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불평등 해결은 여전한 우리 시대의 과제"
상태바
"경제적 불평등 해결은 여전한 우리 시대의 과제"
  • 채이현 인턴기자
  • 승인 2023.08.04 18:11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천in이 만난 사람]
- 청년이 묻고, 이우재가 답하다
1986년 인천 5·3민주항쟁 현장.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게승사업회장은 5·3항쟁을 주도한 인물 중 한명이다. (사진=인천민주화운동센터)

 

청년(靑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치열한 때로 읽혔던 이 말은 언젠가부터 문제적 단어가 됐다. 학자금 대출, 취업, 경쟁, 월세, 비혼, 저출산 등 많은 사회문제들이 청년을 수식한다. 한 고비를 넘겼다 생각한 순간 벽처럼 일어서는 다른 문제들, 단군 이래 가장 뛰어난 스펙을 자랑한다는 청년들은 뛰고 또 뛰어도 제자리에 선 것만 같다.       

각종 세대론이 난무한다. 젊은 세대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인지, 단순히 부르기 쉽게 하나로 뭉쳐놓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외부’의 시각인 것은 분명하다. 

청년은 동일한 주체가 아니다.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원이 풍부한 이들은 시작부터 다르다. 부와 가난은 대물림 되고, 기울어진 운동장은 바로 서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앞다투어 청년 정책을 내 놓고, 청년 정치인을 마스코트처럼 세운다. 그들은 무엇을 대표하는가, 그들의 정당 활동이 청년들의 결집을 불러오는가? 

묻고 싶어졌다. 이것이 과연 ‘노오력’의 문제인지. 우리 때는 먹고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는데 요즘 청년들은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얘기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겉으로는 민주주의, 겉으로는 공정한 세상, 겉으로는 풍요로운 자본주의를 누리고 있으니 말이다. 늦게 태어난 것이 문제일까? 아직도 무수히 많은 모순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꾹꾹 눌러놓은 말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을 찾았다. 70-80년대를 거리에서 뛰어다닌 청년, 5.3 인천민주항쟁의 주역이라 불리는 사람. 민주화운동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유난히 체구가 작고 마른 모습의 어르신이 기다리고 계셨다. 세월이 지나간 자리에도 어쩐지 단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우재 이사장과 대화를 나눴다. 

 

이우재 이사장
이우재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

 

채이현> 안녕하세요 선생님. 먼저 근황을 여쭤보고 싶어요. 최근 5.3 인천민주항쟁이 법적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인천 시민사회운동의 오랜 과제였다는데 당시 5.3에 참여했던 당사자로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이우재> 글쎄요. 몇 년이 지났는가를 생각해봐요. 37년이에요. 일제 강점기가 35년 정도 되니까... 그만큼 오랜 세월동안이었어요. 87년 6월 항쟁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 있는데, 6월 항쟁으로 가는 길에 있었던, 도화선이라고 말하는데, 인천 5.3운동은 그동안 계속 ‘인천 5.3사태’, ‘극렬, 좌경, 폭력시위’라는 이름으로 불렸어요. 

저는 86년 5월부터 수배 대상이었어요. 수배 중에 낳아 기른 딸이 있죠. 그 때는 수배중인 사람 얼굴이 TV에 뜨고, 숨겨주는 사람까지 처벌하겠다고 그랬어요. 그래도 숨겨주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죠. 친구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숨겨줬지만, 그 때 한참 결혼하고 신혼인 애들이 많았는데, 아내 입장에서는 불만인거죠. TV에 얼굴 나오고 그런 사람이 집 안에 있으니 불안하잖아요. 그래서 저를 두고 부부싸움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작게 하더니 나중에는 큰 소리가 나더라고요. 또 제가 술을 좋아한다고 매일 술상을 봐주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술병나고 배탈나서 고생했어요. 알아서 나가주기를 바랐을테고, 일주일 넘게 있어본 적은 없어요. 

