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성·창의적 시도…자신의 예술세계 묵묵히 이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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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성·창의적 시도…자신의 예술세계 묵묵히 이어와
  • 김경수
  • 승인 2023.03.1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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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서예·전각 명인 전도진-60년 예술인생, 인천서단을 지키다(하)
/김경수 인천in 문화국장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상반기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일곱번째 순서는 전도진 서예·전각 명인이다. 김경수 인천in 문화국장이 만났다. 하편을 연재한다.

 

전도진 명인

글씨 회화성·조형미 돋보여

김경수: 글씨가 다분히 회화적으로 조형미가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계십니다. 고유의 작품세계를 우뚝 세우셨습니다.

전도진: 회화성이 돋보인다는 말에는 내심 동의하지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고대부터 다 그렇게 표현해오고 있었거든요. 물론 기법은 달라졌지만 표현 방식은 수천년 전에도 존재했다고 봅니다.

제가 중국 은나라, 주나라 문자를 많이 표현하다보니 회화성이 드러나보이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옛날 분들도 다 했던 표현이라는 겁니다. 시간이 지나도 좋다고 느끼는 건 같은 거니까요. 조금 더 제 나름대로 활용을 했을 뿐, 대단한 건 아닙니다.

다만 암각화 기법을 좋아합니다. 글씨는 희게, 배경이 어둡게 나오는 그 기법이지요. 이 역시 조형미를 일구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다는 선호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경수: 그럼에도 결론적으로는 남들과 다른 길로 가시고 있으시잖아요. 그에 대한 평가는 회화성이 남다르시다는 거구요.

전도진: 그렇게 봐 주시니 그 또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편으로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글로 써나간 작품들이 꽤 많은 데요, ‘내고향은 철산’으로 시작하는, 제 삶의 서사를 쓴 작품도 있어요.

기억나는 글 하나는 제게 글씨 공부를 배운 남중님 할머니에 대한 글입니다.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인상이 깊어서 즉흥적으로 쭈욱 글을 써내려 갔죠. 한 켠에는 붓으로 그분 모습을 그려 넣었어요. 완성된 작품을 보시고 고맙다며 우시더군요.

김경수: 저 같아도 대가인 스승이 저에 대한 글과 그림을 담은 작품을 만드신다면 그보다 감격스러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전도진: 저는 평소에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을 잘 안해요. 작가의 작업은 항상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겸손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돌과 칼에 담긴 서사

김경수: 서실에 들어왔을 때 인장을 새기는 돌이 가득한데다 그 세월 동안 사용하신 칼을 모두 보관하고 계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도진: 전각 재료로 돌에서부터 상아, 나무, 석고 까지 많은 것을 써 봤죠. 그중 돌은 80~90%가 중국산이에요. 또 전황석(田黃石)은 가격이 아주 비쌉니다. 돌을 구하러 중국에 많이 갑니다. 50, 60 차례는 갔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진열된 재료를 세보면 5,000방 정도 됩니다.

또 그동안 사용했던 칼은 400여자루 정도에 이릅니다. 직접 만든 것도 있고 산 것도 있지요. 당연히 스승에게 물려받은 칼도 있고요. 브러시는 1966년부터 쓴 것이에요. 이 모든 도구가 나의 역사고 흔적입니다.

김경수: 세월이 고스란이 묻어 있는 값진 도구네요.

전도진: 작품을 하는데 항상 최선을 다하자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재료만큼은 최고로 좋은 것으로 쓰자는 결심입니다. 붓과 종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재료가 내 재산의 일부입니다. 재료를 아껴선 안됩니다.

 

전각 칼
그동안 전각에 사용했던 칼이 400여 자루에 이른다.
전각 작품
인장을 새기는 돌을 모아놓은 진열장.

인천 서단을 이끌어오다

김경수: 서예를 이야기하면 사실 인천이 낳은 인물이 많으시잖아요. 국내 서단을 대표하는 분들도 많구요.

전도진: 1950년대 60년대는 국전 초대작가가 15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 만큼 자격이 까다로왔다는 이야기죠. 그 초대작가에 검여 유희강, 동정 박세림, 우초 장인식, 송석 정재흥, 무여 신경희까지 오르시면서 당대 인천출신의 파워가 실로 막강했죠.

김경수: 1980년대 이후엔 청람이 인천 서단을 이끌어오셨습니다. 1987년 출범한 인천서예가협회의 초대회장을 맡으셨죠?

전도진: 1980년대 들어서는 선배가 거의 안계셨어요. 저는 그 때도 젊은 나이였는데 말입니다. 1987년 인천서예가협회를 만들면서 초대회장을 맡게 됐습니다. 당시 부회장에 강난주, 이규환, 사무국장에 최원복이 함께 했지요.

이제는 한국미술협회, 한국전각협회, 미추홀미술협회까지 3곳만 회원을 하고 있습니다. 고문으로 이름을 올려놓은 곳은 많긴 하지만, 그저 공부만 하는 마음입니다. 감투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서예·전각 명인으로 선정

김경수: 수상내역을 들추다보니 2001년에는 인천시 문화상(미술부문)을 수상하셨더라구요.

