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를 찾는 연구는 나의 숙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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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는 연구는 나의 숙명입니다”
  • 김경수 기자
  • 승인 2023.01.31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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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이 만난 사람]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연구소, 유공자 3700여명 발굴 · 373명 포상 성과
올 2월 말에도 325명 포상신청 준비
개인 연구자로도 의병 1700명 발굴해내

“시 차원 독립유공자 발굴 사업 필요”

일제침략기와 강점기 구국·독립운동을 했던 순국선열들을 찾아내고 이분들을 기리기 위해 포상을 신청하는 의미있는 활동을 하는 기관으로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가 단연 돋보인다.

지난 2019년 5월부터 2022년 8월까지 3년 3개월동안 연구소가 찾아낸 독립운동가는 무려 3700명, 이중 포상을 받은 이는 373명에 달한다. 이 기간 매일같이 하루 3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낸 셈이다.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이들 중심에는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 있다.

“1962년부터 현재까지 국가보훈처가 포상한 독립유공자는 모두 1만7588명입니다. 이중 인천지역 포상자는 겨우 23명에 불과, 현재 행정구역으로 들어온 강화, 부평, 옹진을 합해도 99명으로 너무 적습니다. 최근 몇년 사이 지자체마다 독립유공자 발굴에 나서 성과를 거두고 있죠. 인천에서도 독립유공자 발굴사업에 적극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천지역 포상실태 이야기부터 꺼내는 이 소장이다.

그나마 지난 2021년, 2022년 연구소가 중구 51명, 강화군 30명, 송도중·고 출신 97명의 독립운동가를 찾아내 이중 161명에 대한 포상을 신청했다.

“독립유공자 발굴 사업은 군·구 단위 보다는 시 차원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예컨대 중구에 살고 있던 의병이 강화에서 활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대상지역도 ‘인천부’로 지역을 넓히는 것이 맞습니다.”

그 이유로 이 소장은 1895년 당시 행정구역을 근거로 들고 있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고종32년(1895년) 5월26일 반포한 ‘지방제도개정건’에서는 전국을 23부로 구분, 인천부에는 인천군을 비롯, 김포군, 부평군, 양천군, 시흥군, 안산군, 과천군, 수원군, 남양군, 강화군, 교동군, 통진군이 포함돼 있다.

 

밤낮 없는 연구

전국의 대학과 대학원 중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기관으로는 인천대 연구소가 유일하다. 설립연도는 2020년 3월. 이 소장이 이곳에 온 것은 그보다 2년 더 앞선다. 캠퍼스 한켠에 연구실 모양새가 갖춰지자마자 그날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문을 연 목적은 미포상 독립유공자를 찾아내는 데 있습니다. 나름 의병연구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더 빨리 발굴에 나서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연구는 곧바로 성과로 이어졌다. 2019년부터 매년 두차례씩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 포상을 신청했다.

“초기에는 연구소가 정식 출범을 하지 않은 상황이라 인천학연구원, 중국학술원 이름으로 신청을 했습니다.” 그 수가 지난해까지 3700명이다.

연구소가 유독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는 이 소장의 연구방식에 기인한다.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자료인 판결문이나 독립운동사 기술 자료등을 넘어 일본 외무성 비밀기록을 살펴야합니다. 폭도사 편집자료 등 어마어마합니다. 그 자료 중 유의미한 내용을 찾아내려면 이 분야 오랜 연구가 바탕이 돼야 합니다.”

어렵게 도달한 자료를 풀어내는데도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똑 같이 주어진 24시간을 최대로 쓰는 수 밖에 없다.

“새벽 5시 캠퍼스 주차장에 들어서면 온통 캄캄하죠. 연구소로 올라가려면 복도 비상등에 의지해 벽을 더듬으며 가야해요.” 퇴근도 하루 경계를 넘기기 일쑤다. 그래도 본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말한다.

“돌아보니 1년에 1000명 정도 찾아낸 것 같네요. 자료를 분석해 유공자를 찾아내도 공적조서를 정리할 시간이 또 필요합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죠. 정리를 도와주는 연구원이 절실합니다.”

현재 독립운동사연구소의 연구원은 이 소장을 포함해 6명이다. 모두 석·박사 학위 소유자들이다. “다음달엔 한명이 그만둡니다. 타 기관 용역 수행을 통해 연구자를 뽑을 수 밖에 없는 실정이 안타깝죠.”

해마다 3.1절과 광복절을 전후해서 국가보훈처에 포상신청을 올리고 있다. 오는 2월말에도 신청을 준비 중이다. 경상북도, 충청도, 황해도지역의 ‘3.1독립만세’를 중심으로 서훈을 받지 못한 이들이 대상이다. 모두 325명을 찾아냈다.

“광복회 시흥시지회 의뢰를 받아 의병 등 국내외에서 활동한 50명을 찾아냈습니다. 또 1939년 6월 일제는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을 잡아들여 2년후 징역 1년6개월에서 5년형을 내립니다. 이들 중 28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지난해 광복77주년을 맞아 발간한 5권의 총서 '일제침략기 의병장 73인의 기록'
지난해 광복77주년을 맞아 발간한 5권의 총서 '일제침략기 의병장 73인의 기록'

의병연구로 일관된 삶

이 소장의 의병 연구는 인천대 연구소에 오기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석사논문과 박사논문이 모두 의병연구에 관해서다.

“구한말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는 의병의 시대입니다. 나라의 부름 없이도 외침에 대항해 스스로 나선 이들이죠. 이들의 삶이 담긴 ‘의병가사’에 주목했습니다. 서로 나눈 서간문과 통문, 격문, 만사, 제문에 이르는 글들을 모아 의병가사로 묶었습니다. 문학사의 한 갈래로 만들어냈죠.” 7년이 걸린 박사학위 논문 ‘고종시대 의병가 연구’는 그렇게 완성됐다.

이보다 앞서 의병 연구서 ‘의병 찾아가는 길’을 잇달아 발간하기도 했다.

“의병의 삶을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출발했는데 파고들다보니 의병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삶에 대해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됐죠.”

2008년 의병 826명에 대한 포상을 신청했다. 당시 국가에서 포상을 하고 있던의병수는 800여명에 불과했다. “국가보훈처에서 감사패를 보내왔더라구요.”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에 나서 ‘한국의병사’를 완간하는 한편, 꾸준히 포상 신청을 이어갔다. 인천대에 오기 전까지 그가 신청한 이는 1700여명. 개인 연구자로서 해낸 성과다.

이 소장은 스스로 “의병귀신에 씌였다”고 말한다. 의병을 연구하게 된 단초가 있는 지 묻자 “집안에 의병으로 죽은 이가 4명”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큰집 당숙이 의병으로 나가 열아홉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이를 기화로 당숙의 아버지인 큰할아버지는 고문으로 사망하셨죠. 왜놈이 그 집에 불을 질러 큰할머니와 작은 할머니도 화를 입으셨습니다. 이후 저희 할머니와 아버지는 하얼빈으로 이주해 독립군기지에서 활동을 하셨죠.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당숙의 행적 자료를 찾으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분들을 포함, 모든 의병에 대한 연구는 할 수 있는 한 계속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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