85년에 지금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수배중이고 뭐고 그냥 같이 살자 했어요. 큰 딸이 87년 8월생이에요. 그 때 낳아 기른거죠. 선거에서 우리 편이 이기면 집에 가겠지 했지요. 당시 죄목이 ‘소요죄’였는데 공소시효가 10년이에요. 10년을 도망다닐 생각을 하니 엄두가 안나서 인천에 계시던 김병상 신부님께 자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봐달라고 했어요. 알아보시고 나서 “넌 자수해도 징역 살아야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자수해서 풀어준다고 하면 자수했을텐데, 그것도 아니니 자존심이 있어서 끝까지 자수는 안했고 결국 서울시청 앞에서 잡혔어요. 

6월 항쟁 이후에 다들 풀려 나가고, 제자리로 돌아갔는데 5.3 운동 주모자들은 끝까지 징역을 살아야 한다면서 수배를 안 풀어줬어요. 억울했죠. 그게 이제 인정을 받은 건데 사실 개인으로서 구체적으로 달라진 건 없어요. 다만 그 시절 같이 끝까지 했던 친구들이 생각나죠. 이걸 못보고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특히요. 박계동 같은 경우에는 국회의원도 했죠. 노태우 비자금 밝히고. 그 친구 말고 안희대라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뭐가 잘 안풀렸는지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변사체로 발견됐어요. 그 때 일로 수배 당하고, 괴로운 일들 없었다면 그렇게 죽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죠. 그런 친구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기도 했어요.   

 

채이현> 수배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족들이 함께해주셨을텐데, 법적 지위 관련한 결과가 나오고 나서 다들 어떤 반응이시던가요?

이우재> 고생했다고, 숙제 풀었다, 한 풀었다 하죠. 

(휴대폰을 꺼내 가족 단체 대화창을 보여줬다. 딸의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아빠 할 일 이제 다했네.”)

부인도 운동가 출신이에요. 그 때는 다 그렇게 비슷하게 만났으니까. 그런데 내가 평생 월급봉투를 가져다 준 기억이 없어요. 집사람이 우리 애들 다 키우고, 생활 꾸렸죠. 보상금 받은 거 가져다 준 게 다예요. 그게 제일 미안하죠. 

 

빗속에서 열린 시민걷기대회 행사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는 이우재 이사장

 

채이현> 동양사학과를 전공으로 선택하셨다는 점이 눈에 띄는데 역사학을 좋아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죠?

이우재> 동양사학과를 가게 된 게 그야말로 우연인데요. 처음에는 법대에 입학했어요. 어른들은 법대 가서 사시 패스하는 게 옛날 과거 합격 하는 것처럼 여겼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헌법이 유신헌법 아니겠어요. 법 교과서를 보는데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돼 있는걸 외우는 것이더라고. 한 학기 공부하고 때려쳤어요. 그리고 1년 정도를 방황했고. 

당시 타임지를 정기구독 하고 있었는데 중국사람 셋이 연속으로 표지에 들어갔어요. 장개석, 모택동, 주은래였어요. 웃긴건 사진이 맨 앞에 나오니까 7-8페이지는 기사 내용이 있을 거 아녜요? 기사를 아예 오려버리고 내 보내는 거예요. 기분이 엄청 나쁘고 궁금한 것도 커져가고 그랬죠. 그러다 민두기 교수의 동양사개론을 들었어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이런 것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 얘기들이랑 중국사랑 맞춰보니까 엄청 재밌더라고요. 또 20세기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오잖아요. 그래서 중국사를 한 번 공부해보자 했죠.

양민호. 걔가 동양사학과에 있는 줄 알았으면 거기 안 갔을 거라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자꾸 이상한 걸 하나씩 가져오더라고요. 팜플렛 같은 것. 운동권에서 보는 걸 살살 나한테 주는 거야. 처음에는 빨갱이라고 거들떠도 안보다가 선배들 얘기 듣고, 월남전 얘기 듣고 점점 빠져들었죠. 사실 베트남 내부에서 공산주의를 하든 말든 내부 문제지 미국이 관여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 

유신헌법을 보면서 “이게 법이야?”라고 욱했던 게 있어서 그런지 그 쪽으로 확 쓸려갔어요. 그렇게 운동권 돼서 정작 역사공부는 못했어요. (웃음)

 

