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에서 안산으로, 애절했던 소남의 공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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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에서 안산으로, 애절했던 소남의 공부길
  • 인천in
  • 승인 2023.09.1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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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인문학 12강을 듣다]
(11) ‘소남 윤동규의 공부길’
- 신홍순 소남학회 이사장
인천in이 소남학회, 계양도서관과 함께 5월10일부터 9월20일까지 12차례에 걸쳐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소남 윤동규를 탐구하는 인문학 강좌를 요약 해 연재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성호학파를 인천으로 확산시킨 소남을 통해 인천의 역사와 정신적 문화유산을 함께 탐구하며 인천 역사의 지평을 넓혀 본다. 열한번째 순서는 탐방으로 신홍순 소남학회 이사장이 진행하는 '소남 윤동규의 공부길’이다.

 

心內人能望外來、심내인능망외래 神交有契嘿相催。신교유결묵상최

誠知不乏磨鍼術、성지불핍마침술 何處寧無琢玉才。하처녕무탁옥재

夜燭重懸分照卷、야촉중현분조권 年華易感各停杯。년화역감각정배

卻從勞鷰東西後、각종노연동서후 別意應書滿紙回。별의응서만지회

- 『星湖先生全集』 권1 「送尹幼章」

 

마음 속의 사람이 뜻밖에 와주니

정신이 통해서 은연중 재촉했던 게지.

바늘 가는 기술이 모자라지 않음을 참으로 아노니

어디에 선들 구슬 다듬는 재능이 어찌 없으랴.

밤에 촛불을 둘이나 밝혀 나누어 책을 비추고

세월 변화에 쉬이 감회 일어 저마다 술잔 멈추었지.

백로와 제비 쫓아 동서로 헤어진 뒤에

이별의 심정을 응당 편지 가득 써 보내올 태지.

 

안산에 사는 성호 이익을 찾아온 소남이 인천으로 돌아가려 하자 성호가 배웅하며 지은 시다.

소남이 연락도 없이 찾아오자 성호 이익이 “정신이 통해서 은연중 재촉했던 게지”라고 반가워했다.

쇠절구 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것같이 학업에 전념했던 이백(李白) 같은 제자 소남을 만나 촛불을 밝혀 들고 밤을 지새우며 학문을 토론하고 헤어지며 지은 시다. 성호와 소남이 사제(師弟)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대동여지도, 인천 남촌(도림)에서 안산 가는 길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의 열한 번째 강좌가 16일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열렸다. 11강은 ‘소남 윤동규의 공부길’로 소남이 성호에게 학문을 익히러 가던 길을 따라가 보는 탐방 시간이다. 신홍순 소남학회 이사장이 진행했다.

 

서울 용산에 살던 17세 청년 소남은 성호의 인품과 학문을 맛본 후 안산에서 가까운 인천 도남촌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스승 댁을 오가며 학문을 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서찰로 왕래하였다. 소남가에는 성호가 소남에게 보낸 서찰 221점이 보존돼 있다.

소남은 17세 때 14세 위인 성호를 찾아가 첫 제자가 되었다. 두 학자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었다. 학문적 도반이 되었고, 친구처럼 친하고 소중한 관계로 승화했다.

소남은 안산까지 주로 걸어서 갔을 것이고, 한번 길을 떠나면 며칠씩 머물다 왔다. 쌀도 챙겨갔을 것이다. 소남의 도남촌 앞은 매립 전 바다였으니, 역사 바닷가였던 안산까지 갯골 따라 배편을 이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소남이 살던 도남촌에서 성호의 안산 집까지는 20㎞에 이른다. 쉬지 않고 걸으면 4~5시간이면 닿는다.

소남이 살던 집의 현재 지번은 남동구 도림동 651-1인데, 지금은 아이파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1강 참석자들은 이날 계양도서관에서 출발해 먼저 소남의 집이 있던 도림동 중경산 아래 옛 소남가의 땅(도림동 일대)을 둘러보았다.