전도진: 인생을 쭈욱 살다보니 예술가로서 결국 남는 건 작품이더라구요. 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예전엔 상을 많이 타긴 했죠.

물론 1978년 경기도전 초대작가상을 비롯해 2001년 인천시문화상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데 감사하죠. 시문화상은 제 나이 40대에도 한차례 추천을 받은 적이 있긴 합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그동안 해온 전각 작품에 대한 인보(인영)를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김경수: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작품 도록을 만들어 놓으시잖아요. 전각 작품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실 것 같은데요.

전도진: 전각 작품을 연도별로 모두 모아놓기는 했습니다만, 책으로 묶지는 못했죠. 제 작품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려면 책으로 만들어야 하는 데 아직 못한 상태라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입니다. 나의 흔적이므로 꼭 해야지요. 일생일대 큰 일입니다.

김경수: 2001년엔 중앙에서 발행하는 전문잡지 ‘월간서예’에 ‘21세기 대한민국 중진서예가 10인’에도 오르셨던데요.

전도진: 2001년 8월호였던 것 같네요. 월간서예에서 240호 발행기념으로 기획특집을 꾸몄는데 중진서예가 10인중 한사람으로 저를 선정했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물론 영광이지요. 당시 그 책자를 기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김경수: 상을 받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이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2021년엔 대한민국전통예술전승원으로부터 서예·전각 명인으로 선정되셨습니다. 분명 인천서단의 경사입니다.

전도진: 대한민국전통예술전승원의 제 2회 명인선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세울 것도 없는 데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작품을 내라고 해서 전시를 하게 된 것이 다입니다. 여섯분인가 함께 올랐는데, 서예에서는 대가 권창륜 선생님을 선정했더군요.

 

석봉과 청람 정도진을 다룬 옛 서적

개인전 인천 3회· 서울 2회·하와이 3회

김경수: 개인전 애기로 넘어갈게요. 생각보다 많이 안하셨네요.

전도진: 그동안 개인전을 펼친 이력을 보면 인천에서 세 번, 서울에서 두 번, 하와이에서 세 번을 했습니다. 여기에 인천에서 4인전 한번, 서울에서 5인전 한번이 있습니다.

김경수: 첫 개인전도 2001년에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전도진: 맞습니다, 그해 인천문화예술회관(당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과 서울 공평아트센터에서 각각 100여점씩 걸고 대규모 전시를 치른 것이 첫 개인전이었어요.

주로 초대전 요청이 많았죠. 비중있는 초대전에 출품하는 경우가 한해 10여회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김경수: 그렇다면 하와이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이 하신 셈이네요. 지난번 제가 인터뷰를 드린 것도 2007년 하와이 전시를 앞두고 였잖아요.

전도진: 그렇죠. 하와이 전시도 뜻밖의 기회가 생겨서 연달아서 하게 됐습니다. 2007년에는 3월에 연 뒤 10월에 다시 했으니까요.

3월 전시는 당시 취재하신대로 해외에서 여는 첫 번째 개인전이었어요. 그 이전 인천미협과 한인미술협회 주축의 ‘인천-하와이 국제교류전’에 작품을 낸 것이 계기가 돼서 초대전을 요청해와 치른 전시였지요. 호놀룰루의 ‘아카데미 아트센터’에서 작품을 걸었죠.

김경수: 같은 해 연달아 그것도 개인전을 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실 것 같으신데요.

전도진: 그렇습니다. 계기가 있었죠. 하와이에서 3월에 전시를 할 때 ‘무량사’라는 절에서 머물렀거든요. 그곳 주지스님이 제가 서예전시를 하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도 수십년 전 한국에 있을 때 젊은 서예가에게 글씨를 배웠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였어요. 해서 시대를 거슬러 이야기를 맞춰보니 그 젊은이가 바로 저 였습니다.

인터뷰 초반에 한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1968년부터 국전에 출품하기 위해 여름이면 동정 스승을 모시고 절에 가서 한달씩 생활을 했습니다. 국전이 8월에 작품 마감하기 때문에 출품을 위해 집중적으로 연습이 필요했던 거지요.

당시 문경에 있는 대승사에 스승과 머물렀는데, 그 때 스님에게 글씨를 가르쳐드린 적이 있었거든요. 바로 그 절에서 만난 스님이었습니다.

김경수: 인연이란 참 대단하네요. 한편의 소설같은 이야기입니다.

전도진: 38년만에 다시 만난 인연이지요. 너무나 반가워하시면서 주지스님이 전시를 제안한 거예요. 10월에 다시 한번 개인전을 해줬으면 한다면서요.

이를 계기로 그해 가을 다시 하와이로 작품을 들고 날아갔습니다. 그 사실을 들은 하와이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했고 1시간짜리 방송을 타기도 했습니다. 이후 하와이 교민을 많이 알게 되는 좋은 인연이 만들어졌습니다.

