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천 사람’ 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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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천 사람’ 최원식
  • 이현식
  • 승인 2024.04.0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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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사람들]
(32) 한국근대문학사 연구자 최원식 교수 - 이현식 / 문학평론가

 

최원식 교수
최원식 교수

 

‘한국문학사’ 또는 ‘한국근대문학사’라고 하면 대부분 중, 고교 때 국어시간에 배운 문학작품이나 이광수, 김소월 등의 문인 이름을 떠올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워야 할 골치 아픈 여러 항목들로 ‘한국문학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문학사는 문학이라는 장르가 그렇듯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정수(精髓)를 담아낸 인문학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근대문학사 연구는 근대(近代)라는 시기로 접어드는 무렵부터 우리 공동체가 겪어온 생활이나 투쟁, 이상과 꿈, 때로는 절실한 사랑과 이별 등, 말 그대로 삶의 총체를 기록한 것의 역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한국근대문학사 계보의 재구성

그런데 한국근대문학사는 문학작품의 역사를 다룬 것이므로 그 계보의 구성이 중요하다. 가문에도 족보가 있듯이 문학사에서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계보는 무시할 수 없다(물론 최근에는 이런 계보를 따지는 사고방식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시각도 있다). 중, 고교 시간에 배우는 문학작품이나 작가들의 목록은 그런 계보들의 실체이다. 한국근대문학사는 정치사나 경제사로는 설명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구체적 양상과 그것의 의미를 탐색하여 과거와 현재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기존의 한국근대문학사가 구성한 체계에 의심을 품고 문학사의 새로운 계보 구성과 그 실체적 의미를 평생 탐구해온 학자가 있다. 인천 출신의 최원식 교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최원식 교수는 한국 근대문학사 연구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의 첫 평론집 민족문학의 논리(1982)나 한국근대소설사론(1986)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전 국문학 연구서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관점과 논리, 실증은 동시대는 물론이고 많은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최원식 교수는 한국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높다는 용재학술상의 2024년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자로는 최초로 수상한 한국인 학자가 되었다. 그 공적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최원식 교수는 1980년대에 ‘이인직’을 중심으로 이뤄져 온 근대계몽기 소설 연구를 ‘이해조’ 중심으로 변화시킨, 『한국근대소설사론』(1986)을 집필하여, 일국적이지도 서구 추구적이지도 않은 ‘민족문학론’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한국문학 연구를 동아시아의 문명사 속에 위치 짓고 한국문학의 비교연구를 전개했습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2024년 용재상 시상식, 최교수 오른편이 아내분이다.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2024년 용재상 시상식, 최교수 오른편이 아내분이다.

 

문학에 눈 뜨게 해준 최승렬 선생과 선배들

최원식 교수는 1949년 인천에서 태어나 송림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제물포고등학교를 12회로 졸업했다. 공부 잘하고 명민했던 그가 문학에 눈을 뜬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최승렬 선생을 만나면서였다. 최승렬 선생은 길영희 교장이 전주에서 거의 납치하다시피 모셔온 분이었는데, 그의 가르침으로 인천에서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이 배출된다.

정서웅(독일문학연구자, 제고 6회, 작고, 숙대 교수 역임), 김흥규(문학평론가, 제고 10회, 고려대 명예 교수), 조남현(문학평론가, 제고 10회, 서울대 명예교수), 신상철(제고 10회, 전 한샘출판사 사장), 김윤식(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4대 대표이사) 등이 모두 최승렬 선생의 영향 아래에서 문인 또는 문학연구자로 꿈을 키워 성장한 사람들이다. 최승렬 선생의 수업 장면을 회고한 최원식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첫날 들어오시더니, 앞에서부터 안 가르쳐요. “이 새끼들아.” 이 새끼들아 그래요. “「금잔디」 펴 봐.” 그러더니 “눈 감아, 이 새끼들아.” 그러더니 교단에서 스텝(step)을 밟으시는 거예요. “이게 리듬이다” 이러더니 「금잔디」를 분석을 하는데 ‘그림이 떠올라야 된다.’ 이 시를 읽고 나서 무슨 그림이 떠오르는지 얘기하라고 하셨어요. 전부 산속에 뭐 어쩌구 그러는데, 그게 아닌 거지요. 마을 버드나무에 움이 오른 걸 보고 저 깊은 산속에 있는 가신 님 무덤으로 가는 거라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깜짝 놀랐어요! 야, 이게 시(詩)구나, 야, 이렇게 가르치시는구나. 그 다음에 또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가르치시는데 각 단락마다 뼈다귀 문장 하나씩 추리고, 그들의 연결을 분석하면 저절로 주제가 도출되는데, 그 두 가지가 진짜 깜짝이었지요, 깜짝!(어진내로 모이는 지혜의 바람-인천예술사 문학분야 구술채록, 2020.)