 

소남이 살았던 남동구 도림동 651-1 일대. 현재 현대 아이파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육교위에서 살펴보았다.
소남이 살았던 남동구 도림동 651-1 일대. 현재 현대 아이파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육교위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부터 도보와 버스를 이용, 신홍순 이사장의 안내로 소남 공부길을 찾아 나섰다. 소남이 걸어갔던 남동구 만수동 성현(星峴)(별리고개, 비루고개)을 거쳐 시흥시 신현동을 지나 연성 갯골에 하차하여 관곡지, 호조벌까지 걸었다. 호조벌은 바다를 가로막은 제방인데 시흥시 포동 걸뚝에서 하중동 돌장재를 잇는 720m의 인공 둑이다. 개펄이었던 이곳에 1721년(경종 1년) 둑을 완공하여 농경지로 개간하였다. 이 둑은 인천과 안산을 연결하는 교통로 구실을 하였으며, 지금도 국도 39호선이 이 제방 위로 통과하고 있다. 관곡지에서 다시 승차하여 물왕저수지를 지나 안산 성호박물관에 닿았다.

성호박물관은 2002년 건립됐다. 실학의 맥을 이으며 조선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성호 이익의 가문과 사상, 학문과 유물, 그리고 소남의 흔적 등을 해설사와 함께 탐방했다. 이어 박물관 바로 앞 도로 건너편 성호 묘소를 둘러 보았다.

 

302년전에 완공된 호조벌. 인천과 안산을 연결하는 교통로 구실을 하였다. 
성호 이익의 묘

 

신홍순 이사장은 여기서 다시 성호가 소남에게 보낸 애틋한 시 한편을 소개한다.

 

和尹幼章寄來韻 (화윤유장기래운)

- 윤유장(尹幼章-윤동규)이 부쳐 온 시(詩)에 화운(和韻)하다

 

樵牧空山雙鯉傳、초목공산쌍리전 好風吹入江湖天。호풍취입강호천

開緘卻憶十年事、개함각억십년사 奉袂從容與周旋。봉몌종용여주선

自是交驩貴相得、자시교환귀상득 餘外紛紛等浮煙。여외분분등부연

行看吾友抱高尙、행간오우포고상 袖中經卷加功專。수중경권가공전

頻開話柄發人蒙、빈개화병발인몽 苟非心樂疇能然。구비심낙주능연

不敎知見落科臼、불교지견낙과구 咫尺關限分凡仙。지척관한분범선

乘黃在道待奮蹄、승황재도대분제 後駕駑駘吾且鞭。후가노태오차편

間者濶焉思中渚、간자활언사중저 夢魂不道阻山川。몽혼부도조산천

中心願好何可忘、중심원호하가망 日夜滔滔走源泉。일야도도주원천

珍重詩筒各勉力、진중시통각면력 爲君更賦求友篇。위군경부구우편

 

나무꾼만 사는 빈 산에 잉어 한 쌍을 보내오니,

좋은 바람이 강호의 하늘로 불어 들었구나.

봉함을 열자 십년 전 일이 생각 나네,

소매를 잡고 다정하게 얘기하며 다녔지.

사귐이란 서로 뜻이 맞는 게 중요한 법,

그 밖에 자잘한 것이야 덧없는 연기 같네.

내 벗이 고상한 뜻을 품고서,

소매 속에 경서 가지고 독실히 공부함을 보리라.

자주 이야기하여 나의 어리석음 깨우치니,

마음으로 즐겁지 않으면 누가 이럴 수 있으랴.

나의 견해가 일상적인 틀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니,

지척의 관문에서 범인과 선인이 나누어지네.

승황이 길에서 힘차게 달리길 기다리니,

나도 뒤에서 느린 말 타고 채찍질하리라

요즘 만나지 못해 그대 남촌 바닷가 생각나니,

꿈속에서는 산천이 막힌 줄도 알지 못하겠구나.