김경수: 그리고는 또 한번 하와이 전시를 더 하셨네요.

전도진: 그 곳 작가들은 한 장르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화 판화 등을 넘나들며 공부를 하는 것이 우리와는 달라요. 60대 중반 작가들이 내 작품을 배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권위주의란 전혀 없어요. 본받을 만한 일이이죠. 전시를 하면서 워크숍도 했어요. 서예와 전각으로 각각 나눠 강습과 실습 프로그램도 진행했죠. 게다가 제 작품을 구입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성과가 있었습니다.

 

전각 작업을 선보이는 전도진 작가
전각 작업을 선보이는 전도진 명인

 

“인천시립미술관 건립 반드시 이루길”

김경수: 인천시가 오는 2027년 개관을 목표로 인천시립미술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지역 문화정책에 한 말씀 부탁드려요.

전도진: 인천에서 미술전시를 하기 위해선 60년대엔 공보관을 시작으로 이후에는 수봉문화회관에서 주로 작품을 걸었죠. 20여년 전부터 인천시장이 나서서 인천시립미술관을 만든다고 하더니 아직도 건립되지 않은 현실입니다. 20여년을 미술인으로 속아 살아온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2027년이든 2028년이든 인천시립미술관 개관을 기념하는 전시 도록을 실제 보기 전까지는 믿기 어렵네요.

300만 인구를 가진 도시에 미술대학이나 음악대학 하나 없는 인천입니다, 예술가들 특히 미술인들이 제일 살기 힘든 곳이 인천입니다.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모두 떠나고 맙니다. 저도 인천에서 적극적으로 후학에 나서고 싶었지만 목원대에서 겸임교수로 16년, 그리고 한성대, 성신여대에서 시간 강사를 요청해온 데 반해 인천에서는 없었습니다. 그 세월동안 인천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살아왔고 아이들도 낳고 키운 이 도시이지만 마음속에 1%정도는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참에 검여와 동정 성생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인천에서 나셔서 이곳을 근거로 평생을 활동하셨음에도 그 분들이 남긴 예술적 업적을 지역에서 외면하는 바람에 결국 동정의 작품은 대전대학교에, 검여의 작품은 성균관대로 간 것이 현실입니다. 대가가 남기신 예술적 가치를 모르는 도시라는 데 한없이 자괴감을 느낍니다.

 

스승의 참뜻 ‘청람’ 받들며 산 세월

김경수: 인천에서 전시 계획은 있으시죠? 앞으로 계획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도진: 아까 얘기한대로 그동안 만든 제 전각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인보를 책으로 엮으려고 합니다. 더불어 모아둔 칼들도 전시해놓고 서예 작품도 보여주는 전시는 인천에서 해야지요.

장소가 넓은 곳에서 한 보름이나, 길면 한달 정도 진행하려고 합니다. 타이틀은 ‘60년 기념전’ 정도로 붙이면 되지 않을까요?

김경수: 60년 기념전 하시려면 앞으로도 3년을 지나야 하는데, 그보다는 빨리 하셔야죠. 저는 벌써부터 기대가 큰 걸요.

전도진: 기대를 해주시니 힘이 납니다.

김경수: 인터뷰 마무리로 “나에게 있어서 서예란? 서각이란?” 그 의미를 정의해 주신다면요.

전도진: 내 삶의 흔적은 인천에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천시립미술관에 내 작품을 전시할 공간 하나 만들어달라고 내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럼에도 전각은 제가 1세대 맞습니다. 석봉의 1호 제자라는 것을 늘 다지며 살아왔습니다. 제 작품이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옛 분들의 훌륭한 예술을 이어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서예는요, 동정 스승이 만들어주신 ‘청람’을 가슴에 새기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스승을 뛰어넘겠다는 생각으로 죽도록 열심히 해도 이룰까 말까 하는 그 경지잖아요. 그럼에도 해야 한다는 것이 평생 숙제이자, 그것이 곧 스승의 참뜻을 받드는 길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어느덧 60년이 다 되갑니다.

김경수: 긴 시간 자세한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전도진: 두서없이 잡담을 늘어놓은 것 같은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
작품

▲청람(靑藍) 전도진(田道鎭)은…

- 1948년 평북 철산 출생

- 한국미술협회 회원(1968년~현재)

- 한국전각협회 창립회원. 고문(1974년~현재)

- 국전 특선 3회, 입선 7회

7회 전국 신인예술상 장려상(1968)

미술전람회 초대작가상(1978)

-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겸임교수 역임

- 박정희대통령 인(印)제작(1975)

- 대한민국 국새제작 자문위원 역임

-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1991~현재)

- 일본 큐슈시 서도전 심사위원 역임(1995)

- 인천시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1995)

- 인천 2회. 서울 2회. 하와이 3회 개인전

- 인천시문화상 수상(2001)

- 대한민국전통예술전승원 서예·전각 명인 선정(2021)

- 현재 청람서예전각연구실 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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