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우 작가 - ②작가로 가는 길에서 만난 선생님들
차씨 덕분에 지금의 나는 작가가 되었다.
신명여고 1학년 담임선생님은 자신을 차씨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말이 없던 나는 딱히 차 선생님을 부를 일이 없어 내 기억에는 불러본 적이 없지만, 차씨는 학생 하나하나를 신경 써 주셨다. 나는 자주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그런 모습을 지켜보시다가 미술 선생님(우선희)께 부탁해서 2학년부터 미술부에 들어가게 해주셨다.
그 당시 나는 수학을 좋아해서 수학 선생님이 장래 희망이었다. 숫자와 기호들은 우주의 별들처럼 떠다니며 맞춰지고 사라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줬다. 수학은 나에게 재미있는 놀이였지만, 수학보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기술(미술)을 차씨 덕분에 만나게 되었다.
미술은 나에게 친구를 만들어줬고, 말수 많고 장난기 많은 여고생으로 성장하게 해줬다.
아름다운 기술은 신세계를 열어줬다.
나만의 신세계로 들어가다.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해 그런 건지 혼자 노는 방법을 터득한 건진 잘 모르겠다. 책상에 앉아서 꼼지락꼼지락 혼자 잘 놀았다. 학우들은 나에게 딱히 말을 안 시켰지만 낙서한 그림을 한 장씩 가져가고 싶어 했다. 때론 그려 달라고 주문도 했다. 마음에 드는 학우에게 선뜻 주었지만, 마음에 안 드는 학우에게는 눈길도 안 줬다. 그림은 마음이 담긴 거라 마음마저 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잘했다 싶다.
남들보다는 미술 공부를 늦게 시작한 만큼 매우 HOT 했던 주안역 앞 한샘학원(2021년 중반까지 정문학원 자리)에서 새벽반 공부까지 하며 입시 준비를 1년 더 했다. 열심히 준비해서 1993년 계원조형예술학교(현 계원예술대학교) 조소과에 힘들게 입학했다.
나의 첫 교수님은 이소미 선생님이시다. 작년 2023년 10월에 개항장 이음 1977에서 <3세대 신비전>이라고 사제 간 전시를 하셨다. 제자들에게 늘 “너희는 작가야.” 라고 항상 말씀해주셨는데 아직도 제자들과 함께이시다. 그렇게 난 이소미 선생님 덕분에 20살에 작가가 되었다.
계원은 많은 기술을 가르쳐줬다. 사진, 컴퓨터, 목공, 폴리 작업까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었다. 나는 인천에서 의왕시까지 먼 거리였는데도 단 한 번도 안 빠지고 매일 학교에 가서 작업을 했다. 심지어 이론 수업까지도 재미있어서 미술사를 알기 위해 한국사, 세계사 책까지 읽으며 미술에 미쳐서 살았다.
지금도 국철 인천행 1호선은 서울을 오가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지만, 그 당시 나에게 국철 1호선은 서서 자는 특급호텔이고, 매우 시끄러운 도서관이며, 다양한 모델들이 오고 가는 훌륭한 스케치 장소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오가는 전철과 함께 작가의 길을 찾아갔다.
인천에서 자란 최광호 작가를 만나 사진과 생활하기
계원에서 배운 기술 중에 최고는 사진 기술이다. 사진 찍기부터 현상하고 인화하는 모든 과정을 알려주신 최광호 선생님이 계셨다. 그 모든 과정 중에 마지막 과정인 전시회도 열어 주셨다. 덕분에 나의 첫 전시는 <사진과 생활하기>이다.
선생님 작품 중에 할머니께서 돌아가는 과정을 사진을 담은 작품들이 있다. 수업 시간에 보여주셨는데 큰 충격을 받았고, ‘생과 사’에 대한 작업 시작이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덕분에 가족을 보는 눈이 생겼고, 주변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다.
인천 선인고등학교를 나오신 최광호 선생님은 가끔 학생들과 청량리에서 인천까지 사진을 찍으며 걸어오시기도 했는데 예전에는 우연히 동인천 지하상가에서 만나기도 했었다. 2016년 60살을 기념하여 신포동에 있는 선광미술관에서 <1975, 귀향> 사진 전시회를 하셨는데 이때도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네가 지금까지 보아온 제자 중에 두 번째로 작품이 좋다.”고 하시며 환하게 웃어 보여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지금도 마음이 따뜻하다.
사진은 작품을 만들기 전부터 작품을 완성하여 자료 보관하는 마지막 작업까지 중요한 기술인데, 이런 멋진 기술을 가르쳐주셨던 최광호 선생님은 밀양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사진과 생활하고 계신다.
작가가 되는 길 첫 안내자이셨던 최광호 선생님 늘 편안하세요. 고맙습니다.
부자가 물어다 준 에버랜드 옆 용인대
계원을 다닐 때는 분명 작가였는데 졸업하니 사무직 조교, 미술학원 선생님, 동네사진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늘 배꼽 끝 어디선가 뜨겁고 쓰렸다.
그때 절친이었던 부자(친구 이름)가 데이트하러 용인 에버랜드에 갔다가 용인대 편입원서를 사다 줬다. 따로 입시 준비를 한 게 아니라서 한번 경험해보자 하고 오래된 연필 깎고 더러운 지우개를 목욕시켜 시험을 쳤는데 합격을 해 버렸다. 편입 준비를 안 해도 된다는 큰 장점으로 다시 학생이 되어 인천과 용인을 오가며 학우들과 용인의 수억 마리 치킨을 나눠 먹으며 밤샘 작업했었다.
공부와 작업이 즐거워 열심히 했더니 용인대에서 계속 장학금을 주었다. 담당 교수님이신 故 이희중 선생님께서는 석사 공부를 마치면 강사로 채용해 줄 테니 대학원에 입학하라고 제의하셔서 누군가 가르치며 작업하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꿈으로 공부를 했다.
故 이희중 교수님께서 학생을 많이 아끼셨다. 앞에서는 별 관심 없어 보이시지만 뒤에서는 제자들 생각을 많이 하셨다.
제물포에서 시작한 뉴에이지 뉴이미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님을 시작으로 선생님과 친구 그리고 지인들 등 많은 사람이 도와줘야 한다. 지금의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사람이 있어서이다.
요즘은 청년 작가 지원사업이 많이 있지만, 90년대에 인천시에서 청년 작가들을 위한 지원사업은 특별한 일이었다. 인천에 있는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지역 미대 졸업생 중에 인천에서 사는 젊은 작가들에게 전화하여 사업 설명을 했다. 그중에 하나였던 나도 선인재단과 인천대학교가 있었던 제물포에 오라 전달받고 첫 모임을 제물포역 앞에서 했다.
그때 만나 50살이 된 지금도 서로 의지하고 자유공원에 모여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는 그들은 매년 뉴에이지고 나와 같이 흰머리가 늘어가는 뉴이미지들이다.
다음 편에 더 이야기하려 한다.
그렇게 나는 꿈많은 인천 작가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