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50년을 보낸 백송갤러리가 부암동에 ‘Gallery B&S’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면서, 본화랑과 공동으로 조각가 최성철을 초대해서 《광화문에서》를 개최한다. 전시는 2024년 5월 17일에서 6월 15일까지 진행된다.

조각가 최성철은 자신만의 형식과 조형 언어로 장르를 넘나들며 넓은 스펙트럼의 실험적 작품들로 한국 색채 조각의 선구적 위치에서 견고하고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런 작가가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과도 같은 색채를 완전히 빼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식과 내용의 작품으로 우리 앞에 섰다.

‘색채 조각’이 작품의 표면에 색을 칠해서 재료의 핵심을 숨겨서 원재료가 가지고 있는 색과 질감, 질량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관객이 궁금증을 가지고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했다면,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직관적(直觀的)인 전개와 조각 문법으로 다가온 이번 전시는 우리가 기억하는 작가의 작품과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 작업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생각과 실천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조각은 각각의 재료가 가진 물성(物性)이나 기법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작품에 얼마나 담보하고 있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동안 화려한 색채와 뛰어난 조형적 완성도에 가려져 우리가 미쳐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존재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과 가치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한층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시된 25점의 직립 군상들은 하나인 듯 여럿이고, 여럿인 듯 하나로 확고하고 질서 정연한 가치 아래, 군중으로 혹은 작가가 지향하는 의도가 식재(植栽)된 숲처럼 서 있다.

 

 

예술의 본질을 찾아 묵묵히 걷고 있는 작가는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그 답을 구하려 하고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처럼 인간 주체적 존재성, 실존에서부터 그 본질을 찾고 공동체 사회가 가지는 집단의 힘과 발현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에서 전시는 출발한다. 전시장을 채우고 서 있는 인체들은 하나같이 손과 발이 붙어 있고, 눈도 입도 붙어서 남자인 듯, 여자인 듯 명확한 구분을 하기 힘든 불명확한 존재로 공간 속에서 모호함과 동시에 단단한 조형성으로 구축된 인물들이 무리를 이뤄 서 있다. 인체들은 각각의 인상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같은 사람의 형상을 여러 번 반복해, 함께 할 때의 응집된 힘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각각의 개체가 가진 독립적 힘을 함께 보여주며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광화문에서…’는 작가에게 오랜 기간 의미가 있고 실존하는 장소로 그 구체적이고 특수한 공간에서 형성되는 실존하는 자아, 진정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잡기 힘든 속도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상존(常存)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살아갈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과 인간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물음과 답을 구하는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는 과정의 일환(一環)으로 보인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세상의 형상들은 하나의 어두움으로 짙어지고 그리운 마음도 짙어진다. 그 시간이 되면 존재하는 모든 형상은 흑색으로 하나가 되어 비로소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완성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그렇게 하나의 선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오랜 기간 준비하며 작업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간의 활동적이고 극적인 선을 지양하고 절제되고 조용한 선 하나로 형태가 완성되고 하나의 실존하는 인간의 형상이 나타난다. 무수한 고민과 인내 속에서 작품을 바라보며 형식의 노련미와 숙련된 기술에서 오는 과함을 없애고 정제된 하나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다가간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최성철은 평생을 작업에만 매진해 온 작가다. 내가 아는 한 최성철은 작업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눈길을 주지 않았고, 그의 생활에 중심은 언제나 작업이었다. 수도자와 같은 태도로 작업을 하는 작가는 자신에 생의 길 위에서 작업의 가치를 언제나 맨 앞에, 가장 높은 곳에 두고 생활하고 있다. 그는 작업을 대신할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머릿속에 두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스스로 예술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답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본질(여기서 본질은 작품을 넘어선 인간과 실존에 대한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에 대한 접근과 그 과정에서 획득한 것들을 자신만의 가치와 조형성으로 변환시켜 세상에 내놓는 일을 한결같은 태도로 실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힘과 메시지는 지난 전시들에서 보여온 작업과는 달리(작가의 생각과 발언은 지난 시간이나 지금의 시간이 다르지 않다) 우리가 미쳐보지 못하는 지점을 새로운 조형 언어를 사용해서 보다 직관적이고 친절하게, 그렇지만 단호한 발언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람이 불어오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같은 날의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최성철은 그냥 있을 수가 없어 광장으로 나와 우리 앞에 섰다.

사소한 바람도 광장에 모이면 큰바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