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엔지니어의 예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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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엔지니어의 예술품!
  • 박병일
  • 승인 2011.09.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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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일의 자동차 이야기] '크라이슬러(Chrysler)'

 
2000년형 크라이슬러 pt크루저

미국 자동차 업계의 세 번째 주자 크라이슬러(Chrysler)

크라이슬러에는 프레드 제더를 비롯한 미국에서 손 꼽히는 많은 기술자들이 있어 미국 자동차 업계 기술을 이끌어 왔다. 그들은 세계 최초로 간편하고 안전한 전자 점화 장치를 개발했고, 개폐식 유체 변속기, 현대식 전압 조절 장치, 수압 브레이크 등을 만들어 냈다.

이처럼 우수한 부품들로 만들어진 크라이슬러 엔진은 제너럴 모터스나 포드 못지않게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크라이슬러의 뛰어난 기술자 삼총사

1919년 어느 날, 제너럴 모터스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남자가 있었다. 제너럴 모터스에 소속된 뷰익의 사장 월터 크라이슬러였다.

월터 크라이슬러는 제멋대로인 제너럴 모터스 회장 듀런트에게 불만을 많이 갖고 있었다. 회사를 알차게 키워갈 생각은 않고, 다른 회사들을 마구 사들이며 덩치만 키우고 있으니, 정통 엔지니어 출신인 크라이슬러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결국 크라이슬러는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그러자 평소 그의 능력을 높이 산 경쟁 회사들이 그를 스카우트하려 애를 썼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이제 다른 사람 밑에서 잔소리를 들어가며 일하지는 않을 테다. 자동차 회사를 세우겠어. 듀런트, 두고 보시오!"

월터 크라이슬러에게는 프레드 제더를 비롯한 뛰어난 기술자 삼총사가 있었다. 월터는 그들과 함께라면 자동차 회사를 세워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월터의 소망을 잘 아는 삼총사는 월터를 놀라게 하기로 하고, 버려진 공장에서 매일 비지땀을 흘리며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드디어 1923년 어느 날, 그들은 6기통 고압축 엔진을 완성했다. 그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월터를 공장으로 데리고 왔다.

"월터, 당신에게 줄 선물이 있어요."

그들은 엔진 위 베일을 벗겼다. 새로운 엔진을 본 크라이슬러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 프레드. 바로 이거야!"

그들은 곧 시험 주행에 나섰다. 새 차는 다른 차들을 앞질렀고, 6기통보다 큰 8기통 엔진을 가진 고급차에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비싸지 않으면서도 8기통 고급차 못지않은 뛰어난 성능을 가진 크라이슬러의 새 차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1년 동안 3만2천대가 팔렸으니 대단한 성공이었다. 1924년, 월터 크라이슬러는 자신의 이름을 딴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를 세웠다.

위대한 실패작 '에어플로'

크라이슬러 1호 차가 탄생한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크라이슬러의 기술 고문 칼 브리어는 날아가는 전투기를 보고 "자동차도 저 비행기처럼 매끄럽게 날아갈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 공기 저항이 적은 새로운 모양의 자동차를 만드는 거야."

브리어는 월터 크라이슬러에게 그 생각을 말했다. 물론 크라이슬러는 대찬성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 한 대의 괴상한 자동차가 탄생했다. 바로 에어플로였다. 1927년 무렵만 해도 상자처럼 네모지게 생긴 자동차가 전부여서,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그릴, 매끈한 모습, 부드러운 곡선 모양을 한 에어플로는 나오자마자 시비거리였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한 모양의 차였기 때문에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 발명 이후 제일 괜찮은 승용차이며 숨 막히도록 참신한 스타일'이라고 칭찬하는 소리도 들렸다.

크라이슬러는 에어플로를 좀더 확실히 선전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실험을 생각해 냈다. 높이 33m의 절벽에서 에어플로를 굴려 떨어뜨려도 차가 멀쩡하다는 걸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신문기자들이 우르르 그 낭떠러지로 몰려들었다. 만약 굴러 떨어진 후에도 말짱하다면, 그건 엄청난 선전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나, 둘, 셋! 33m 높이의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치며 떨어진 에어플로는 부서진 곳 하나 없이 시동도 잘 걸렸고, 잘 달렸다. 세계 어느 자동차 회사에서도 일찍이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없었다. 이 대담무쌍한 실험 소식은 매스컴을 타고, 혹은 입에서 입으로 전 미국에 퍼져 나갔고, 여기저기서 주문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라이슬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밀려드는 주문에 맞춰 차를 만들어 낼 시설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제 날짜에 차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게다가 차에 큰 문제가 생겨서 출고 날짜가 늦어진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주문은 뚝 떨어졌고, 차를 산 사람들은 반환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엄청난 손해를 본 에어플로는 나온 지 3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부터 20년 뒤, 에어플로의 유선형이 자동차 세계를 휩쓸 줄은 미처 몰랐다.

