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펼쳐진 '3.1운동'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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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펼쳐진 '3.1운동'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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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3.0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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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처럼 번졌던 그 때 현장을 찾아


인천에서도 1919년 3.1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사실을 아는가?
 
이제는 '역사'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3.1운동. 그러나 우리는 그 때 일제의 '핍박'을 잊어선 안 된다. 잊어버리면 되풀이될 수 있으므로.

당시를 떠올리며 '인천 3.1운동' 현장을 찾아가는 일은 그래서 의미 있다.
   
창영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인천의 3.1 운동은 신포동 상가 철시로 이어지면서 월미도에 모인 수천명의 만세소리로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

3.1운동의 현장

자유공원은 파고다 공원보다도 5~6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인천'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날 정도로 자유공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자유공원은 인천 항구가 열리고 나서 영국, 미국, 독일, 일본, 청 등이 인천 해안 지대를 차지한 후 그들의 휴식처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만국공원, 서공원 등으로 부르다 1957년 공원에 맥아더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이라 불렀다.

자유공원에 오르면 남서쪽 능선을 따라 인천항 도크와 멀리 팔미도까지 서해의 장관이 한 눈에 펼쳐진다. 1919년 4월 1일 수천 명의 인천 사람들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월미도에 모여 들어 일본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던 곳이다. 공원 바로 아래 중앙동 쪽으로 옛 일본 영사관 자리엔 중구청이 들어서 있고, 아래 쪽으로 한때 '인천의 명동'이었던 신포동 상가가 화려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1919년 3월 8일 신포동에서는 상가 철시를 주장하는 전단이 뿌려지기 시작해 30일에는 모든 상가들이 철시를 하며 독립 만세 운동에 무언의 동조를 했으나, 그 때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인천의 3.1운동은 인천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학생들과 기독교 신자를 중심으로 한 개항장 일대 만세 운동과, 인천 구읍과 부평 구읍 일대에서 천도교인 주축으로 전개된 만세 운동이 있다. 인천은 3.1운동으로 투옥된 조봉암과 곽상훈 등이 해방 후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창영초등학교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

개항 전후로부터 3.1운동까지 일본인이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인천의 특성상 강렬한 민족 저항 운동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독립의 의지는 어디보다도 컸다. 그 힘은 3.1 운동으로 표출됐다. 개항장에 모여 든 부두 노동자와 정미소 직공, 영세 상인과 천도교인, 기독교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민족 운동의 도화선에 불씨를 던졌다.]

인천은 서울과 인접해 비교적 초기에 독립 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첫 횃불은 3월 6일 인천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교 운동으로 시작됐다. 3월 9일에는 500여 명의 기독교 신자, 청년 학생들이 주동된 만국공원 시위로 이어지면서 4월 1일 거의 모든 상가가 철시를 하며 절정에 이르게 된다.

강화에서 오른 횃불은 소래산으로

3월 8일에 노동자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격문이 나붙으면서 경찰은 그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1919년 인천의 노동자 수는 5~6천에 달해, 일본 경찰은 노동계가 주도해 만세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인천이 일본인들의 주요 거점이었던 관계로 노동계의 움직임이 우려한 만큼 나타나지는 않았다.

3월 13일 천도교인과 농민들을 주축으로 소래산과 계양산 일대에서 만세 운동이 전개됐다. 3월 24일 부평에서의 만세 운동은 면사무소를 부수는 격렬함을 보였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심혁성은 부평 태생으로 천도교 신자였다. 그는 3월 24일이 부평 황어장날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2년여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3월 27일 문학에서 시위가 있었고, 28일에 남동에서 4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4월 1일에는 문학의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화평동 일대에서 시가 행진이 있었다. 이어 월미도에서는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시내 상가들도 대부분 철시하며 동조를 했다. 4월 1일 만세 운동은 인천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의 다양한 세력이 한 곳에 합류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인천에서의 만세 운동은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로 활발히 펼쳐졌다. 당시 인천, 부평에 사는 성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일본의 세력이 어디보다도 컸던 인천에서 줄기차게 일어난 만세운동은 자랑스러운 인천 역사의 한 단면인 것이다.

인천 3.1 운동의 시발


인천공립보통학교(현재 창영 초등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6일 동맹 휴학을 선언하며 시작됐다. 동맹 휴학을 이끈 김명진은 경찰에 알리지 못하도록 전화선을 끊으며 3.1운동을 주도하다가 2년 동안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창영초등학교 교정에는 이를 기념하는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인천 3.1 운동의 특징

일본 사람들이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인천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 모두들 놀라게 했다. 일본 사람들과 가장 많이 부딪혀야 했던 인천 사람들의 쌓였던 반일 감정이 폭발한 순간이기도 하다.

인천부 만세 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해 시작되면서 기독교인, 상인 등으로 확산됐다. 부천군에서는 천도교인의 시작으로 농민들에게로 확산돼 약 3개월 동안 8회에 걸쳐 1만여 명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인천 3.1 운동의 경과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생들이 동맹 휴교를 주도하며 만세 운동이 시작된다.
3월 8일 독립 선언서와 시위 참가를 호소하는 격문이 시내에 뿌려진다.
3월 9일 청년, 학생 약 300 명이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벌인다.
3월 13일 강화도에서 격렬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마자 이에 호응해 소래산, 계양산에서도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계속한다.
3월 24일 부평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가 벌어지고, 면사무소를 습격한다. 일본 헌병은 총, 칼로 위협하며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한다.
3월 28일 문학동, 남동 일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다.
3월 30일 인천부 시내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만세 운동에 뜻을 같이 한다. 화평동, 북성동 일대에서 천도교인들 수백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다.
4월 1일 수천 명 군중이 월미도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나라의 독립을 요구한다.
 

