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東庭)이 내린 ‘청람'(靑藍) 새기며 평생을 정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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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東庭)이 내린 ‘청람'(靑藍) 새기며 평생을 정진하다
  • 김경수 기자
  • 승인 2023.03.13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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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7) 서예·전각 명인 전도진 - 60년 예술인생이 지켜본 인천서단(상)
/김경수 인천in 문화국장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상반기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일곱번째 순서는 전도진 서예·전각 명인이다. 김경수 인천in 문화국장이 만났다.

 

인터뷰하는 전도진 서예·전각 명인 

 

두분의 스승을 모셨다. 서단의 거목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선생과 전각의 대가 석봉(石峰) 고봉주(高鳳柱) 선생이다. 일찍이 고교시절 두 스승과 연을 맺은 뒤 평생을 서예술에 바쳤다. 올해로 서예인생 57년을 맞은 청람(靑藍) 전도진(田道鎭). 그의 삶이 곧 인천 서단의 현대사다. 동정 문하에 들어가 서예를 시작한 것이 지난 1966년, 2년후(1968년)엔 석봉의 제자가 돼 전각을 사사받는다.

“동정서숙’(東庭書塾)에서 글씨를 배운 지 3개월만에 스승이 저에게 ‘청람’이라는 아호를 내려주셨어요.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즉 푸른빛이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 스승을 뛰어넘으라는 의미로 주신거죠. 너무나 과분한 아호였지만 평생 품고 살았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싹을 이미 알아본 것이었을 까, 청람은 인천을 넘어 국내 서단에서 우뚝 섰다. 1981년 마지막 국전까지 세번의 특선과 일곱번의 입선에 오른다. 1983년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면서 세인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다. 그 때 나이가 35세였다. 서각에서도 1974년 한국전각협회 창립 당시 새파란 청년으로 회원 이름을 올렸다. 대통령 인장을 새겼는가 하면, 국새제작 자문위원도 맡았다. 무엇보다 청람의 서예술엔 창의성이 돋보인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는 ‘우행서법’를 시작했다. 전각에서 공간의 여백미를 살리기 위해 인(印)자를 과감히 생략한다. 글자의 조형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또 해온 그다.

“‘간절(懇切)하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작품을 할 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을 항상 지니고 삽니다.”인터뷰는 지난 3월 2일 인천문화예술회관 인근의 ‘청람서예전각연구실’에서 진행했다. 

 

실내에 들어선 순간 묵향이 가득하다.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한쪽 벽면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박스다. 그 세월 동안 완성한 작품이 담겨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작품 수를 묻자 “3천점 혹은 4천점 정도 이상”이라고 답하는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전각을 새기는 재료인 다양한 돌이 진열장에 빼곡하고, 그동안 전각에 썼던 칼 종류도 수백자루다. 일반적으로 작업실(창작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작품 액자나 족자가 단 한점도 걸려있지 않아서 내심 놀랐다. 이에 대해 “굳이 작품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서”라는 말에 또 한번 놀랐다.

 

김경수 인천in 문화국장과 인터뷰하는 전도진 명인

 

동정과 석봉의 제자가 되다

김경수: 2007년 3월경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인터뷰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기사를 다시 찾아보니 서예를 접한 세월이 41년째라고 하셨던데요, 그후 16년이 또 흘렀으니 올해로 57년을 맞으셨네요.

전도진: 네 기억합니다. 참 오랜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제가 1966년부터 글씨를 쓰기 시작했으니 햇수를 세어보면 그동안 57년이 흐른 셈 입니다.

김경수: 오늘 인터뷰는 선생님의 서예와 전각 예술 한평생을 회상하시는 시간으로 진행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곧 인천 서단의 역사이기도 하니까요.

전도진: 말씀드린대로 1966년 당시 고등학생 때부터 글씨를 배우기 시작해서 2년뒤 정식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1968년은 제게 남다른 해지요. 그해 제4회 경기도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냈는가 하면, 한국예총 주최 제7회 신인예술상에서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또 ‘인천미우동인회’와 이듬해엔 동정선생 문하 출신이 참가하는 ‘동정서숙전’에서 작가로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김경수: 작가 데뷔가 아주 빠르시네요. 당시 스무살을 막 넘기신 나이시잖아요.