채이현> 그렇게 보면 역사랑 법이 좀 비슷한 부분이 있지 않나 싶어요. 사실로서의 역사 말고, 서술된 역사요. 이긴 자의 관점에서 쓰인다는 점이요. 대학생 때 “학생회는 불법이었고 통행금지는 합법이었네”라는 노랫말을 들었어요. 법 그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언제든지 시대적 가치에 따라 변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통쾌하게 짚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이사장님 세대처럼 독재정권 타도, 민주주의 쟁취라는 합의된 대의를 찾기 어려워요. 물론 다양한 쟁점이 존재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바라던 때와는 또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이사장님이 보실 때 지금의 과제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핵심 키워드요. 

이우재> 경제적 불평등 타파죠. 

제가 처음 데모한 게 78년 6월인데, 도망을 가면 구로 공단으로 갔어요. 대부분 섬유공장이고 작은 공장들이었는데, 그 주변에 여성노동자들 3-4명씩 같이 자던 비좁은 방들, 그런 방들로 이루어진 주택들이 많았어요. 한꺼번에 잘 수 있는 방 크기가 아닌데, 밤 근무와 낮 근무로 나눠지니까 교대로 방에 들어오죠. 

그래도 그 땐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우리나라 경제가 성장기였고. 내가 지금은 제일 말단 시다지만 5년 후에는 반장이 되고, 10년 후에 주임이 되면 전세방을 구할 수 있다, 20년이 되면 조그만 집이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젊은이들한테는 그 꿈이 하나도 없잖아요. 직장을 구해도 비정규직이고, 1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월급은 똑같고. 직급이 바뀌는 것도 없고, 잘리기도 쉽고. 안정적인 미래가 없으니 계획을 세울 수가 없는 거죠. IMF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이 도입되면서 비정규직이 일상화 됐잖아요. 가난하다고 꿈이 없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옛날엔 가난했기 때문에 더 나아지고 싶은 열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경제 형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개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삶이 불안정해요. 히키코모리라고 하나요? 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이 작은 휴대폰이 된 것 같아요. 젊은이들이 모여서 세력을 만들고 사회변혁을 해야 되는데 전부 개개인으로 흩어져 있어요. 

 

채이현> 청년들의 그런 모습은 기존에 사회를 바꾸자고 했던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에 대한 실망도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정치인이 되면 다 부패하니까. 그리고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와는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그걸 따라잡지를 못하고 역행하는 모습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운동권’에 대한 거부감이 많고, 어떤 조직에 속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거북해하기도 해요. 

이우재> 기성세대들이 반성을 많이 해야죠. 하지만 우리도 억울한 측면이 있어요. 내 주변에 정치한 사람들 생각보다 별로 없어요. 몇몇 애들이 잘나간 것뿐이지, 운동권이 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이 미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자기들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걸 미루는 건 말이 안돼요. 조직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민주적으로 운영해야지. 모이지 않고 어떻게 해결해요? 세대마다 세대의 과제가 있는 것인데.

예전에는 눈에 띄는 악이 있었잖아요. 누구나 공감했죠. 지금은 딱 하나로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에야 고쳐야 할 일이 많은데... 젊은이들이 가장 피해를 보고 있잖아요. 어떻게든 의견을 교환하고 공통된 지점을 찾아서 통로를 만들어내야죠. 그게 우리와 같은 방식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옛날 방식이고, 지금은 지금에 맞게 자신들의 방식을 찾아내야죠.

채이현 > 인생이 한 사람의 역사라고 하면, 선생님은 그 역사의 원동력이 뭐였어요? 요즘 청년들 중에는 삶의 의지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아서요. 엄혹한 시기를 살아남은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우재> 나 젊을 땐, 박정희 네가 죽거나 아니면 내가 죽는다였죠. 감옥 간 세월은 돈으로도 보상이 안되니까.  제 경우는 별 도움이 안 될 거예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바닥에는 증오가 있었어요. 물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지향이 이면에 있었지만 주로 지배적인 것은 증오라는 감정이었죠. 어설프게 끝났죠. 민주화도 운동권도. 노태우 당선과 운동권의 분열, 보수 정당으로의 흡수 등을 보면서 세상이 다 싫었어요. 정치권에서 한 자리 해먹으려고 두리번거리는 친구들도 싫었고, 그게 아니면 다 살기 힘들어했고. 저들에 대한 증오였는데, 세상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어요. 그 때 즐겨부르던 노래가 ‘립스틱 짙게 바르고’였습니다. 그 노래가 너하고 다시는 안 만난다는 거잖아요. 다시는 운동권 쳐다도 안본다 그랬어요.

