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의 새 지평을 열다, 엔니오 모리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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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의 새 지평을 열다, 엔니오 모리꼬네
  • 윤세민
  • 승인 2023.08.2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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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민의 영화산책] (8) /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2
윤세민 / 경인여대 영상방송학과 교수. 시인, 평론가, 예술감독

 

황야의 무법자 - 클린트 이스트우드
황야의 무법자 크린트 이스트우드. 엔니오 모리꼬네의 촬영 이전 작곡한 <황야의 무법자> 영화음악은 배우의 캐릭터 창조와 연기 및 영상미학의 토대가 되면서, 영화음악의 새지평을 열었다.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게 영화음악이다. 그리고 영화음악을 영화음악답게 만든 최초의 거장이 엔니오 모리꼬네다. 이전 영화산책(7)에 이어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과 음악과 영화를 더욱 살펴보기로 하자.

 

클래식음악과 대중음악을 넘나들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1928년 11월 10일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의 트라스테베레에서 태어났다. 부전자전이었까. 나이트클럽과 댄스클럽 등지에서 활동하던 프로페셔널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 로베르토 모리꼬네 덕분에 엔니오는 어릴 적부터 트럼펫과 음악 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여섯 살에 처음 곡을 쓰기 시작하고, 아홉 살에 이미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개인적으로 트럼펫 레슨을 받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열네 살에는 공식적으로 같은 음악원에 등록해 일종의 예비 과정인 하모니 프로그램과 트럼펫 전공 본과정을 차례로 이수했다. 이 기간 동안 트럼펫 외에 작곡과 지휘도 같이 배웠고, 특히 작곡 지도 교수였던 전위파 성향의 작곡가이자 20세기 현대음악의 위대한 거장인 고프레도 페트라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46년에 트럼펫 연주 전공으로 학위를 따서 음악원을 졸업했다. 하지만 작곡을 제대로 깊이 있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모리꼬네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과에 재입학해 페트라시 교수의 지도하에 공부를 계속 이어 나가, 1954년에 작곡 학위를 획득해서 두 번째로 음악원을 졸업했다.

1956년에 그의 평생의 연인인 마리아 트라비아와 결혼했으며, 그 해 첫 번째 아들인 마르코를 얻었다. 부양해야 할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자, 이상 높은 젊은 예술가였던 그도 더 이상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음악 혹은 절대음악에서 벗어나, 로마에 있던 당시 유명 음반사인 RCA에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 가수들의 편곡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탈리아 국영방송국(RAI)의 관현악단에서 트럼펫 연주자와 작/편곡가로 활동하면서, 당시 유명 팝 가수였던 폴 앵카의 편곡 작업을 하는 등 대중음악 분야의 경험도 많이 쌓았다. 이렇게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틀어 수백 곡의 노래들을 편곡, 작곡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낳기도 했다.

이 당시 그는 스승 페트라시 및 같이 공부한 학구적인 동료 작곡가들의 비난이나 그들과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본명을 쓰지 않고 한동안 이런 저런 가명을 쓰기도 했다. 실제로 클래식에 미련이 남아, 1960년 베네치아의 라페니체 극장에서 자신이 작곡한 협주곡 지휘 등으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활동을 벌이며, 현대음악가로서의 진지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황야의 무법자 포스터
황야의 무법자 포스터

 

<황야의 무법자>, 영상미학 토대로 영화음악 새지평 개척

엔니오가 영화음악을 시작한 것은 루치아노 살체 감독의 영화 <파시스트>와 <미친 욕망>의 음악을 작곡한 1961년부터이다. 이후 1964년에 이탈리아 초등학교 동창으로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화감독 세르조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의 음악을 맡게 되면서, 영화음악가로서 큰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보편적인 헐리우드 상업영화들과는 달리, 저예산으로 만들어지는 이탈리아의 스파게티(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도매금으로 B급 영화로 부르며 푸대접하는 편견이 있었다. 이를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 세르조 레오네의 연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었다.

당시 그들의 영화는 저예산이었기에, 음악 예산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녹음을 할 돈이 없어 소규모 앙상블로 사막의 청각적 풍경을 표현해 내야 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랄까, 보통 엄청나게 비싼 악기를 당연스럽게 내세우는 클래식을 바탕으로 한 영화음악계에서 일반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악기로 여기던 하모니카, 전기 기타, (입으로 부는) 주즈하프, 마리아치 트럼펫, 리코더, 오카리나, 휘파람, 샤우팅, 채찍 등 서부 영화의 시대 배경과 멕시코 사막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소리들을 현악 앙상블, 오페라 가수의 노래, 남성 합창 등과 함께 지금 들어도 기가 막힌 감각으로 편곡해 넣은 것이다. 그 결과는 대히트였다. <황야의 무법자>가 단돈 20만 달러 제작비로 극장수익만으로 70배가 넘는 1,45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동시에 영화음악의 새지평을 열어젖힌 것이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의형제 같은 친구 사이가 된 둘은 <황야의 무법자> 이후 <석양의 건맨>, <석양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석양의 갱>,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까지 이어지며 영화음악이 보석처럼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

한편, 일반적으로 영화음악을 만드는 작업은 영화제작과정에서 각본과 기획, 섭외, 촬영, 이후 더빙과 함께 최종 후반 작업(post production) 단계에서 이루어지는데, 레오네의 영화에서 모리꼬네의 음악은 이와는 정반대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즉, 영상을 보면서 거기에 맞춰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감독과 함께 구상을 하며 이미 음악을 다 완성해 놓은 것이다. 레오네 감독은 촬영장에서 모리꼬네의 음악을 바위 모양 등 위장으로 가려놓은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크게 틀어놓고서, 마치 오페라 무대 연출을 하듯이 거기에 맞춰서 드라마틱한 연출과 촬영 예술을 펼쳤다. 레오네의 연출과 모리꼬네 음악의 기막힌 싱크로율은 배우의 캐릭터 창조와 연기 및 영상미학의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황야의 무법자>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엔니오의 음악으로 배우인 내가 부각되었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 음악 덕분에 주인공 캐릭터를 실감나게 창조해낼 수 있었다.”고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에서 회고하고 있다.

 

예술적 평가와 전 세계 대중의 사랑

결과적으로 엔니오 모리꼬네가 재원이 부족한 가운데 만들어낸 사운드가 오히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중의 기억에 남아 있는 독특한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 사운드 트랙의 주요 소스가 되었고, 창의성 면에서도 크게 빛을 발하며 영화음악의 새지평을 연 것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영상의 도움 없이도 영화 음악이 그 자체의 두 발로 스스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했다. 그의 음악들이 영화와 만나서 거대한 씨네마틱한 시너지 효과를 내지만, 영상 없이 음반이나 콘서트에서 연주되는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예술적 평가와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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