전도진: 그렇죠. 스물한살의 청년작가였습니다. 사실 저의 출생지는 평북 철산이에요. 3살 무렵 피난을 왔구요. 호적, 본적, 가호적이 여럿이에요. 황해도 옹진군이라든가 연평도도 있구요, 적을 올릴 때마다 전도준이 됐다 전도진이 됐다, 이름과 생일도 들쑥날쑥 했어요. 초등학교는 충청도에서 다녔구요, 중학교부터 인천으로 와 쭈욱 이곳에서 살게 됐습니다.

김경수: 서예가로서 길을 터준 큰 스승 동정(東庭) 박세림 선생을 만나시게 된 인연이 긍금합니다.

전도진: 송도고 시절 미술반을 맡으신 분이 인천미술계 인물 중 한분인 황추 선생이었어요. 동정 선생과 나이가 같으신 1925년생이세요.

미술반에 갔더니 어느날 저에게 글씨를 배우는 ‘동정서숙’(東庭書塾)에 가보라고 하시는 거였어요. 중구 내동 107번지의 신경희 선생이 하시는 창제한의원 2층에 있었죠. 처음 갔던 날짜도 정확하게 기억이 납니다. (1966년) 4월 7일 이었습니다.

김경수: 동정의 문하가 되자마다 ‘청람’이라는 아호를 받으셨다면서요.

전도진: 학교 미술반을 다니면서 동정서숙에 가 글씨를 배웠습니다. 3개월이 지날 무렵 스승은 제자에게 ‘청람’(靑藍) 이라는 과분한 아호를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스승보다 더 뛰어난 제자가 되라는 의미를 담으셔서요. 평생 그 뜻을 새기며 살았습니다.

당시 저에게 글씨의 체본을 쓰라고 시키기도 하셨죠. 고교생 신분임에도 스승 옆에서 조교 역할을 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김경수: 동정께서 재주가 뛰어난 제자를 단박에 알아보셨네요.

전도진: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고교 졸업 직후 ‘동정서숙 회원전’에 작품을 냈는데요, 스승은 대뜸 윤원식 송도고 교장에게 연락하시더니 그 학교 출신 제자가 출품한 작품을 사라고 하신거예요. 2만원을 지불하고 모교에서 제 작품을 사갔습니다. 현재 송도고 도서관에 작품이 걸려있습니다.

김경수: 1968년은 또 한분의 스승 석봉(石峰)을 만나신 해이기도 하잖아요. 어떻게 만나시게 됐나요.

전도진: 그해 서단에 작가로 데뷔를 하면서 제 작품을 알리는 인(印)을 찍어야했는데 동정께서 석봉 고봉주 선생께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전각계 대가를 꼽자면 고봉주, 이기우 두분이셨습니다. 우선 석봉에게 제 이름자를 새긴 ‘인’ 한벌을 받았어요. 이 때 입문하고 싶다고 청을 드렸습니다.

김경수: 평소 전각에도 관심이 있으셨나요? 단박에 문하로 받아주시던가요?

전도진: 초등학교 때부터 도장 새기기를 좋아해서 감나무나 고무에 도장을 새기곤 했죠. 다행히 석봉은 저의 청을 흔쾌히 받아주셨습니다. 이 때부터 전각에 입문, 석봉의 1호 제자가 됐습니다.

몇 년후(197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국전각협회를 결성, 종로 관철동 파인힐화랑에서 제1회 ‘한국전각협회전’을 개최하게 됩니다. 협회 창립멤버로 이름을 올리고 회원전에 참가했습니다. 나이가 가장 어린 최연소 회원이었죠. 당시 최연장자는 석불(石佛) 정기호(鄭基浩, 1899~1989)선생 이셨습니다.

김경수: 그렇게 두분의 스승을 모시게 됐군요. 그런데 동정 선생은 일찍 작고하셨잖아요. 연을 오래 잊지 못하셔서 많이 안타까우셨을 것 같네요.

전도진: 동정 스승과는 1966년에 만나 1975년에 돌아가셨으니 10년을 함께 했네요. 그 후부터 외롭게 공부했습니다. 다른 스승을 모시지 않았죠. 작고하시기 바로 전 해에 종로 공평동에서 서실을 하나 더 내시면서 제게 운영도 맡기셨는데, 1년 만에 접어야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동정께서 맺어주신 석봉 스승은 그나마 오랫동안 모실 수 있었습니다. (1993년) 88세 나이에 타계하시기까지 25년을 함께 했습니다.

김경수: 동정선생이 ‘동정서숙’을 넘어 후학양성을 하셨던 활동을 들려주세요.

