바람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는 사이 1962년에 부평역 남쪽에 부평남국민학교가, 1967년에는 갈산동에 부평북국민학교가 잇달아 문을 열었다. 결국 부평 동·서·남·북 초등학교의 기준은 부평역이 되는 셈이다.

 

1965년 계산동 지도에 보이는 ‘계동초등학교’
1965년 계산동 지도에 보이는 ‘계동초등학교’

 

역명 ‘부평’

학교 이름이 그러하듯 부평의 지명을 혼란스럽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아닌 부평역이다. 1899년 9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설치된 부평역은 부평 읍내가 아닌 당시로서는 변두리였던 동소정면 대정리에 위치했다. 지금 같아선 철도나 지하철 노선을 계획할 때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도심을 경유해야 하겠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미국인 모오스는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개통을 불과 8개월 앞둔 시점에 그 권리를 모두 일본인에게 넘겨야 했다. 자금이 충분치 못하다보니 철도 노선을 설계할 때 인천부나 부평부 관아를 경유하지 않고 최단거리 노선을 선택했는데 노선의 길이가 늘어남에 따라 공사비도 증가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경인철도는 인천 관아에서 북쪽으로 4km 가량 떨어진 다소면 충훈부리를 거쳐갔고, 부평 관아에서 남쪽으로 약 6km 거리에 있던 동소정면 대정리와 마분리를 지났다. 개항장 주변에 인천역과 축현역(지금 동인천역)을 두었지만 인천 관아가 있던 문학 사람들은 지금 도원역 근처 우각리역을 이용해야 했고, 부평 읍내 주민들은 15리 길을 걸어야 부평역에 닿을 수 있었다.

부평역이 들어선 동소정면 대정리는 부평의 남쪽 끝에 있던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기차 역이 놓인 지 15년이 지났어도 인구 500명이 넘지 않았고, 역 주변으론 주막 외에 변변한 상가 건물 하나 없었다. 1934년 경인선 10개 역 중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다. 그런 탓인지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계산동 일대를 부평 읍내로 부르고 있었다. 1937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부평역 주변 너른 들판으로는 전쟁 지원을 위한 군수공장이 하나둘 들어섰고, 부평은 공업도시로 변해갔다. 그 배경에 부평역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전국에서 실려 온 자재가 부평역을 통해 각 공장으로 운반되었고, 공장에서 생산된 군수품은 부평역에 모여 인천항으로 옮겨졌다. 부평출장소가 옮겨오면서 광복 후에는 동네 이름마저 부평동으로 바뀌었다. 부평역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부평역 모습
1920년대 부평역 모습

 

부평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동소정면 대정리에 처음 자리 잡았던 부평역. 1920년대 부평역 사진은 마치 시골 간이역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목조 건물 내부에는 온돌 깔린 대합실이 있었고, 밤이면 호롱불을 켜고 손님을 맞았을 것이다. 불과 백년 뒤 하루 60만 넘는 사람들이 이 역을 이용할 것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사진 속 역무원은 한가롭게 물을 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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