 

최승렬 선생을 통해 문학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최원식 교수가 국문학으로 일찌감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것은 김흥규, 조남현, 김윤식 등 그 시기 고교 문예반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 문학에는 관심이 끌렸지만 창작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던 터에 창작이 아닌 연구와 비평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게 그 선배들이었다.

 

고교 졸업식 때 어머니와 함께

 

문학연구자로서의 개안, 문단의 샛별로 등장하다

그러나 최원식 교수가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하게 된 것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였다. 1968년 서울대 국문과로 진학해 이희승, 전광용 선생 등 국문과의 교수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오생근(불문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등, 후일 한 시대를 기록할 문학평론가들과 친분을 쌓아가던 한편으로 인사동의 헌책방을 들락거리면서 근대시기 우리 지식인들의 저작을 접하고 개안(開眼)의 체험을 한다.

고교 때 막연하게 동경하던 문학이 아니라 비록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의 격변 통에 사라졌지만 여전히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앞 시대 지식인들의 고민을 책으로 접하면서 문학연구자로서 자신의 좌표를 결정하게 된다. 마침 1972년 대학 졸업 무렵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김종철과 함께 가작으로 공동 입선하는데, 여기에 고려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김흥규 선배의 소개로 창작과비평에 글을 싣게 된 것이 문학평론가이자 문학연구자 최원식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

 

1972년 신춘문예 당선 소감
1972년 신춘문예 당선 소감

 

『창작과비평』은 『문학과지성』과 함께 한국 현대문학의 양대 축을 이루는 문예지이면서도 단순한 문예지에 그치지 않고 그 시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성을 선도해 가는 잡지였다. 『사상계』가 1950년대와 60년대를 대표하는 잡지였다면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1988년 복간시 문학과사회로 개명)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잡지였다(여러 굴곡을 거쳤으나 이 두 잡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말은 두 잡지에 글을 싣는다는 것 자체가 한국 지성계의 대표주자임을 의미한다. 최원식 교수는 한국 근대문학이 막 태동하던 시대를 탐구하는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샛별로 주목받게 된다. 그가 「가사(歌辭)의 소설화 경향과 봉건주의의 해체」라는 제목으로 처음 『창작과비평』에 글을 발표한 것이 1977년 겨울호를 통해서였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창작과비평』에 한국 근대문학과 관련한 연구 성격의 글이나 동시대 문학에 대한 평론을 발표한다. 그의 일련의 글들은 ‘민족문학’이라는 관점에서 기존 한국문학사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하는 것으로, 선 굵은 그만의 문장과 탐구력을 보여준다. 기존의 연구와는 전혀 다른 관점과 이를 뒷받침하는 치밀한 논증, 설득력 있는 해석은 한국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그의 ‘민족문학론’이 이후 한국이라는 일국(一國)의 틀 안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와의 연대로 확장되는 것까지 설명하는 건 생략하기로 한다). 이런 그의 야심찬 시도는 학계를 넘어 동시대 지성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구축하는 계기가 된다. 최원식의 이름이 문명을 떨치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훗날 그가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의 모든 콘텐츠를 책임지는 ‘주간(主幹)’의 자리에 오른 것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보적 문학연구단체인 민족문학사연구소(현재의 민족문학사학회)의 2기 공동대표가 된 것도, 한국문학에 가장 영향력이 강하다는 한국작가회의의 이사장에 취임한 것도 이때의 빛나는 성과로부터 출발한다.

 

민족문학의 논리를 발간하던 무렵(1982)의 최원식 교수
『민족문학의 논리』를 발간하던 무렵(1982)의 최원식 교수

 

인천으로의 귀향, 인천의 담론화

그는 이후 1977년에 대구로 내려가 계명대, 영남대에서 교편을 잡다가 1982년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자 문학연구자, 문학평론가로서의 생활은 변함없이 이어가면서도 그는 고향 인천에서 현실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 여러 활동을 펼친다. 1980년대 독재에 항의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 성명이 한창이던 시절, 최원식 교수와 경제학과 김대환 교수 주도로 1986년 4월 인하대에서는 학교 설립 이래 최초로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루어진다. 그는 이외에도 인천 재야지식인들의 모임인 목요회 활동을 비롯해 여러 민주화 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돕는 역할을 한다. 민주화 이후에는 선인학원 시립화 추진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새얼문화재단이 발간하는 『황해문화』의 창간을 주도하는 한편,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 참여, 인천환경운동연합, '인천문화를 열어가는 시민모임'의 대표로서 사회적 발언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다.

