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고통의 역사를 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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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고통의 역사를 잊으면 안된다"
  • 김정형 객원기자
  • 승인 2024.04.0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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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앞둔 휴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다
서대문 형무소 감방안 모습.  옆에 변기가 놓여 있다.
서대문 형무소 감방안 모습. 옆에 변기가 놓여 있다.

 

국회의원 선거 분위기로 세상이 시끄럽다. 이럴 때 일수록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들었다국회의원 선거일을 3일 앞둔 지난 7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았다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며 산 목숨까지 아까워하지 않았던 애국선열의 정신을 상기하며 역사관을 돌아보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은 이 시대에도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하며.

 

보안과 청사. 1923년 건축, 간수들이 업무를 보았던 청사 건물
보안과 청사. 1923년 건축, 간수들이 업무를 보았던 청사 건물

 

일요일 아침 일찍 도착해서인지 입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관람객은 주로 어린이를 동반하여 역사의 산교육을 하는 부모들과 함께하는 가족이 많았다. 우리의 미래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잘키워야 밝아질 것이다. 아이들을 동반하고 역사관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부모들이 존경스러워 보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가 있다.

 

기자는 몇 년 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본 경험이 있다. 과거 19411945년 유대인들을 폴란드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 등에 보내었다. 그 곳에는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덴마크 출신의 유대인이 수용됐고 숫자를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약 100만명 이상이 가스실에서 죽었다고 추정한다.

 

가스실 벽에 남아 있는 살려고 발버둥치면 남긴 손톱자국이 선명하다
가스실 벽에 남아 있는 살려고 발버둥치면 남긴 손톱자국이 선명하다

 

수용소를 돌아보며, 가스실에 들어가 죽어가던 사람들이 벽에 남긴 손톱 자욱을 보고 그날 식사를 걸렀던 기억이 나서 이 날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역사관으로 들어갔다. 살면서 서대문 형무소 앞을 많이 지나다녔지만 역사관 방문은 처음이다. 새삼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개소하여 1912년에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1945년 해방 후 서울형무소)에 이르기까지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식민지 근대 감옥이다.

 

일제강점기시대부터 이후 민주화 인사에 이르기 까지 투옥된 분들의 사진
일제 강점기시대부터 이후 민주화 인사에 이르기 까지 투옥된 분들의 사진

 

해방 이후에도 1987년 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인사들이 수감되어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공간이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구에서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8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옆방의 사람과 두드림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하여 독립운동이 감옥내에서도 이루어졌다.
옆방과 두드림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며 독립운동이 감옥내에서도 이루어졌다.

 

근대식 감옥은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를 통제하기 위해 부채꼴로 배치했다. 중앙의 간수가 한 곳에서 모든 곳을 감시 통제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수감자들의 탈수를 막고 동채를 감시하기 위해 외벽 담장에 높이 10M의 망루를 설치하였고 감방 벽면에는 감시창을 뚫어 수감자들이 일거수 일투족(一擧手 一投足)을 감시하였다. 일본인 간수들은 총 칼을 소지한 채 수감자에게 무차별적 구타를 자행하여 식민지 통치의 폭력적 행태를 드러냈다.

 

죄수들을 운동시키느라고 만들어 놓은 걷는 공간 – 20 걸음도 안되는 공간에서 걷는게 고작인 운동이었다.
죄수들을 운동시키느라고 만들어 놓은 걷는 공간 – 20 걸음도 안되는 공간에서 걷는게 고작인 운동이었다.
안에 들어가서 본 운동장
안에 들어가서 본 운동장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한국을 폭력적으로 지배한 최고 통치기관이었다. 서대문 형무소 역시 조선 총독부 직속으로 편제되어 경성지방 법원 검사장의 지휘 감독하에 운영되었다. 중요 직급은 대다수 일본인이 장악하였다. 1930년대 전국 30여개 감옥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인력이 배치되어 운영되었다. 이렇듯 서대문 형무소는 1908년 한국 최초, 최대의 근대감옥으로 개설되어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가장 대표적인 악명 높은 감옥으로 운영되었다.

 

초기 사형장이 있던 터였는데 지금은 아담한 호수에 조경이 되어있다.
초기 사형장이 있던 터였는데 지금은 아담한 호수에 조경이 되어있다.
사형수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독립이 되지 못함을 한탄하며 나무를 부여잡고 울었다고 하는 사형장 앞의 통곡의 미루 나무 2020년 태풍으로 쓰러져 있다.
사형수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독립이 되지 못함을 한탄하며 나무를 부여잡고 울었다고 하는 사형장 앞의 통곡의 미루나무. 2020년 태풍으로 쓰러져 있다.
사형장
사형장
사형장 내부
사형장 내부
시구문 (시신을 내보내기 위해 만든 문)
시구문 (시신을 내보내기 위해 만든 문)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시신을 바깥의 공동묘지로 내보내기 위해 밖으로 연결한 통로다. 붕괴되었던 것을 1992년 독립공원을 만들 때 발굴하여 40m를 복원하였다. 원래 길이는 약 200m 라고 전해진다. 일제는 시신에 구타나 고문의 흔적이 많은 경우, 사형 사실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우려가 되는 경우, 이 문을 통해 시신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시구문
시구문

 

3.3평의 방에 23명이 거주를 하고 잠을 잤다고 한다. 잠을 잘 때 똑바로 누워 잘수가 없어서 앞사람의 머리와 다리가 반대로 되도록 옆으로 누웠고 맨 마지막 사람이 발로 밀어 밀착시킨 후 그도 누워 자는 형태였다고 한다. 거기에 화장실은 변기통으로 불리는 것이 있었다.

 

취조실
취조실

 

일제는 재판을 받기 전 미결로 수감되어 있었던 독립운동가를 일일이 경찰소를 이송하여 취조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공등계 형사를 직접 서대문 형무소에 파견하여 지하에서 취조를 하였다.

 

감옥에서 이루어진 물고문 – 후에 독재정권 치하의 민주 인사들도 당했던 물고문.
감옥에서 이루어진 물고문 – 후에 독재정권 치하의 민주 인사들도 당했던 물고문.

 

감옥에서 만났던 일제 강점기의 유관순 애국지사부터 현대에 이르러 민주화 진영의 인사들까지. 진정으로 애국하고 나라를 사랑하던 분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현장을 둘러보고 나왔다.

 

수용소를 돌아보며 역사학습모임 중인 사람들
수용소를 돌아보며 역사학습모임 중인 사람들

 

관람을 마치고 수용소 잔디밭에 나오니 봄볕이 따듯하다. 여우내내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드는 기분이다. 빨간 형무소 건물이 나름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럴까? 서대문형무소를 돌아 보며 많은 형무소 경내 건물들이 철거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이 있던 자리 벽돌에 새겨진 경성의 경(京)자
건물이 있던 자리 벽돌에 새겨진 경성의 경(京)자
서대문 형무소의 조감도- 많이 철거되었음을 알수있다.
서대문 형무소의 조감도- 건물들이 많이 철거되었음을 알수있다.

 

아뿔사. 과거의 유적을 허물어 버려 과거를 잊게 하는 큰 과오를 저지른 것이다. 서대문역사관에는 시정사항이 있으면 건의함에 넣어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지만 이렇게 큰 요구사항은 수정될 것 같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과거를 잊게 하는 민족이 되는 역사관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에도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반환된, 일제 하 부평 조병창 건물에 대한 문화재 조사가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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