 

  계양구가 황어장터 3·1만세운동을 기념해 개최한 연극의 한 장면.
 
 

황어장터 3.1만세운동

1919년 3월 24일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 소재 황어장터. 장터에 모여든 수백 명의 군중들 속에서 갑자기 한 청년의 만세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날이었던 이 날 한 사람 두 사람 따라 외치던 만세 소리는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퍼져 황어장터는 거대한 함성소리로 뒤흔들리게 됐다.

만세를 선창했던 이는 당시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에 거주하고 있던 심혁성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장터에 파견나와 있던 순사에 의해 곧바로 주재소로 끌려가 후에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심혁성이 체포된 후 만세를 따라 부르던 군중들은 시위대로 변모해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는데, 이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재판에 회부되는 것으로 사건은 정리된다.

 황어장날이었던 3월 24일 하루동안에 일어났던 이날 만세시위는 인천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 중 가장 대규모의 만세시위 운동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양구에서는 이날을 기념해 황어장터가 있던 현 계양구 장기동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건립해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 두고 있다.

황어장은 본디 3일장과 8일장이 서는 정기 우(牛)시장이었다. 황어장에 대해서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나온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부평지역에는 황어장을 포함해 모두 4개의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부평부(富平府) 북쪽인 황어면에는 3, 8일장으로 발아장과 황어장이 있었고, 부의 동쪽과 남쪽 지역에는 기탄장과 신기장이라는 이름의 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대개 장날과 일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최대한의 인원을 참여시키고 일본의 감시를 피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황어장날에 발생한 황어장터 만세시위운동은 심혁성이라는 한 청년의 외침으로 시작됐으나, 심혁성이 체포된 후 강제 해산된 군중들을 재집결하는 과정에서 미약하나마 지도부가 형성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3월 24일 밤 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다시 모으는 일을 주도한 것은 이담이라는 인물로, 그는 순사에게 끌려가는 심혁성을 탈환하려는 과정에서 순사의 칼에 맞아 사망한 이은선이라는 사람의 친족이었다.


이은선은 황어장터 만세운동 과정 중 유일한 희생자로 남았는데, 이담은 이은선의 사망을 확인한 후 사람들을 다시 집결시켜 장기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결국 다음 날인 25일, 인천경찰서에서 파견된 지원부대에 의해 시위 가담자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만 하루만에 만세운동은 막을 내린다.

이틀 후인 3월 27일에 발간된 <매일신보>에서는 이 날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전말을 보도하고 있다.

"인천시내는 물론이요 부근 일대는 관헌의 취체가 엄중하기 때문에 비교적 평온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일전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되어 그 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이 되는 부천군도 불온스런 형세가 있음으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하여 23일 화뢰순사부장의 순사 2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 그런데 24일 부평읍 밖 시장에서는 당일이 장날이 되어 다수의 사람이 모여드는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이보다 먼저 이곳에 들어와 있는 2~3인의 소요자 등은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를 부르고 부평읍내로 들어가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음으로 취체 관원은 군중에게 해산케 하는 한편으로 주모자 몇 명을 검거하였는데,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기개가 높던 다수의 군중은 검거된 범인을 빼앗고자 하여 돌을 경관에게 던지고, 또는 경찰관에게 달려든자도 있어서 위험이 시시 각각에 있었으므로 경관 등은 부득이 발검하여 위협하였으나 오히려 폭행을 계속하였음으로 드디어 피를 흘리게 되어 소요자편에 5~6명의 사상자를 내고, 경관은 간신히 범인을 호송하여 주재소로 돌아왔다는 급보가 인천경찰서에 달하므로 본서에서는 그 날 즉시 편천경부가 순사 10명을 데리고 동지로 급행하였다더라."

이렇게 하여 사건은 끝났으나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은 10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내려졌다. 이 때 판결을 받은 인물은 총 6명으로 심혁성이 징역 8월, 이담이 징역 2년, 최성옥과 김원순이 각각 징역 10월, 임성춘이 징역 1년, 이공우가 벌금 20원의 형을 받았으며, 판결 근거는 보안법 위반이었다.

만세운동의 시초가 된 심혁성은 출소 후 수십년간 약초를 캐며 은둔생활을 하다 만년에 고향인 백석동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강화의 3.1운동

강화 3.1운동 독립만세기념비도 자리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기념비는 강화군민이 1919년 탑골공원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학산되고 있던 3.1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3월 7일 강화읍 장날을 기해 강화군민을 비롯 인근 김포군민들까지 합세한 2만4,0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강화읍 길 곳곳에서 오랜 역사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강화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봉진 선생을 비롯 25명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화 3.1독립만세기념비는 1994년 강화읍 관청리 산20번지 건자산 내에 세웠으나, 1996년 8월 당시 만세운동의 발원지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재건립했다고 한다.


 강화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지난해 열린 천안 아우내장터 3.1만세운동 재현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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