전도진: 인천교대는 검여 유희강 선생에 이어 출강을 하셨고, 인하대 서예반 ‘양현재’에서도 교육하셨죠. 작고하시기 전 해에는 남산 한국방송공사(KBS)에서 개설한 서예반을 가르치셨습니다. 인천교대 시절에는 제가 조교로 함께 했고, KBS에도 항상 저를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김경수: 스승이 돌아가신 뒤 활동 기반을 만드셨을까요?

전도진: 중구 경동 203번지에서 ‘인천서도회’라는 간판을 걸고 독자적으로 서실을 열었죠. 1975년이었습니다. 3년 후 인근 신신예식장 쪽으로 이사를 했고, 옛날 시민회관 인근으로 가면서 ‘청람묵연회’라고 이름을 바꿨어요. 이후 석바위를 거쳐 현재의 자리(남동구 문화서로 4번길 19-1)로 왔습니다. 지금은 ’청람서예전각연구실‘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영원한 마음속 고향은 내동 창제한의원 2층의 ’동정서숙‘입니다.

 

‘청람서예전각연구실’에서 서예를 하고 있다.

 

국전 특선 3회·입선 7회, 최연소 국전초대작가

김경수: 국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스무살 국전 입선을 시작으로 마지막 국전인 1981년까지 특선 3회와 입선 7회라는 괄목할 성적을 거두셨습니다. 또 35세에 국전 초대작가(이후 국립 현대미술관 초대작가)로 입신하셨죠.

전도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문교부 등 정부가 주최하던 국전은 1981년 30회를 끝으로 민간으로 넘어갔습니다. 국전에 모두 열다섯차례 작품을 냈고 그중 다섯 번은 낙선, 열 번은 입상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특선이 세 번, 입선이 일곱 번이에요.

김경수: 국전 초대작가에 오르려면 조건이 있을 텐데요.

전도진: 추천작가가 되는 조건은 특선을 연이어 4회, 격으로는 6회를 수상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조건이 아니죠. 그렇게 추천작가에 오른 뒤 4년이 지나야 초대작가로 국전 심사위원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국전 추천작가는 학사학위에, 초대작가는 석사학위에 준한다고 대통령령으로 정했으니까요. 권위가 대단한 것이죠.

그러다 1981년 초대작가 조건이 다소 완화됐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35세이상이라는 조건이 새로 생겼습니다. 당시 33세였던 저는 결국 2년을 기다려 1983년에야 최연소 초대작가에 올랐습니다.

김경수: 어느 자리에서든 모든 기록을 새로 쓰셨네요.

전도진: 그냥 저는 일재(逸才) 였다고나 할까요. 재주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국새제작 자문위원에 올라

김경수: 전각 분야에서도 공력이 깊으셔서 대통령 인장을 새기는가하면, 국새제작 자문위원을 거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도진: 앞서 전각의 두 거목으로 스승 고봉주 선생과 이기우 선생을 꼽았잖아요. 두 분 중 이기우 선생은 1968년을 전후로 그만 병이 나셨습니다. 전각을 하는 이가 없어서 제가 그 역할을 많이 했죠. 유명인들의 전각도 많이 새겨주었어요.

1975년엔 대통령 인장을 새기게 됩니다. 군 시절 모시던 분이 사성장군으로 오르셨는데 그 연으로 대통령 인장을 만드는 일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죠.

김경수: 대통령 인장까지 새기셨다면 당시 전각계 최고봉으로 인정받으신 셈이시네요.

전도진: 그것을 계기로 제 4대 국새제작 자문위원이 됐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그런데 당시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기도 했어요.

김경수: 안좋은 일이셨나요? 괜찮으시다면 무슨 일이신지 들려주시겠어요?

전도진: 전각 대가인 정기호 선생의 제자가 민홍규였는데 4대 국새를 제작한 인물이지요. 그만 그를 둘러싼 사고가 생긴거예요.

서울시경이 저를 불러서 조사를 받게 됐어요. 민홍규에게 제가 동인장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꼬투리로 물고 넘어졌어요. 대가성 뇌물로 인장을 받은 것 아니냐, 그런 내용이었지요.

민홍규가 국새를 제작하기 훨씬 전에 받은 일로 당시 의혹과는 절대 관계없는 일이라고 해명을 했죠. 결국 무혐의로 풀려나기는 했는데 당시 그 사건으로 행안부 차관이 옷을 벗는 일까지 벌어졌답니다.