에어플로의 실패와 상관 없이 크라이슬러는 여전히 '기술 제일주의'를 바탕으로 자동차 특허 75개를 따내며 계속해서 차를 만들어 냈다. 1928년에는 닷지사를 사들이고 플리머드와 데소토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 여러 갈래 회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플리머드는 시보레, 포드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차가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자 제너럴 모터스가 미국 제일의 자동차 회사로 떠올랐다. 선두를 지키던 포드는 T형만 고집했기 때문에 차츰 밀려났고, 이 틈에 크라이슬러가 포드를 따라잡았다. 1937년이 되자, 제너럴 모터스가 미국 자동차 시장의 42%를, 포드는 21%를, 그리고 크라이슬러는 25%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0~60년대에 이르러 크라이슬러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무리하게 해외로 뻗어나갔고, 기름값을 절약해 주는 소형차 대신 대형차만 고집하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석유값이 크게 오르자 커다란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외국에 있는 자회사들을 처분하고 공장을 줄이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이미 기울어 가는 회사의 운명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크라이슬러는 빅3의 이름뿐인 세 번째를 차지하고 있었다.

크라이슬러를 살린 아이아코카

1978년, 크라이슬러가 1억6천만 달러 빚을 지고 파산하게 되었을 때, 리 아이아코카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별명처럼 아이아코카는 회사를 경영하는 데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아이아코카는 32년 동안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면서 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으로, 포드의 유명한 스포츠 카 머스탱, 소형차 피에스타를 만들어 자동차 업계에서 포드의 자리를 굳게 지켜 주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너무 똑똑해도 미움을 받는다는 옛말처럼 아이아코카는 하루 아침에 사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유는 단 하나, 회장이었던 헨리 포드 2세의 눈에 거슬렸다는 것이었다. 실업자가 된 아이아코카에게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뉴욕대학교 경영 대학원장, 르노 자동차의 경영 고문, 항공사 사장 등.

그러나 아이아코카가 선택한 것은 다 쓰러져 가는 크라이슬러였다.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보란 듯이 일으켜 포드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까닭일까. 포드사에서 연봉 36만 달러를 받던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에서는 단돈 1달러를 요구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크라이슬러를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한 아이아코카에게 돈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아코카는 우선 35명의부사장 중 33명을 갈아치우고 폴크스바겐과 제너럴 모터스에서 뛰어난 기술자들을 스카우트해 왔다. 또 종업원을 줄이고 적자를 내는 공장은 팔았다. 아이아코카와 전 크라이슬러 직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은 헛되지 않아, 3년이 지난 1981년부터 크라이슬러는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 무렵, 아이아코카가 3년 동안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개발한 야심작 K카가 나왔다. 앞바퀴 굴림의 소형차 K카는 나오자마자 크게 성공했다. 1갤런의 기름으로도 거뜬히 25km를 갈 수 있는 K카야말로 미국 사람들이 오래도록 바라던, 미국인 손으로 만든 소형차였기 때문이다.

아이아코카는 K카를 한 대라도 더 많이 팔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5년 5만 마일 정책'을 폈다. '5년 5만 마일 정책'이란 K카를 사 간지 5년이 되기 전이나, 5만 마일을 달릴 동안에는 크라이슬러에서 자동차 수리를 공짜로 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 만약 차를 뽑은 지 30일 안에 고장이 나면 새 차로 바꾸어 주겠다고 고객들에게 약속했다. 아담한 모습에 실용성과 파격적인 에프터 서비스 때문에 K카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렸고, 크라이슬러는 5년이 못 되어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크라이슬러의 닷지 자동차

크라이슬러의 주요 멤버인 닷지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고급 승용차이다.

닷지 자동차 회사를 세우고 닷지를 만들어 낸 사람은 존 닷지와 호 레이스 닷지라는 형제였다. 두 소년은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 대장간에서 날마다 뚝딱거리며 뭔가를 만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형제는 자전거 회사에서 같이 일하며, 빠르고 부드러운 자전거를 개발하여 자전거 기술의 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소문은 헨리 포드에게까지 들어갔고, 포드는 닷지 형제를 찾아가 포드에 사용할 엔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포드 자동차가 유명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헨리 포드에게는 돈이 없었다. 헨리 포드는 회사 주식의 10%를 줄 테니 돈이 생길 때까지 외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외상이라는 말에 모두 말렸지만, 닷지 형제는 포드를 믿고 엔진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다.

결국 외상 엔진을 만들어 주느라 들어간 2만 달러가 16년 뒤에는 2천500만 달러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야 하는 헨리 포드와 닷지 형제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헨리 포드 횡포에 견디다 못한 닷지 형제는 포드 주식을 몽땅 팔고 자신들의 자동차 회사를 세웠다.

처음으로 나온 닷지는 인기가 좋았다. 포드가 검정색 T형 한 가지인데 비해, 닷지는 색깔이 여러 가지였다. 전기 헤드라이트, 기분 좋은 쿠션, 호화롭게 꾸며진 내부로 멋을 한껏 자랑하는 닷지는 세계 최초로 차체를 전부 철판으로 만들어 더욱 인기를 끌었다. 그 전에는 대부분 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차가 쉽게 망가졌던 것이다.

닷지 자동차 회사는 '닷지는 믿을 수 있는 차'라는 신용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하여 1920년에는 미국에서 포드 다음으로 큰 회사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형제는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한 나머지 같은 해에 폐암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후, 닷지 자동차 회사는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가 1927년 크라이슬러 자동차에 1억7천만 달러에 팔리고 말았다. 닷지 형제의 혼이 깃든 닷지는 지금까지도 크라이슬러의 대표적 차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05년형 크라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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