매일 화만 냈어요. 그러다가 논어를 읽게 됐죠. 공자는 인정을 받지 못했어요. 벼슬한 기록도 없고. 논어 초장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하지 않는다”라는 글이 나오는데 저는 이게 공자 말년의 글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대한 의지가 있으면 그렇게 덤덤할 수가 없어요. 분노가 생기지.

의지가 사라지니까 남이 알아주든 말든 책이나 읽고 친구랑 술 마시고 살 수 있는 거예요. 모든 욕심과 의지가 사라지니까. 뭘 하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거예요. 나는 그런 과정을 통했어요. 실은 좌절 속에서 자연스럽게 온 거죠.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대한 의지가 있는 건 중요하거든. 나만 잘 살겠다고 사기 치고 그런 거 말고, 남들과 같이 잘 살아보려는 의지요. 그러려면 세상과 담을 쌓으면 안돼요.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출판기념회에서 축하 떡을 자르는 이우재 이사장 

 

채이현>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 코너를 자주 보는데, 요즘은 싫은 사람 무시하고 내 감정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는 책이 많아요. 사람을 끊어내는 방법인데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거죠. 중국 탕핑족들은 이런 말을 한대요. “어차피 패배할 거라면 결승선보다는 출발선에서 하는게 낫다. 그러면 달리기는 안 해도 된다”

이우재> 공자는 몇 십 년을 하다가 기력이 없어서 포기한 거고. 지금 청년은 그 과정에 있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의 극치는 어차피 죽을 거 그냥 지금 죽자 뭐 그거죠. 인간이 사회라는 걸 전제하지 않으면. 다른 동물하고 차별성이 없어요. 인간이 의미를 갖는 것은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땐데 그게 아니면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무슨 다른 의미가 있어요?

나한테만 집중할거다, 왜 그런 얘기들을 하겠어요? 누구나 다 남들한테 간섭받지 않고, 잘 살고 싶은데 그렇게 못 살잖아요. 월급 모아놨더니 집값은 훨씬 더 올라있고, 비정규직 같은 경우에는 경력도 쌓지 못하고 잘리고. 이런 문제를 보장해 달라는 마음이잖아요.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히 있는 거죠. 

백성이 도둑질 하지 않고, 내가 열심히 일하면 내 가족 배고프지 않게 하는 그게 기본적인 인본이에요. 그게 안 되니까 문제인거죠.

 

채이현> 공정성 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청년들 간의 차이를 크게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서요. 

이우재> 공정성은 일리가 있죠. 능력과 업적에 따라 승진해야지. 근데 우선 기본이 갖춰진 상황이어야지. 일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을 받아야 되고. 좋은 일자리를 국가가 보장해야지. 그 이후에 차이가 나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은 밥도 못 먹는데, 누구는 삼시세끼 고기만 먹는다면 다른 문제인거죠.

인간을 평등하게 보지 않으니까 그래요. 모든 인간은 다 다르죠. 그런데 또 다 같은 인간이에요. 인간이라는 바탕이 지켜지는 속에서 다름이 있는 것이지 그게 지켜지지 않은 속에서의 다름은 차별이죠.

 

2011년 인문학 서당 '온고재'에서 강의중인 이우재 이사장

 

채이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청년세대에게 해 주고 싶은 논어의 한 장면을 골라 주신다면?

이우재> 자공이 공자에게 물어요. 평생 모토로 삼을 만한 말이 있냐고. 공자가 답해요. 그것은 서(恕)다. 같을 여에 마음심.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는 뜻이에요. 그게 기가 막힌 말이거든요. 사람은 다 다르죠. 나도 한 시간 전의 내가 아니야.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기고.