김경수: 곤욕을 치를 뻔 하셨네요. 가슴을 쓸어내리셨겠어요.

전도진: 또 다른 일도 있었지요.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을 거예요. 국전이 없어진 뒤 저는 한국미술협회 초대작가로 심사위원을 다섯 번 정도 맡았죠.

석바위 서실로 수사관이 들이닥치더니 서초동 서울지방검찰청으로 끌고가는 거예요. 심사 관련 뒷돈을 받은 것 아니냐고 추궁을 하더군요. 당시 서울 예술의전당으로 강의를 나갈 때였는데, 심사에 비리가 있는 것 아니냐고 심문을 했습니다. 그 때 심사위원들은 무조건 불려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별일을 또 겪었습니다.

김경수: 예술계 심사에서 비위에 대한 뒷말은 자주 있었던 같습니다. 선생님도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셨네요.

 

전각 작업실
그동안 전각에 사용했던 수백종의 칼들을 한곳에 모아놓았다.

 

우행 서법을 시도하다

김경수: 전통서예의 좌행 대신 우행을 고집하는 것도 청람다우신 영역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입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그 시작부터의 역사를 듣고 싶습니다.

전도진: 좌우명은 아니지만 고교시절 창제한의원 2층 동정서숙에서 글을 쓸 때 한의원에서 약제를 썰던 구 선생이라는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제게 대뜸 “학생, 공부는 선생을 잡아먹어야 되는 기여” 라고 말을 건네시는 거예요. 순간 머리를 때리는 충격이 느껴졌어요. 스승을 빛나게 하려면 그 이상 공부에 매진을 해서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이후로 그 말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김경수: 끝없이 정진하시면서 깨달음으로 시도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전도진: 물론 전통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미술도 많이 좋아했죠. 명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첫째 공을 들여야 한다. 둘째 창신, 즉 새로워야 한다. 셋째 공감을 얻어야 한다. 이 세가지를 잡고 있습니다.

1968년부터 동정선생을 모시고 국전을 대비해 절에 가서 한달씩 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또 석봉선생은 추사를 몹시 좋아하셨어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추사는 왜 유명한가, 중국의 왕희지 소동파는 어떤 사람인가. 한 세상 태어나 똑같이 왔다 가는데 나는 뭔가. 10년 혹은 20년 훈련을 쌓은 후 어느 정도 지나면 내 공부를 해야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김경수: 청람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신 출발을 우행으로 보면 될까요?

전도진: 당시 서예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느꼈습니다. 구태의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한 일(一)이라는 글자를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잖아요. 좌행을 고집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나는 우행으로 쓰자.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후 고집스럽게 써왔죠. 처음에는 별스럽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세월이 흐른 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지요.

김경수: 우행으로 쓰신 세월이 얼마나 되신거예요?

전도진: 어느덧 35년이 된 것 같네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1987년경이었던 같습니다.

 

2001년 '월간서예'에 21세기 대한민국 중진서예가 10인에 선정된 청람 전도진 

 

인장에서 인(印)자 생략하다

김경수: 전각에서도 청람만의 기법을 만드셨죠? 인(印)자를 생략하신 것으로 유명하시던데요.

전도진: 예컨대 제 이름을 새길할 때 사각이나 원의 틀에 ‘전도진인’이라고 새겨넣잖아요. 여기서 ‘인’을 빼고 그 자리는 여백으로 비워두는 겁니다. 인이라는 글자는 도장이라는 의미가 있잖아요. 도장을 새기면서 굳이 도장이라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죠.

명찰을 생각해보세요. 제 명찰에 ‘전도진’이라는 이름자만 쓰지 뒤에 명찰이라는 글자를 붙이지 않는 식이죠. 이해가 되시나요?

김경수: 쉽게 설명해주셔서 쏙쏙 이해가 됐어요. 그렇게 바꾸어가신 거군요.

전도진: 손바닥을 뒤집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에요.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만요. 이제는 도장에 여백을 놓아두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김경수: 돌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쓰시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으신데요. 기왓장으로 작업을 하신 것도 기억납니다.

전도진: 그렇죠. 돌, 나무, 흙, 스티로폼, 기왓장 등에 전각기법이나 부조기법을 응용해서 새겨찍거나 두드려서 표현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습니다. 서예와 전각의 한계를 넓히려는 시도예요.

채색도 먹은 물론, 안료에 황토 흙까지 작품의 뜻과 어울리는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려고 애썼어요.

 

작품
전각 작품
전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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