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한 필, 죽어서 한 필’ - 강화 소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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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한 필, 죽어서 한 필’ - 강화 소창의 기억
  • 김시언
  • 승인 2023.01.1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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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이야기] (13)강화소창-소창체험관
소창체험관은 강화직물산업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소창체험관에서 강화 직물산업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살아서 한 필, 죽어서 한 필’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소창’을 많이 썼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이불깃과 베갯잇도 소창을 썼고, 그 짜투리가 남으면 행주를 만들어 썼다. 행주는 김칫국물이 묻으면 묻은 대로 쓰다가, 낡을 대로 낡아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는 아궁이 불 속으로 툭 던졌다. 그러고 나면 찬장 한편에 만들어 둔 새 소창이 부엌에 등장했다. 이렇게 흔히 쓰이던 소창을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강화에 와 살면서 다시 짠하고 만났다.

그래서 요즘은 소창으로 만든 물건을 아주 헤프게(!) 쓴다. 행주, 손수건, 수건, 보자기 등등. 소창으로 만든 물건은 부드러운 데다 물을 잘 빨아들이고, 게다가 가성비도 꽤 좋다. 소창은 우리나라 사람의 한평생 의례와 아주 밀접하다. ‘살아서 한 필, 죽어서 한 필’이라는 말이 있듯이, 태어나면서는 어린아이 기저귀를 쓰고, 죽어서는 관을 묶는 끈으로 쓰기 때문이다. 소창은 목화솜을 자아내어 실을 만들고, 이 실을 씨실과 날실로 하여 평직으로 짠 옷감을 말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소창을 만드는 실은 거의 수입해서 쓴다고 한다.

소창직물스탬프 체험관에서는 관람객들이 손수건을 만들고 있다
소창직물스탬프 체험관에서는 관람객들이 손수건을 만들고 있다

강화는 직물산업의 도시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강화소창’이라는 말은 아주 유명하다. 무엇보다 품질이 좋았다. ‘소창’하면 강화를 떠올릴 만큼 강화는 직물산업의 도시였다. 오륙십 년 전에 강화읍에만 직물공장 종업원이 4,000명이었다고 하니 그 규모는 짐작할 만하다. 강화에서 직물산업이 발달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요인은 풍부한 노동력, 개량직기의 도입. 이로써 공동작업장을 운영할 수 있었고, 조직적인 판매 경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강화는 직물산업이 전성기를 이뤘다. 하지만 섬유산업이 인조직물을 생산하는 대구로 옮겨간 뒤로 쇠퇴하고 말았다.

한때 강화에는 130개나 되는 소창공장이 있었지만, 현재는 일곱 군데만 남아 있다. 그것도 나이든 분이 운영하는 곳이 많아 언제까지 명맥을 이어갈지 몰라 안타깝다. 강화에 소창공장이 많았던 것은 집집이 손과 발을 사용하는 ‘족답기’를 사용하고 개량직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계로 생산성을 높이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작업할 수 있는 공장 형태의 공동작업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상품을 잘 만들어도 중요한 것은 판로. 강화 소창공장들은 소창을 판매하는 행상을 체계적으로 조직해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넓혔다. 조선 지역을 벗어나 간도에서도 판매됐을 정도다. 그래서 강화는 직물산업으로 전기는 1934년, 전화는 1932년에 개통됐다.

1960년대 심도직물은 대지 3,500평에 공장 건물만 32개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여기서 양단, 커튼, 카페트, 치마 등을 생산했다. 1976년에는 이화견직, 조양방직, 경도직물, 남화견직, 평화견직, 동광직물, 경화방직이 있었다.

