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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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 최종규
  • 승인 2011.06.0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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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30] 스콧 슈만, 《사토리얼리스트》

 한국말은 ‘발돋움’입니다. 중국말이나 일본말은 ‘發展’입니다. 한글로 ‘발전’이라 적으면 한글이지, 한국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발전’이라는 낱말은 들온말(외래어)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바깥에서 들어온 낱말인 ‘발전’이지, 한국사람 스스로 일구거나 빚은 낱말인 ‘發展’이 아니에요.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 ‘발돋움’을 잊거나 내팽개치거나 잃을 뿐입니다.

 한국사람이든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사진을 찍습니다. ‘撮影’을 하거나 ‘出寫’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camera’를 손에 쥐지 않습니다. 저마다 사진을 합니다. ‘photo’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면 ‘사진’이 아닌 ‘photo’를 하겠지요.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라면 ‘寫眞’을 할 테고요.

 이 글을 쓰는 나, 이 사람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사람이기에 더 잘 났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며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말이 더 뛰어난 말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담는 한국글인 한글이 가장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말을 즐겁게 쓰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윌북,2010)를 읽습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스콧 슈만 님은 머리말에서 “독자들이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서 좀 다른 각도에서 패션과 스타일을 보게 되길 바란다(7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는 ‘패션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이 아닌 ‘패션사진책’이고, 사진이 아닌 ‘패션사진’을 보여줍니다.

 스콧 슈만 님은 사진이 아닌 패션사진을 하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다운 넋’을 놓치지는 않습니다. “헤어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저쪽에 가 있으라고 하는데,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달려와서 매만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완벽하면 할수록 때로는 완전히 지루한 사진이 되기 때문이다(163쪽).” 같은 말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더없이 마땅합니다. 아주 마땅하기에 굳이 토를 달 까닭이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지없이 마땅한 만큼, 굳이 이렇게 이야기할 까닭마저 없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매무새쯤은 밑바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면, 사진을 찍는 사람만 이러한 매무새를 다스려야 할까 궁금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빈틈이 없는 글을 쓰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빈틈이 없는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빈틈없다는 사진은 말 그대로 빈틈없다는 사진입니다. 빈틈없다는 글은 말 그대로 빈틈없다는 글입니다.

 그저 이러할 뿐입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또 만화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여기에 영화나 연극이나 공연이든 매한가지예요. 빈틈이 없는 작품을 노리면, 틀림없이 빈틈이 없는 작품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빈틈은 없되 아름다움 또한 없기 마련입니다. 빈틈은 없지만 사람내음 또한 없기 일쑤예요.

 ‘사진 아닌 패션사진’을 하는 이들을 바라볼 때에는 늘 이러한 대목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냥 사진을 하면서 저절로 ‘패션사진’이 이루어지도록 나아가면 좋을 텐데, 처음부터 ‘패션사진’이라고 못을 박으니 슬픕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사진을 하면서 시나브로 ‘다큐사진’이 되도록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구태여 ‘다큐사진’이라고 대못을 꽝꽝 박아야 거룩한 다큐멘터리 작품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라 안팎 이름난 상패를 거머쥐어야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작품이 되지 않아요. 《다카페 일기》 같은 사진책이나 《윤미네 집》 같은 사진책은 참 사랑스러운 다큐사진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다카페 일기》이든 《윤미네 집》이든 이 사진책을 일군 사진쟁이는 ‘다큐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마저 아닙니다. 틀림없이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지만, 모리 유지 님이 《다카페 일기》를 일구거나 전몽각 님이 《윤미네 집》을 가꿀 때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껴안고픈 마음’이었구나 싶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껴안고픈 마음을 담은 손길로 함께 지내며 ‘사진도 몇 장 같이’ 찍었을 뿐입니다.

 다시 《사토리얼리스트》를 생각합니다. 스콧 슈만 님은 “이 젊은 여성은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무척 부끄러워하면서 어색해 했다. 긴장을 풀어 주려고 갖은 재주를 피웠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198쪽).”고 말합니다. 사진찍기는 재주놀음이 아니니까요. 사람을 사귀려 하지 않고 ‘멋진 사진’만, 아니 ‘멋진 패션’만 뽑아내려고 하면, ‘사진찍기’이든 ‘패션사진찍기’이든 이루어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스콧 슈만 님은 사진기를 내려놓거나 당신이 사진으로 담고 싶은 사람하고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스콧 슈만 님이 쓴 글을 더 읽으면, 스콧 슈만 님은 ‘더 많이 찍거나 다시 찍어’ 보는 틀에서 벗어나, ‘사진쟁이가 아니라 이웃이나 동무처럼 다가갔을’ 때에 비로소 ‘길거리에서 모델 노릇이 된 여느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나 떨림이나 뻣뻣함을 풀면서 스스럼없이 웃거나 멋진 모습을 잡아 주었다고 밝힙니다.

 사진은 기계놀음도 재주놀음도 아닙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좋아하거나 반기는 숱한 사람들하고 어우러지는 삶이 곧 사진입니다. 아니,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도 나타내거나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 길어올리기도 한다고 이야기해야 옳습니다.

 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사진입니다.

 사람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사람입니다.

 기계가 바뀌거나 나아진다고 하지만, 발돋움하는 일이 아닙니다.

 문화와 문명이 태어나거나 깊어진다고 하지만, 발돋움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사진기를 쥐었건 사진기 앞에 서건, 서로서로 삶을 즐기는 나날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건, 서로서로 부둥켜안거나 어우러지면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꽃입니다.

 “사진에 담고자 하는 것이 그녀라는 내 의도를 이해했을 때 그녀는 ‘노, 미 브루타’라고 말했다. 사진에 찍힐 만큼 예쁘지 않다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445쪽).”를 읽으며 거듭 생각합니다. 스콧 슈만 님은 할머니한테 당신은 참 아름답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했답니다. 그래요, 할머니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할 만합니다.

 할머니는 왜 아름다울까 생각할 노릇입니다. 할머니가 어떻게 아름답기에 애써 사진으로 찍어야 할까를 돌아볼 노릇입니다.

 삶이 아름다울 때에 사랑이 아름답고, 사랑이 아름다우니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람을 사진으로 담고픈 사람이라면, 어느 한 사람한테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을 살포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얼굴’을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사람한테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을 찍는 사진일 테니까요.

 이리하여, 사진이든 사람이든 발돋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발돋움이 아니거든요. 삶 또한 발돋움이 아니에요. 더 나아지는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이 따사로운 사랑입니다. 더 나아지는 삶이 아니라, 늘 넉넉한 삶입니다.

 사진책 아닌 패션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를 손에 쥔 이들이 이 패션사진책을 넘기면서 ‘사람들마다 어떠한 사랑과 삶을 받아들여 즐기거나 누리는가’를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결로 받아들인다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사진·글,박상미 옮김,윌북 펴냄,2010.6.20./1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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