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국갈비가 칼칼하고 시원해 - 일억조식당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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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국갈비가 칼칼하고 시원해 - 일억조식당을 찾아
  • 김시언
  • 승인 2022.12.1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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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이야기] (9) 강화특산물 젓국갈비
강화 새우젓으로 간을 한 젓국갈비
강화 새우젓으로 간을 한 젓국갈비

 

강화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무엇일까? 대표적으로 ‘젓국갈비’랑 ‘순무’다. 그중 젓국갈비는 강화를 찾는 외지인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발품을 팔아서 꼭 먹게끔 한다. 이름부터 재밌다. ‘젓국갈비’.

젓국갈비는 언제 생겨났을까. 세월을 거슬러, 고려 무신정권 시절로 올라간다. 당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공격하던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 왕실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강화도는 개성과 가까웠고, 몽골군이 수전에 약하기 때문이었다.

 

강화 특산물로 만들어 진상한 젓국갈비

왕실이 옮겨왔을 때 강화도에서는 왕에게 진상할 음식이 마땅찮았다. 사람들은 고심하다가, 강화 특산물을 모아 왕에게 상을 올렸다. 바로 이때 젓국갈비가 탄생했다. 필자는 처음에 젓국갈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꽤 낯설었다. ‘젓국’과 ‘생선’의 조합은 몇 번 먹어봤다. 우럭젓국, 농어젓국, 대구젓국. 꾸덕하게 말린 생선을 새우젓이나 그 밖의 젓갈로 간을 해서 젓국을 끓인 건 부산이나 태안 신두리, 당진 쪽에서 먹어봤다. 성인이 돼서 접한 젓국은 참으로 낯선 음식이었지만 생선과 젓국이 묘하게 잘 어울려 맛이 좋았다.

하지만 ‘젓국갈비’는 생소했다. 필자 머리 속에는 ‘갈비’ 하면 소갈비나 돼지갈비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로 이사 와 살기 전에 답사왔다가 ‘젓국갈비’를 처음 먹어봤다. 처음 본 젓국갈비는 고춧가루와 고추장 등 붉은색을 넣지 않아 맑은 국이었다. 커다란 냄비 안에는 깍둑썰기한 돼지갈비가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큼직하게 썬 채소와 두부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낯설어 잠시 머뭇거리다 숟가락을 넣었다.

맛이 시원했다. 소금 대신 새우젓으로 간을 했고, 청양고추가 들어가 칼칼했다. 젓국갈비는 이렇게 돼지갈비와 강화의 채소, 새우젓으로 간을 하는 음식이다. 이때 새우젓은 꼭 강화도에서 난 걸로 쓴다. 맑은 육수, 늙은 호박, 감자, 배춧속, 미나리 등등 강화에서 난 채소를 넣고 강화 콩으로 만든 영양가 높은 두부 맛이 특이했다. 이 모든 재료를 넣소 팔팔 끓이니 국물이 진했다. 강화 새우젓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좋다. 강화 새우젓은 감칠맛 나고 영양가 높기로 이미 이름나 있다. 끓일수록 간이 더 진해진다.

 

강화읍내 용흥궁 옆에 있는 일억조식당
일억조식당 내부
일억조식당 내부

 

진달래축제를 시작하면서 재탄생한 젓국갈비

요즘은 강화 웬만한 음식점에서는 모두 젓국갈비를 먹을 수 있다. 젓국갈비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러 읍내에 자리 잡은 ‘일억조’ 식당을 찾아가 봤다. 33년간 한자리에서 음식점을 하는 임경자 대표는 짬짬이 생활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하다.

강화 삼산면 석모도가 고향인 임 대표 친정어머니는 강화읍에서 50년 정도 음식점을 했다. 냉면, 돼지갈비, 소곱창 딱 세 가지를 고집했고, 손님들 입맛에 착착 감기는 음식을 만들었다. 임 대표는 어머니 일을 돕다가 지금의 건물 주인에게서 음식점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임 대표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스물아홉 살 때였다. 장사가 잘 돼 나중에는 친정엄마가 가게를 접고 도와주었다.

젓국갈비는 오랫동안 명맥이 끊겼다가 새로 개발됐다. 2008년 강화군은 고려산 진달래축제를 열면서 강화에도 향토음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임 대표는 그때가 생상하다.