개개인이 다 다르지만 아까도 말했듯 어떤 의미에선 다 똑같아요. 그게 공자의 서(恕)예요. 누구나 마음이 같다는 거죠. 어떤 사람은 달리기는 잘하고 수학을 못하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지만 다른 것은 못하고 그런 것처럼 모두 다 재능이 달라요. 자기를 이룬다는 것은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 그 꿈을 이루는 것이고, 다 다른 형태예요. 돈은 그걸 이루기 위한 수단이죠. 지금은 수단과 목적이 거꾸로 된 거예요.

같음과 다름을 조화시켜야 돼요. 같다는 베이스가 전제가 되지 않으면 다름은 차별이에요. 출발선, 가능성 기회, 꿈을 이룰 수 있는 베이스 그걸 갖춰줘야죠. 보편성을 인정한 후에야 특이성이 발휘될 수 있어요.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자기 스스로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죠. 삶 자체가 보장이 안 되면 차별이에요. 다양한 것들이 인간성 위에서 이뤄져야 돼요. 

 

채이현> 청년들만 힘든 건 절대 아니에요. 이 더위에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을 보면 이 나라가 원망스럽고 그래요. 그럴 땐 가끔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왜 살지? 이렇게 힘든데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청년들이 사회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지키려고 하면 무너지게 만드니까, 나 이외의 사람들까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 같이 느껴지는 것 아닐까 싶거든요. 

이우재> 살고 싶다는 삶의 의지를 빼면 아무것도 성립이 안돼요. 벼도 살려고 삐져 나오는거 봐요. 그래서 쌀이 맺히고 우리는 그걸 또 먹고 살죠. ‘생사일여’라고 하는데 그런 말 하면서 제 발로 사(死)로 가는 스님들은 없잖아요. 

요즘은 대포집에 가보면 젊은 친구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요. 우리 땐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했거든요? 술 먹다가 말 잘못하면 끌려가는 거지. 그렇게 불안해도 맘에 맞는 사람들끼리 대포 먹고 우리가 더 용기를 가져야 된다고 하면서 할 일을 고민했어요.

지금 젊은 사람들도 무기력해지고 거대한 사회의 벽을 느낄수록 가까운 친구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얘기를 나눠야 해요. 뱃속에 갖고 있는 말을 가지고 있으면 병이 되거든.

털어놓으면 조금이라도 낫잖아요. 계속 얘기를 안 하고 자기 속에 갇히면 자기 방 밖을 못나가게 되는거고. 힘들수록 가까운 친구라도 만나서 속이라도 풀고 그래야 거기서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고 봐요. 말은 하라고 있는 거예요.

나같은 노땅들하고 소통할 필요 없어요. 자기들끼리 만나야지. 화가나 미치겠다 이런 얘기라도 해요. 울고 싶을 때도 그렇고. 친구들끼리라도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공원을 걷는 것도 괜찮고. 얘기를 하면 좀 다르거든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으니까. 

 

채이현> “연락하는 사람이 되자. 누군가를 찾자” 새겨야겠네요. 거대한 그룹, 조직을 당장 생각하기 어려우면, 내 주변부터 챙겨보자는 생각이 드네요. 온라인 말고, 사람 대 사람의 소통을 놓지 않는 게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얘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3-08-05 00:06:59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승계로, 6백년 넘는 역사를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는 한국 최고(最古,最高)대학. Royal 성균관대. 세계사의 교황반영, 교황윤허 서강대는 국제관습법상 성대다음 Royal대 예우. 두 대학만 일류.명문대임. 해방후 조선성명 복구령으로, 유교국가 조선의 한문성명.본관등록이 의무인,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나라 한국. 5,000만 한국인뒤 주권없는 패전국 불교 Monkey 일본의 성씨없는 점쇠(일본에서는 천황). 그뒤 한국에 주권.학벌없는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점쇠가 세운 마당쇠). 그 뒤 새로생긴 일제강점기 초급대 출신대나 기타의 비신분제 대학들.

윤진한 2023-08-05 00:06:23
공자님은 노나라에서 형조판서격인 대사구를 역임하셨음.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