마음속에 좋아하는 사람을 어찌,

밤낮 도도하게 흘러가는 물과 같으니

진중한 시통(서간)을 보내도록 서로 노력하세나,

그대에게 구우편을 지어 보내 노라

 

이 시는 성호와 소남의 만남이 10년이 될 때 성호가 보낸 편지에 나온다. 잉어 한쌍은 고대 『악부(樂府)』 시를 인용한 것으로 '뜻밖의 편지'를 의미한다. 십년 전 처음 만나서 소매를 잡고 다정하게 얘기하며 다니던 시절을 연상했다. 제자가 별로 없던 시절 14년 젊은 제자가 생기자 친구처럼 친했던 것이다. 소남과 의견을 나누다 보면 일상적인 틀에서 벗어나게 되니, 송나라 학자 소강절(邵康節)의 표현을 빌려 범인(凡人)인 자신을 일깨워주는 소남을 선인(仙人)이라고 높였다.

승황(乘黃)은 전설에 나오는 신마(神馬)다. 천리마 타고 달리는 소남을 성호 자신도 뒤에서 느린 말 타고 채찍질하여 따라가겠다고 다짐한다. 아마 소남이 먼저 썼던 표현을 비슷하게 써서 제자를 격려한 듯하다.

구우편(求友篇)은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꾀꼴꾀꼴 우니, 벗을 찾는 소리로다. 저런 새를 보아도 벗을 찾아 저리 우는데, 하물며 사람이 벗을 찾지 않으랴’고 한 데서 온말로, 벗을 찾는 시를 뜻한다. 여기서는 성호가 화운한 이 시 전체를 가리킨다. '진중한 시통(詩筒)을 보내도록 서로 노력하자'고 하여 답시(答詩)를 재촉했는데, '마음속에 좋아하는 사람을 어찌 잊으랴. 밤낮 도도하게 흘러가는 물과 같으니.'라는 구절은 성호 자신이 소남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면서, 자네도 역시 그러할 테니 빨리 시를 지어 보내라는 압박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어디엔가 남아 있을는지도 모를 소남의 시고(詩稿)를 찾는 것도 우리의 숙제이라고 신 이사장이 덧붙였다.

 

윤동규의 동생 윤동진의 명필. 초서이면서 기품이 있다.
윤동규의 동생 윤동진의 명필. 초서이면서 기품이 있다.

 

悼尹復春 東軫 윤복춘동진을 애도하며

 

世間無事無遺恨、세간무사무유한 未若身亡學未成。미약신망학미성

十數年來多少業、십수년래다소업 一塵吹散果何名。일진취산과하명

 

세상에 여한 없는 일이야 없지만 학문 못 이루고 죽는 게 제일 한스럽네.

십수년 동안 쌓아 오던 학업이 티끌처럼 흩어지니 뭐라 이름하겠나.

 

윤동규의 동생이자 역시 성호의 제자 윤동진(尹東軫, 1704~1735)이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성호가 그의 형 윤동규를 위로하며 애통한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에 실린 시다.

편지는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소식이 오랫동안 끊겼기에 막 인편을 통해 편지를 보내려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심부름꾼을 통해 안부를 물어 왔습니다. 상중(喪中)에 쓴 그대의 편지를 읽어 보고 비록 위안이 되기는 하였으나, 또 원명(源明 막내 동생 윤동기)의 편지를 읽고 나서는 그대의 질병이 끊이지 않아 너무도 걱정됩니다.

거듭된 상을 지키려면 엄연한 상복을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애통해하되 몸이 위태로워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몸이 없으면 후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복춘(復春 동진)의 전철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늙어 가는 나이에는 목숨을 보존하여 효를 마칠 것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붕우 간의 말석에 끼어 있는 입장에서 그립고 근심되는 마음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지난번에 잠깐 조문을 갔다가 잠시 머물 겨를도 없었으니,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만 슬펐던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도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고루하고 배움도 늦었던 나는 사우(師友)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오직 그대 형제들만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복춘을 잃고 난 뒤로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의 묘지명을 지어 아직 드러내지 못한 그의 덕업을 밝히는 것이 참으로 나의 뜻입니다. 지금 행록(行錄)을 보니 안타까움이 더합니다. 그는 평소의 기상이 참으로 훌륭하여 조용하고 화평한 자세를 유지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였습니다.

내가 늘 그의 이런 점을 탄복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야 다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버티는 것만도 다행인데, 근래에 또 도둑을 맞아 옷 보따리와 집기들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집의 생활에서 매번 불편함과 부족함을 느끼고 있으니, 이 또한 우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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