그전에 임 대표 시어머니가 아프기 전에 식당 일을 봐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시어머니와 함께 젓국갈비를 만들어 팔았다. 시어머니는 ‘김여사님’이라고 불리면서 여기저기 동네 잔칫날에 가서 음식을 장만해 줄 정도로 손맛이 좋았다. 그런 시어머니와 강화 음식이라고 해서 젓국갈비를 만들어 팔았는데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때 아리랑집에서도 젓국갈비를 만들어 팔았다.

그뒤로 강화군이 진달래축제를 만들면서 강화에 있는 식당 주인을 모두 오라고 해서 교육했다. 임 대표는 거기에서 강의를 들었는데, 강의 내용은 시어머니와 어머니가 가르쳐준 방식과는 달랐다. 임 대표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금의 젓국갈비를 손님에게 내놓았다. 새우젓국갈비에는 새우젓과 두부가 관건. 새우젓도 질 좋은 강화새우젓을 쓰고 두부도 꼭 손두부를 주문해서 쓴다. 그래서 일억조 젓국갈비는 칼칼하고 부들부들한 두부 맛을 볼 수 있는 것.

 

33년 동안 식당을 꾸려온 임경자 대표
33년 동안 식당을 꾸려온 임경자 대표

 

돌파구처럼 찾아온 시

‘일억조’라는 이름은 임 대표가 가게를 열면서 남편과 고심해서 지었다. “가장 중요한 간판을 뭘로 할까 싶었죠. 그때는 젊었으니까 돈을 벌자 했어요. 일억은 더 벌 거 같으니까 억조를 붙였죠. 숫자 일억조. 우리 집에 드나드는 손님도 일억조 벌고, 우리도 일억조 벌자 했어요. 식당은 이름을 따라가는지 장사가 참 잘 됐죠.” 당시에 식당에는 피로연장이 있었다. 목금토일은 거의 잔치 예약 손님 많이 받았는데 그때 돈을 많이 벌었다. “그때는 오만 원짜리도 없고 카드도 없고, 그때 돈을 많이 벌었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죠.”

물론 처음에는 힘이 들어 장사를 끝까지 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럴 때마다 친정어머니는딱 10년만 해보라고 다독였다. “모든 건 10년이 지나야 자기 색깔을 찾을 수 있다. 딱 십 년만 해봐라. 그때까지만 해보고 아니면 그때 그만둬라.” 임 대표는 친정어머니 말대로 10년을 해냈고, 그 뒤로 십 년이 세 번, 그러고도 삼 년이 지나 33년을 한자리에서 가게를 한다. 가게 위치는 좋다. 용흥궁과 맞닿아 있고 주변에 주차장도 널찍한 게 몇 개나 있다.

한창 가게가 잘 될 때 임 대표는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됐다. 잘 살아 온 것도 같았는데, 문득 ‘네 청춘은 어디다 바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돌파구로 찾은 게 시였다. 가게 하랴, 병석에 계신 시어머니 모시랴, 그때 숨 쉴 데가 필요했다. 강화신협에서 열린 시 강좌에 가서 시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강화문학회의 필요성을 깨닫고 뜻을 모았다. 강화에 있는 국어선생님, 군청직원들을 모시고 일억조 식당에서 창립총회를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2년 동안 문학회 활동을 하고 있다. 임 대표에게는 문학회 활동이 삶의 원동력이 됐다. 임 대표는 주로 새벽에 시 쓴다. 17년은 함바집을 운영한 이야기를 시로 풀어냈다. 시집 《함바집 이야기》(오감도)에는 생생한 함바집 이야기가 녹아 있다.

 

젓국갈비2_직접 만드는 순무김치
직접 만드는 순무김치

 

초심을 잃지 않고 정갈하게

일억조 식당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식은 젓국갈비. 함께 내놓는 순무김치도 손님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순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넣는 고춧가루는 교동 친환경 고춧가루를 쓴다. 김장은 따로 하지 않는다. 거의 날마다 하는 셈. 손님한테 내놓는 김치는 꼭 담가서 내놓는다.

20년 전에 일억조 식당은 강화에서 가장 컸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크고 세련된 음식점이 많이 생겼다. 젊은 친구들이 오다 보니 뷰도 찾고 깨끗한 집을 좋아하는데, 거기에 따라가기는 좀 벅차다. 손때가 묻은 식당을 두고 다른 데 가는 것도 그렇고, 식당을 그만둘 때까지 손님에게 정성껏 내놓을 생각이다. 물가가 다 오르지만 가격은 올리지 않을 생각이다. 내 집에 찾아오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직원들과 맛있고 정갈한 음식으로 손님을 맞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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