하지만 강화 직물공장들은 석유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나일론의 등장과 일회성 기저귀의 출현으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천연소재를 이용한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강화소창이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소창으로 만든 손수건, 행주, 타월 등 일상생활용품이 인기를 끈다

요즘 강화의 명소로 떠오른 조양방직 카페도 방직공장이었다. 조양방직은 1937년에 홍재용, 홍재묵 형제가 설립했고, 700평의 2층 건물과 50여 개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과 마직물 염색을 했다. 이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1958년에 폐업했고, 한동안 방치됐다가 지금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전시관에서 관람객들이 문화관광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전시관에서 관람객들이 문화관광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인기가 많은 소창체험관

소창공장은 겨우 명맥을 이어갈 뿐이지만, 강화소창의 옛 명성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소창체험관.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20번길 8에 있는 소창체험관은 오랫동안 방치된 한옥과 평화직물 공장을 군에서 매입·정비해 2018년에 문을 열었다. 1938년에 지어진 이 한옥 건물은 1956년에 평화직물 공장으로 쓰인 건물이다. 현재는 강화 직물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쓰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소창체험관은 크게 전시관, 소창 직물 스탬프 체험관, 소창 기념품 전시장, 직조 시연, 다도 체험관으로 나뉜다. 전시관은 강화 소창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고, 직물공장의 과거 사진과 직물제조 과정을 표현한 디오라마, 강화직물산업의 역사와 과거 직물을 살펴볼 수 있다.

 

소창 직물 스탬프 체험관은 인기가 많은 곳으로 소창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소창 체험을 예약하거나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다. 직원의 설명을 들은 다음 천에 여러 가지 스탬프를 찍어서 손수건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사용되는 스탬프는 강화 특산물을 표현한 것으로, 포도 인삼 순무 새우젓 진달래꽃 쌀 고구마 등등이다.

소창체험관에서 사용하는 직물은 전시관 옆에 있는 직조시연관의 직조기에서 직접 생산한 것이다. 방직기계가 돌아가는 현장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직조시연관 옆으로는 목화밭이 만들어져 있어 목화솜을 직접 눈으로 관찰할 수 있다. 직조기는 과거 직물공장에서 쓰던 직조기이며 실제로 작동해 소창을 짠다. 참, 시연관 옆에서 한 가지 눈여겨볼 게 있다. 나무전봇대. 전국적으로 몇 개 남지 않았다는 나무전봇대 가운데 이곳에 두 개가 있다. 전기를 끌어오던 초창기 때 쓰던 전봇대다.

기념품 전시관에서 고려시대 한복을 입어보는 사람들.
기념품 전시관에서 고려시대 한복을 입어보는 사람들.

소창 기념품 전시관에서는 한복을 입어볼 수 있다. 전시관 1층에서는 한복체험과 소창으로 만든 제품을 볼 수 있으며, 한복은 생활한복과 고려시대 한복이다. 필자가 찾았을 때는 두 가족이 한복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2층에는 방직과 관련된 전시실로서 관련 사진이 많았다. 또 관광객이 잠시 쉴 수 있는 쉼터가 있고 소창을 여러 모양으로 꾸며 놓아 볼 만했다.

전시관 옆 건물도 들어가면 좋다. 이 건물은 1938년에 지어진 건물이고, 여기서는 다도 체험을 할 수 있다. 강화 특산물인 순무를 덖어 만든 순무차와 강화 약쑥으로 만든 약쑥차 등을 맛볼 수 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차를 맛볼 수는 없지만 건물 내부는 관람할 수 있다.

강화 소창은 주로 23수로, 광목은 10수 이하로 쓴다. ‘수’란 실의 굵기를 말하고, 용도에 따라 수가 정해지고 지금은 100수까지 나온다. 목화솜 1그램 기준 면실 20미터를 뽑으면 20수, 40미터를 뽑으면 40수라고 한다. 타월을 살 때 눈여겨보면 30수, 40수라고 써 있는데, 이 숫자로 옷감의 촘촘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소창체험관은 월요일에 쉬고 평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체험은 현장에서 접수할 수도 있으나 사람이 많을 때는 예약이 필수. 032)934-2500.

 

직조시연관에서 소창을 짜고 있다.
직조시연관에서 소창을 짜고 있다.
시연관 옆에 나무전봇대 두 개가 있다.
시연관 옆에 나무전봇대 두 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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