 

최원식 교수의 평론집은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최원식 교수의 평론집은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런데 최원식 교수의 인천에서의 활동은 여러 단체나 모임에 이름을 건다거나 이런저런 사회 참여 활동에 몸을 실었다는 데에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문학평론가이자 사회비평가로서의 문제의식을 연장하여 ‘인천’에 대한 도시의 고민, 도시의 비전 같은 것을 담론화했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최원식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 인천 얘기를 해달라고 그래서 그때 내가 ‘인천의 인천화’라는 구호를 만들었어요. 내가 인천에 와서 만든 첫 번째 구호입니다. 인천을 외지인들이 와서 설치는 이런 인천이 아니고 인천에 사는 사람들의 인천으로 바꾸자. 인천을 서울로 가는 쉼터가 아니라 자기의 삶터로 여겨야 좋은 사회로 가꾸는 일을 하지 않겠어요?(『어진내로 모이는 지혜의 바람-인천예술사 문학분야 구수채록, 2000』

 

최원식 교수의 인천론을 담은 황해에 부는 바람 표지
최원식 교수의 인천론을 담은 『황해에 부는 바람』 표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 최원식 교수의 인천 강연을 들어보면 전후 맥락과 이야기가 풍성하다. 폐쇄적 인천주의가 아니라 왜 인천의 인천화가 절실하고 중요한지 그의 이야기에는 인천의 지정학적 특징을 아우르면서 살아있는 인천만의 역사와 해석이 있기에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 역시 대학원 시절 어느 모임에 가서 그의 인천 강의를 들으며 인천을 새롭게 인식하는 체험을 했었다. 당시 그의 ‘인천’ 강연은 인기가 많아 카세트로 녹음되어 손에서 손으로 유통되었다는 뒷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인천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 퇴임식 때 안상수 시장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인천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 퇴임식 때 안상수 시장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그래서 그가 2004년 출범한 인천문화재단의 초대 대표이사로 추천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천문화재단은 지방자치단체장의 일방적 지시에 의해 빠르게 설립된 여타 지방의 문화재단과는 다르게 오랜 기간 인천의 문화계와 시민사회가 여러 토론을 거치고 논쟁을 벌이며 만든 재단이었다. 인천문화재단의 설립 주체는 제도적으로는 인천광역시이지만 그 실질적 동력은 인천의 문화계와 시민사회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최원식 교수가 초대 대표이사를 맡게 된 것 역시 인천시장의 일방적인 낙점이 아니라 지역 문화계와 시민사회의 힘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인천 사람’ 최원식

최원식 교수는 2015년 오랫동안 재직했던 인하대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문단과 학계의 원로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문학연구자이자 평론가로서의 활동을 간단없이 이어가고 있다. 퇴직 이후에도 이미 몇 권의 단독 저서를 내놓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한편, 그는 인천이라는 도시에 대해 그전의 논리에서 한층 진전된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과연 인천이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지 이제는 인천을 대표하는 원로 지식인이 된 그의 혜안에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학교 정년퇴임을 앞두고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중요한 대목만 발췌해 옮겨 본다.

 

인천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토박이들이 아니에요. 떠 들어온 사람들이죠. … 이런 사정 때문에 인천을 이대로 떠돌이들의 난장판처럼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 뭔가 도시의 주체를 세워야겠다는 향토주의가 출현한 겁니다. … 엄격한 토박이주의가 인천의 대안이 될 수 없듯이 무책임한 탈향토주의 또한 인천의 대안일 수 없는 거죠. … 주인과 손님이 기실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 기묘한 호환성은 주인의 내부성과 손님의 외부성/적대성을 슬그머니 해체한바, 이로써 주인과 노예의 순환하는 적대성을 변주한 주객이원론으로부터 기쁘게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먼저 온 손님입니다. 그러니까 늦게 온 손님들을 환대해야 되죠. 자기가 주인이라고 뻐길 게 아닙니다. 그 주인이라는 사람들도 좀 먼저 온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최원식 강연록, 「농부와 뱃사람」, 작가들 50호, 2014년 가을)

 

열린 도시, 혹은 플랫폼 도시 인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시민적 공동체성으로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지와 연결시켜 고민할 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말이다. 최원식 교수는 그런 점에서 온전한 의미로 ‘인천 사람’이다.

 

퇴임 이후 2021년 출간한 문학사 연구론집 표지
퇴임 이후 2021년 출간한 문학사 연구론집 표지

 

그는 한국 고전문학과 근현대 문학을 넘나들고, 문학의 본질을 고민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사회와 역사로 사유의 틀을 확장하고, 민족문학을 말하면서도 한국과 중국,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고민한다. 인천 사람이지만 인천 내부로 귀착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하는 동시에 넘어선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실천하는 인문적 지성의 귀감이다. 더구나 인천에서 나서 제물포고교라는 터전에서 성장해 ‘인천 사람’다운 인문 지성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스스로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먼저 온 손님’의 역할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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