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공주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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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공주 공산성
  • 전갑남 객원기자
  • 승인 2023.03.1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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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공산성, 파란만장한 역사문화의 현장

공주 여행 이튿날. 인심 좋은 숙소 주인장의 배려로 편안한 밤을 보냈다. 시계를 보니 벌써 7. 아직 어둑어둑하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목적지는 공산성. 조금 걸어서 도로 회전교차로에 도착했다. 무령왕 황금빛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무령왕이 살아서 백제의 고도 공주를 더욱 빛나게 하는 듯싶다.

공산성은 백제 유적지 8곳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적 12호로 지정된 공산성은 백제 웅진시대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고대 성벽이다.

공산성 가까이 서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상.
공산성 가까이 서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상.
공산성 서쪽 문에 해당하는 금서루.

성벽 전체 길이가 2,660m. 서쪽 문에 해당하는 금서루에 올라 성벽을 따라 걸으면 산책하기에 딱 좋은 코스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까지 세력을 넓히자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을 내주고, 문주왕 때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수도 천도에서 강과 산으로 막힌 천혜의 요새가 필요하였는데, 바로 공산성이 최적지이었다.

공산성은 해발 110m의 나지막한 주변 능선과 금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자연이 만든 포곡식 산성인 공산성은 시대와 역사를 달리하며 파란만장한 역사문화 현장으로 최고의 성곽으로 꼽히고 있다. 백제시대에는 왕성의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방어력을 극대화한 방어용 산성이자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로 톡톡한 역할을 했다.

공산성 토성 구간.

공산성은 토성이었다. 성을 구축할 당시, 토성은 판축기법으로 흙을 다져 층층이 쌓아 올리는 견고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조선조 인조, 선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되어 튼튼한 성곽 형태를 갖추고 있다. 산성 총 길이 중 일부 구간은 토성으로 남아 있다.

공산성 남문에 해당하는 진남루.
공산성에 있는 얼음창고.

4개 방향으로 문이 있는데 남문 진남루, 북문 공북루가 남아 있었고, 1993년에 서문 금서루와 동문 영동루는 복원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제시대 임류각지, 연지, 통일시대 건물 터, 조선시대의 감영과 쌍수정, 영은사, 만하루, 명국삼장비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역사의 보고이다. 이와 같은 문화유산의 존재는 공산성이 역사상 지역의 거점으로 역동적인 기능을 담당하였음을 보여준다.

공산성에 나부끼는 깃발들. 송산리고분군 6호기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조금 가파른 금서루에 올라 '금강바람코스'를 택해 성곽을 따라 걸었다. 공산성 성벽에 드라마에서 봤던 깃발이 나부낀다. 송산리 고분군 6호기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옛 백제의 기상이 느껴진다. 조금 헐떡이며 오르니 성곽 고지에 도착했다. ‘! 가슴이 확 트인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비단 물결 같은 금강의 푸른 물결과 솟아오른 아침 해가 그림 같다.

공산성의 아름다운 누각.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산성에서 보는 금강과 일출. 한폭의 그림이 펼쳐졌다.

공주 시가지와 저 멀리 차령산맥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공주의 관문 금강철교도 코앞이다. 그 옛날 한양으로 배가 오가고, 금강 물줄기를 따라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고 한다.

북쪽 성곽을 걷다가 공북루가 나온다. 공북루 남쪽 골짜기에 백제시대 왕궁 관련 유적지도 보인다. 475년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538년 사비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64년의 백제 도읍지로서의 왕궁을 상상해본다.

공북루는 금강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통로의 주 출입문이었다. 공북루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선비들은 공북루에 올라 '비단강'이라는 금강의 절경을 시로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공산송 연지와 만하루.

공북루에서 내려가니 우물 터인가 했는데, 연지와 만하루가 있다. 연지 깊이가 9m로 공산성 내에 있는 연못 중 하나로 계단 형태로 석축을 정연하게 쌓았다. 연못과 금강 사이에 만하루라는 정자를 세웠다.

몇년 전 공산성 저수시설에서 놀랄만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가죽에 수십 번 옻칠을 덧칠해 철처럼 단단하게 만든 1400여년 전의 갑옷이 발견된 것이다. 갑옷 조각에 육안으로도 선명한 정관십구년(660)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말을 보호하는 갑옷과 불에 탄 흔적이 있는 활과 화살촉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걸로 보아 백제가 나당연합군과 공산성에서 일대 전투가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의자왕이 공주로 피난 와서 무기력하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뒤집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공산성에 숨겨진 역사의 비밀이 궁금하다.

공산성에는 사찰 하나가 있다. 영은사이다. 성곽 안에 절이 있다는 게 이색적이다. 영은사는 백제시대 창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는 승병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시 진남루로 향한다. 산성 아래 펼쳐진 나무와 수려한 자연이 공산성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 같다. 성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 겨드랑이에 땀이 흥건하다. 이어지는 성의 동쪽, 지금부턴 735m의 토성 구간이다. 구릉처럼 산성이 편안하다.

공산성은 웅진시대의 문주왕이 이곳으로 피신한 것 말고, 조선조 1624년 이괄의 난 때는 인조가 피신한 곳으로 알려졌다. 인조가 공산성에 머물렀을 때 사적을 기록한 쌍수정사적비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이곳 공산성에서 인절미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절미는 이괄의 난 때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진상한 떡에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임금이 떡 맛이 하도 좋아 이름을 물으니 임씨가 만든 기막힌 맛의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했는데 나중 인절미로 부르게 되었다. 공주시는 현재 인절미를 관광상품화하기 위해 인절미축제를 벌이고 있다. 공주 인절미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공산성에서 바로본 금강 물줄기.

백제 웅진의 숨결이 깃든 공산성. 1500년을 지탱해온 내공은 당당하고 기품이 있었다. 산성을 돌아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는 번영의 물결이 되어 영원히 흘러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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