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기차가 열어놓은 문짝을 치고 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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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기차가 열어놓은 문짝을 치고 가데요."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3.01.24 2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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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의자 딱 하나, 신흥동 기찻길옆 '만복미용실'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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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문 열어놓고 장사를 하는데 갑자기 지진소리가 나는 거예요. 글쎄, 기차가 열어놓은 문짝을 치고 지나가데요. 그냥 내 돈 들여 고쳤어요. 기차는 자기 길대로 가는데, 못 챙긴 내 불찰이죠. 사진 찍고 증거 대러 돌아다니느니 그 시간에 장사하자고 마음먹은 거죠. 이제 그 화물기차도 두 달 전부터 안 다녀요. 기차 안 다니는 기찻길에 자꾸 물이 고이고 지저분해서 연탄재로 메웠어요.” 하루에 열댓 번씩 다니던 화물열차는 이제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인천시 중구 신흥동(수인역)에서 30년째 ‘만복 미용실’을 꾸려가는 정계숙씨는 단골손님을 맞느라 여전히 바쁘다.
미용실문에서 기찻길까지는 딱 두 걸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뽀글이’ 파마를 하고 있었다. 바로 집 앞에 미용실을 두고 큰길 두 개를 건너온다는 할머니는 단골손님이다. “왜 이리 오는 줄 알아? 예전에 딴데를 갔더니 내 머리 말다가 새로 온 손님한테 가더라구. 말던 건 말아야 하는 거 아냐?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더라구. 여기는 그런 일이 없거든.”
만복미용실에는 손님 머리를 할 수 있는 의자가 딱 하나다. 손님 두 사람을 동시에 받을 수 없다. 정계숙씨는 “혼자 하니까 두 분이 오셔도 어차피 한 분 머리만 하게 되죠. 아무리 많이 오셔도 저 혼자 하는데 의자가 더 있어 뭐하겠어요? 놓을 데도 없구요”라면서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고 말했다.
“요새는 설 전에라 파마하러 오는 사람이 많아요. 기다리기 싫은 사람은 전화로 예약해서 와요. 섬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전 날 전화하고요. 굴업도 무의도 등 섬에서 오는데, 배 시간에 맞춰서 나왔다가 오후에 들어가는 배 시간 맞추죠. 사랑방에서 파마 말고 한숨 자기도 하고 라면도 끓여먹고 고구마도 쪄먹으면서 배 시간을 기다려요. 시간도 빨리 가고 재미나게 얘기도 해요.” 정계숙씨는 미용실에 달린 방을 가리킨다. 사람이 많을 때는 가게가 좁으니까 사랑방에서 순서를 기다린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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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1983년에 가게일 시작한 때를 되짚었다. “집 보러 왔을 때는 예전에 다니던 기찻길인 줄 알았죠. 당연히 기차가 안 지나가는 줄 알았으니까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었어요. 아,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구들장이 우당탕탕거리는데 깜짝 놀랐어요. 기차 다닐 때는 무척 시끄러웠어요. 텔레비전 소리, 전화벨 소리, 말 소리가 다 안 들리거든요”라며 “우리 애는 아주 신통했어요. 애가 생기기 전부터 기차소리를 들어서인지 기차소리가 아무리 커도 깨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애 키울 자신이 없었는데 괜한 기우였던 거죠. 이 동네 어떤 애는 백일 돼 왔는데 너무 놀라서 날마다 푸른똥을 쌌어요. 할 수 없이 이사갔죠. 우리 애는 지금도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잘 자요. 늘 사람들이 많은 데니까 성격도 원만하죠”라며 웃었다.

멀리서도 찾아오는 사람 가운데 용산에서 오는 할머니가 있다. 집이 용산역 근처인 그 할머니는 도원역에 내려서 걸어온다. 파마하면서 하루를 재밌게 지내고 간다. 교통비도 안 들고, 하루를 때울 수 있어서 좋아한다고 했다.
“숯불로 하는 파마는 1970년대 초에 없어졌어요. 난 불 고데는 했죠. 그러다가 드라이하고, 요즘엔 매직파마를 해요. 이런 롯트는 어디 가서든 못 볼 걸요.” 정씨는 작은 롯트를 보여주고는 할머니 머리를 만다. “그거 너무 뽀글해지는 거 아냐? 늙어서 기운 떨어지듯이 머리카락도 힘이 없지?” 롯트를 보고 할머니가 묻자 정씨는 “그래도 다 계산하고 말아요. 무조건 말면 손님들이 싫어하죠”라고 대답했다.

만복미용실은 정말 작다. 13.223평방미터다. “요샌 평이라고 안 한다죠? 우리 가게는 네 평이에요. 최대한 동선을 짧게 하면서 손님한테 필요한 건 다 있어요. 이 크기면 지금은 아마 허가 안 날 걸요. 허가 평수가 있는 것 같던데. 우리 미용실은 바닥 전체에 보일러 깔았어요. 손님이 발 시려우면 안 되잖아요.” 정씨는 또 “우리 가게는 기찻길에서 가장 가까워요. 기차 다닐 때는 사람들이 밖에 나가지 못했죠. 내가 기차가 오나 안 오나 보고, 손님을 내보냈어요. 화물열차는 사람이 타는 열차처럼 딱 맞지 않아요. 도로가 막히면 늦어지는 거죠. 그나저나, 이제는 기차가 안 다닌 지 두 달이 넘었네요.”하며 기찻길을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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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에는 ‘착한가격’ 표시가 돼있다. 커트는 5천 원, 파마는 2만 원이다. “여긴 서민이 많아서 비싸게 받을 수가 없어요. 어른들이 많이 오시니까 좋죠. 사랑방처럼 놀고, 노인들은 대개 심심하게 보내잖아요. 가격이야 싸면 좋죠. 손님들은 싸서 좋고, 손님들이 오니까 나도 좋죠.” 정씨는 착한 가격이 마음에 든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왜 뽀글뽀글 파마를 많이 하냐는 질문에 그는 “할머니들은 파마를 해서 예쁜 것도 있지만 간단해서 하죠. 파마가 오래가는 것도 중요하구요. 우리 가게는 일요일과 수요일 두 번 쉬어요. 머리 할 사람들은 대개 전화하고 오니까 허탕 치고 돌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죠”라고 전했다. 쉬는 날에는 주로 뭘 하냐는 물음에 그는 “일주일에 한 번은 율목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와요. 이번에는 <죽도록 사랑하라> <전철 타고 여행하기> 책을 빌렸어요. 책도 자꾸 읽으니까 읽는 속도가 빨라져 기분이 좋데요. 이번 쉬는 날에는 남편과 전철 타고 ‘허균박물관’을 다녀올까 해요”라고 말했다.

만복미용실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에는 수인역이 있다. 수인선 협궤열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꽤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한낮에도 한적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차로 10분만 달리면 송도국제도시라는 게 참 낯설다. ‘그대로여서 좋다’는 손님들 말이 좋은 만복미용실 주인 아주머니 정씨는 주변이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히 손님들 머리를 책임지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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