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곳, 문수산성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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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곳, 문수산성을 보라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23.02.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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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따라 오르며 바라보이는 서해안 '절경'
문수골 성동저수지의 매력도
문수산성 북문
문수산성 북문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유럽인들은 아시아 곳곳이 황금이 가득한 땅이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거짓말쟁이였던 마르코폴로의 기록이 유럽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혁명의 노래와 함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삼색 깃발을 휘날리며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넷트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면서 공화정을 건립했건만 나폴레옹의 권력욕에 혁명의 공약과 공화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는 황제가 통치하는 국가로 다시 전락되면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제국주의 국가로 식민지 건설에 더 한층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1866년 병인년 8월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는 격랑의 물결로 빠져들어갈 운명이 시작됐다. 천주교 신자였던 부인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관대했던 흥선대원군은 러시아가 남하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의 건의에 따라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문수산 성동저수지 전경
문수산 성동저수지 전경

하지만 신부를 통한 프랑스와의 교섭이 잘 진행되지 않자 조 대비와 조두순ㆍ김병학 등 조정의 고관들이 천주교에 대한 비난을 소리 높여 외치고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은근히 비난하면서 철저한 탄압을 촉구했다.

흥선대원군은 '사교는 외적의 주구'라는 이유로 2만명에 이르는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강행했다. 이 결과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해 천주교인 8천여명이 희생됐다. 이것이 이른바 천주교에서 이야기하는 병인박해이다. 혹은 역사적 용어로 병인교난이다. 병인년에 있었던 천주교의 피해라는 것이다.

당시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자 지방에 있던 리델(Ridel) 신부는 18667월 배편을 이용, 조선을 탈출해 중국 천진에 있는 프랑스 동양함대 로즈(Roze) 제독에게 조선의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프랑스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10년 전인 1856년 인도차이나 기지사령관인 게랑(Guerin) 해군 소장에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라고 명을 내렸고 그는 조선 해역과 정치적 상황을 살피기 위해 군함 베르지니(Virginiee)호를 이끌고 7월에 와서 2개월 동안 조선 해안 전역을 조사하고 돌아갔다.

당시 게랑은 조선이 현재 허약해 열강들이 손을 뻗치고 있으니 프랑스가 먼저 무력으로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프랑스 정부에 보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고자 하는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는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에 대해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출병을 준비했으며 북경 주재 프랑스공사 벨로네는 186662일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를 통고했다.

로즈 제독은 아산만 일대를 지나 한강으로 통하는 강화해협을 발견하고 데롤레드호를 타고 한강 유역으로 진격, 다양한 정보를 확보하고 중국의 곡부로 돌아왔다.

로즈 제독은 곡부로 돌아 온 후 전열을 정비하고 93일 다시 2차 출병을 단행했다. 1차 침입이 서울을 함락하기 위한 예비 탐색전이었다면 2차 침입은 조선군과 일대 전투를 벌이고자 함이었다.

1차 침입시 3척이었던 군함은 4척으로 늘어 7척이 됐으며 일본 요코하마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까지 합해 무려 1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단이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1차 정찰로 인해 강화도 앞바다인 염하를 지나 한강으로 들어가 마포에 이르는 서울 접근로를 확인했지만 동시에 군함이 한강을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게 어려운 점도 파악했다. 그래서 대신 강화를 점령, 한강 어구를 봉쇄하는 작전을 세웠다.

서울을 왕래하는 뱃길이 막히면 세미 등의 수송이 불가능해져 서울의 식량 사정이 악화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조선 정부도 프랑스 함대에 굴복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96일 강화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이틀 뒤인 8일 강화읍을 점령, 관아의 무기고와 화약고 등을 파괴하고 외규장각 귀중품과 도서 등을 전리품으로 장악했다. 강화 함락소식이 전해지자 오랑캐를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흥선대원군은 의병과 관군 등을 강화로 출병하라고 명령했다.

조선군의 출정 소식을 들은 로즈 제독은 통진 인근 문수산성으로 120명의 군사를 파견, 우수한 무기를 동원, 강화로 진격하는 조선군을 물리치려고 했다. 문수산성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수산성은 둘레 약 2400m로 면적 208526로 적지 않은 산성이었다. 현재는 사적 제139호로 지정된 대표적인 경기도의 산성이다.

문수산성은 강화의 갑곶진을 마주 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줄기에서 해안지대를 연결한 성이었다. 문수산성이란 명칭은 산성 안에 있는 문수사에서 유래했다. 문수란 불교의 4대 보살의 하나로 지혜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수보살의 화신이 바로 사자다.

사자가 용맹하고 지혜가 있는 영특한 동물이어서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인정받게 됐다. 강화와 더불어 서해 앞바다를 지키는 최고의 요충지인 이곳을 문수의 화신인 사자처럼 용맹하게 지키라는 의미로 문수라 이름 지어진 것이다.

이 성은 김포 앞바다 건너의 강화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 입구를 지키는 임무로 축성계획이 세워졌다. 1694(숙종 20)에 축성됐고 1812(순조 12) 대대적으로 중수됐다. 다듬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성벽 위에 만들어진 담장인 여장을 전체 성벽에 둘러 쌓았다. 당시 성문은 취예루, 공해루 등 세 개의 문루와 세 개의 암문이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성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주둔하는 장교와 군사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프랑스군 120명이 문수산성을 쳐들어 갔지만 산성을 지키고 있던 한성근 순무초관과 그의 병사들은 만만한 군사들이 아니었다.

한성근 순무초관은 훗날 별기군 정령관으로 조선 군대를 신식 군대로 재편성하고 외세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기울인 전술의 귀재였다. 한성근 순무초관은 군대를 성곽 위에 철저하게 매복시킨 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며 문수산성을 점령하려고 하는 프랑스군을 최대한 성곽 가까이 올라오도록 유인했다.

그리고 기습적인 공격으로 프랑스군 3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프랑스군이 1856년 이래 조선으로 진격, 수차례 위협을 가하고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 이래 최초의 패배였다. 로즈는 조선군의 위력에 놀라 군사를 후퇴시키고 다시 정족산성으로 이동하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양헌수 장군의 군대에 기습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끝내 강화도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문수산성에서의 프랑스군과의 전투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외세와의 전투에서 첫번째 얻은 값진 승리였다. 이 전투로 인해 조선은 외세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흥선대원군은 이 일대에 해안 방어비를 설치하고 다른 나라 배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문수산성과 강화도 일대의 군사진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외세와의 항쟁을 준비했다.

현재 문수산성은 상당 부분 복원이 됐다. 문수산성을 따라 올라가면 서해안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처럼 멋진 절경을 보기가 쉽지 않다. 전략적 요충지에 만들어진 성이었기에 서해를 한눈에 들어오게 한 것이 오늘날에는 그저 아름다운 광경일 뿐이다. 하지만 이곳은 150여 년 전 외세의 침공에 맞서 조선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건 대전투가 있던 곳이다.

문수산에 방문하면 문수골힐링캠핑장을 만날 수 있다. 다소 요금이 비싼편이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나름 서부축의 힐링 장소로는 으뜸이라고 평하는 곳이다. 여기 문수골 성동저수지의 매력도 빠질 수 없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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