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에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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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에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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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02.2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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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에 손현숙 시인(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이 선정됐다.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가 주최하고 계간 리토피아가 주관하는 김구용시문학상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창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새로운 시에 대한 실험정신이 가득한 시인이 발간한 시집에 대해 시상하고 있다. 시인 개인의 잠재적인 미래성 평가와 한국시단의 주역으로서의 가능성이 심사의 주요 기준이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이 있으며,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가 있다. 또한 연구서로 『발화의 힘』, 『마음 치유와 시』가 있다.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고창수 시인은 선정평에서 ‘손현숙 시인은 광대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꿈틀거리는 말을 끌어내어 연금술사들이 보았다는 그 노루를 보여주는 듯한 시를 지으며, 시간과 죽음에 갇힌 현존재로서의 손 시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현세적 경험을 통절하게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의 깊은 동굴에서 진동하는 사물과 사건의 생생한 이미지들을 들뢰즈가 말하는 리좀적으로 엮어내고 전개하는 놀라운 시적 상상력과 글쓰기 능력을 주목하게 한다.’고 말했다.

제14회 리토피아문학상(수상자 허청미 시인)과 제8회 아라작품상(수상자 김학명 시인) 수상자도 선정되었다.

 

수상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중에서

 

멀어도 걷는 사람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걷는다 가끔은 당신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들 하얗게 손사래 친다 생각난 듯, 이름을 부르면 모르는 얼굴이 뒤돌아다 본다

당신은 어깨를 찢어서 부글거리는 흰 피, 휘파람을 불면 꽃들은 만발한다 가을 개 짖는 소리는 달의 뒷면에서 들려오고 눈을 뜨지 못한 강아지는 꿈 밖으로 나가서야 젖꼭지를 물 수 있는데

담장 밖에 둘러쳐진 오죽의 둘레는 그림자가 없다 대나무 숲으로 돌아가야 이름이 돌아오는데, 당신은 멀어도 걷는 사람 도무지 말을 모르겠는 여기, 눈빛으로 기록된 말들 속에서 없는 당신은 다정하다

 

면회

살아 있어도 죽은 불빛, 반 평짜리 지구 위에서

잇몸 오물거리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지나간 것들을 주워다 호주머니를 채우는

기억의 회로는 누구의 통제도 불허한다

 

한 벌 옷으로 먹고 입고 잠을 자는

여기는 천국인가 지옥인가 성별을 모르겠는

닳아빠진 가죽 부대 안에서 쏙 빠져나온 맨발

맑고 깨끗해서 처음의 첫, 처럼 말랑해서

그러나 저 발은 땅을 딛지 못한다

 

생의 요긴한 동작들은 어디로 흩어 버리고

살기는 언제 살았었는지 걱정도 늙어버려서

저 낡고 구겨진 옷 한 벌이 세상천지다

세 시간 굴러와서 딱, 십 분 면회하고

사진 한 방 찍고 허언증 환자처럼

 

또 올게, 다음이 있을까, 다시 돌아보면서

쓸쓸한 이별 앞에서 통틀니처럼 가지런하게

저 깊은 고랑의 까매진 얼굴에 나는 자꾸 걸려 넘어지면서

돌아서지도 다가서지도 못하는 딸년의 셈법으로

엄마, 사라진 불빛에 애써 심지를 돋우면서

 

반음, 이상하고 아름다운

능소화 꽃둘레가 하늘 귀를 사르는 동안이었을 거다 아주 먼 데서 우레가 가는 길을 우레가 지나가고 머리 위로 뭉게구름 사소하게 다녀간 후, 푸른 잠에서 푸른 잠으로 날아가는 부전나비 한 쌍을 비스듬히 좇고 있었다 반백 년이 흐르고 나는 가난한 책장 한 장을 넘겼을 뿐인데, 낮별떼가 하늘 사닥다리를 타고 반짝거렸다 어느 틈에 아침이 오후 두 시를 사시斜視처럼 데려왔다 바람은 비에 젖어 능소화 꽃둘레 무지개를 타고 올랐다 물에 불은 꽃잎이 담장을 기어오른다 허공에 한 금 한 금 긋는 고양이 비음 사이로 그림자를 등진 사내가 어깨의 햇빛을 털면서 왔다, 갔다 그의 뒷덜미에서 목소리가 부풀었다 졸음처럼, 남서쪽에서 잠비가 올라오는 중이라 했다 오만 년 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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