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비봉면, 비운의 남이 장군 묘소를 찾다
상태바
화성시 비봉면, 비운의 남이 장군 묘소를 찾다
  • 김정형 객원기자
  • 승인 2023.03.14 0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 경남 창녕군 부곡면에 남이 장군 기념관(사당)도 건립
남이 장군 묘 -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번지
남이 장군 묘 -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번지

남이 장군 묘소는 남이섬에 있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남이섬 무덤은 가묘다

지난 12일 봄이 오는 길목에서, 역사의 파란을 겪은 비운의 장수 남이 장군의 무덤을 찾아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으로 향했다

 

남이장군 묘역 주차장
남이장군 묘역 주차장

 

남이 장군 묘소에 가는 길이 예쁘게 다듬어져 있다.
남이 장군 묘소에 가는 길이 예쁘게 다듬어져 있다.
무덤 옆에 제단
무덤 옆에 제단

무덤 옆에는 따로 마련된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본 무덤을 찾기 전에 무덤 지역의 땅을 관장하는 토신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고 한다.

남이 장군은 1468년 돌아가실 때에는 역적으로 몰려 참형에 처해졌지만 사망 후 350년 만인 1818년 순조 18년에 영의정 남공철(남이장군 후손)의 상소로 충무공 시호가 내려졌다.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남이 장군 사당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 남이 장군 사당

20184월에는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에 기념관(충무사)와 함께 남이 장군의 사당도 건립되었다사당이 건립된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는 남이 장군의 후예인 의령 남씨 의산공파 집성촌이며 남이 장군의 조부인 태종의 부마 남휘와 4녀인 정선 공주의 묘역이 있는 곳이다.

잘 정돈 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난해에 다시 정비된 남이 장군의 묘역에 이른다.
잘 정돈 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난해에 다시 정비된 남이 장군의 묘역에 이른다.

남이섬에 있는 가묘에 비하면 별로 크지 않은 묘역이다. 돌아가실 때 참형에 처해졌고 350년동안 역적으로 몰려 있었으니 시신을 수습하여 모시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묘지의 형태를 갖추어 오늘날의 모습이 있는 것 만도 사실은 다행이다. 지난해에도 묘지 주변에 둘레석을 설치하고 문화재로 관리한 모습이 보인다.

남이섬 지명의 유래는 남이섬 북쪽 언덕의 돌무더기에 남이 장군이 묻혀있다는 오랜 민간전승에 기인한 것이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경우, 그 후손들이 묘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에 가묘를 만들어 본래의 묘를 지켜내려 했다고 한다. 

가평군 남이섬에 있는 남이 장군의 가묘
가평군 남이섬에 있는 남이 장군의 가묘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등록된 설명]

묘역은 부인과 함께 매장된 쌍분(雙墳 ; 두개의 봉분)의 형태로 후대에 다시 정비한 것이다. 묘제(墓制)는 원형이 다소 변형되었으며, 석물은 옛 것과 새 것이 섞여있다. 봉분 옆에 있는 묘표(墓表 ; 무덤 주인공의 이름 등을 새긴 비석)1971년에 새로 건립한 것이며 봉분 아래의 둘레석·혼유석(魂遊石 : 봉분과 상석 사이 설치하는 죽은 혼이 머무는 직사각형 석물상석·향로석·망주석은 현대에 추가로 조성한 것이다. 묘역 하단에는 문인석 1쌍을 조성하였는데,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 ;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문신의 형태)이며, 두 손은 소매로 가려 홀을 쥐고 있다. 깊은 선각의 눈 표현과 굴곡진 수염은 묘역을 수호하는 강인한 인상을 주며, 각진 어깨와 평면적인 옷주름 표현은 15세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정의]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 무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태종의 외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할머니는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다. 아버지는 군수 남빈(南份)이며, 어머니는 현감 홍여공(洪汝恭)의 딸이다. 처는 권람(權擥)의 딸이다. [활동 사항] 남이(南怡)[1441~1468]1441(세종 23) 태어났다. 20세인 1460(세조 6)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66(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도 선발되었다. 1467년 중추부 동지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남이장군에 대해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수록된 기록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남이 (南怡 , 1441~1468)본관이 의령(宜寧) 이며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손자였다조선 개국공신인 남재(남재)5대손으로 의산군 남휘의 손자이다1457(세조 3)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했다.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여진을 토벌하여 이등군공에 올랐다. 26세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그러나 1468년 예종이 즉위(1468)하면서 어떤 사람이 남이가 공주와 간음하였다고 소문을 날조하여 곤욕을 치렀는데 그해 숙직을 서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설 징조하고 했고 이를 엿들은 유자광은 영의정 강순 등과 역모를 하였다고 모함하여 하옥되었다. 14681027일 남이는 군기감 앞 저잣거리에서 강순 등과 함께 효수당했다.

 

<남이 장군의 시>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 못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 1467년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척살한 뒤 남이 장군이 남긴 시다남이 장군을 모함한 유자광은 위의 시에서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 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를 트집 잡아 역모라고 모함했다후에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함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좌천을 당하고, 남이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남이의 옥()' 사건이라는 유자광(조선시대 3대 간신)의 무고로 26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하지만 350년이 지난 후 순조 18(1818)누명을 벗고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다. 현재 묘역은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소에 있는 문인석 1쌍과 신신석은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비석과 석물들은 최근에 새로 갖춘 것이다.

남이장군 사당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사당제가 열리고 있다.
남이 장군 사당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사당제가 열리고 있다.
서울시 대학로에도 남이 장군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서울시 대학로에도 남이 장군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실 남이 장군의 묘로 전하는 돌무더기가 전해져 오던 것을 지금처럼 묘로 정비했다고 한다.

남이섬은 남이 장군묘가 있어서 섬 이름을 남이섬으로 되었으며 원래는 섬이 아니었는데 일제 식민지 시대에 남이섬 인근에 청평댐을 건설하여 이 일대의 수위가 상승하여 지금의 섬이 되었다. 남이섬은 한국은행장을 지낸 민병도씨가 개발한 땅이다. 민병도씨는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조부인 민영휘가 민병도씨의 명의로 고액의 국방헌금과 비행기대금을 일본에 헌납하여 태평양 전쟁에 협조한 행적도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