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완초장 (중요무형문화재 1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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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완초장 (중요무형문화재 103호)
  • 이창희
  • 승인 2012.12.17 09:5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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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손재주를 한 눈에 본다.

 

완초장이란 왕골로 돗자리, 방석, 합 등 여러 가지 생활 용품을 만드는 기능이다. 완초란 왕골을 말한다. 왕골은 현완, 석룡초, 용수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자리·돗자리·방석·송동이·합 등을 제작한다. 왕골은 숙련된 장인의 손에 의해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 상류층의 애호물이 되기도 했으며, 곳간의 곡물이나 제사에 쓰이는 귀한 물건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가정살림에서도 다양한 쓰임새로 활용된 왕골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왕실에서 필요한 자리나 공예품을 제작해서 납품하는 전담기구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는가 하면, 조선시대에는 왕골이 중요한 교역품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 왔던 사신들이 왕골공예품을 많이 요구한 까닭에, 왕골을 제작하는 장인들이 수요를 미처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왕골공예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강화지역의 왕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우선 기후조건이 알맞아 왕골의 질이 좋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숙련된 솜씨를 이어받아 강화 왕골공예품은 매우 뛰어나다. 강화 완초장은 도구를 사용하는 노경소직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왕골제품을 통해 본 제작기법으로는 모든 과정을 손으로 엮어가는 방법과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에는 고드랫돌에 맨 두 가닥 실을 자리틀에 걸고 두 가닥 실로 엮는 노경소직(날줄을 겉으로 드러나 보이도록 성글게 짜는 기법)과 돗틀에 씨실을 촘촘히 걸어 긴 대바늘에 꿴 자리알을 넣으면서 바디로 눌러 다져서 짜는 은경밀직(날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촘촘히 짜는 기법)이 있다. 자리와 방석, 강화 화문석 등은 노경소직으로, 돗방석과 돗자리 등은 은경밀직으로 제작한다.

손으로 엮는 방법으로는 왕골 4날을 반으로 접어 총 8개의 날줄을 정자형으로 엮은 후 두 개의 씨줄을 엮어 만드는 기법인데 왕골 공예품인 강화의 화방석과 꽃삼합, 송동이(작은 바구니) 등이 대표적이다. 왕골제품은 역사가 오랜 생활문화유산으로 지금까지의 왕골제품은 깔 것과 용기에 불과하였으나 왕골은 염색과 굵기의 조절이 용이하며 특별한 도구 없이도 다양한 기물을 창작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므로 전통적인 제작기법을 이용해 완상품, 실내장식용품, 신변용품, 장신구 등 여러 용도로 개발의 여지가 풍부한 공예분야이다.

 오늘날 완초[왕골]는 우리나라 특산의 공예작물로서 방동사니과에 속하는 1년생 초류이다. 논 또는 습지에서 자라는 1~2년생 풀로 크게 뿌리, 잎, 줄기, 이삭과 꽃으로 구분하며 줄기가 화문석의 재료로 쓰인다. 줄기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5m~2m까지 자라며, 단면은 능각이 둔한 삼각형이고 피와 심으로 구분된다.
 
줄기의 표면은 매끄럽고 광택이 있으며, 다 자라면 누런 색이 된다. 특히 조직이 후막세포로 되어 있어 질기고 탄력이 있으며, 줄기의 속은 관다발로 되어 있고 조직 사이에 빈 공간이 있어 부드럽고 푹신하지만 습기에 약하고 잘 썩는다. 품종은 여러 가지 개발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숙기에 따라 조생종, 중생종, 만생종으로 구분한다.

조생종은 성질이 강해서 통골이나 굵게 쪼개서 쓰는 것이 좋고 중북부지방에서 주로 재배하며 강화 화문석을 만드는 완초의 종류가 이에 속한다. 만생종은 줄기가 가늘고 완피가 얇고 부드러워서 잘게 쪼개 쓸 수 있으며 보성 용문석의 재료로 쓰이는 종류이고 주로 남부지방에서 재배한다. 완초는 벼와 마찬가지로 모판에서 따로 모를 기른 다음 본논에 옮겨 심고 가꾼다. 벼농사와 함께 우리나라 여름 기후에 가장 알맞은 작물이며, 벼농사보다 재배방법이 쉽고 생육기간이 짧다.

그래서 왕골은 물빠짐이 좋지 않고 유기물량이 너무 많아 벼농사에 알맞지 않는 습한 논이나 고래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생산지도 전국적이지만 중부이남에서 주로 생산한다. 완초를 수확할 때쯤이면 쓰러지지 않도록 묶어주고 논에 물을 빼고 건조하게 해준다.

수확은 남부지방에서는 6월 상순에서 중순경에 하고 중부지방에서는 8월말 전후에 하는데, 꽃이 황갈색을 띌 무렵 줄기를 꺾어도 끊어지지 않을 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용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화문석에 쓰이는 것은 왕골의 색이 선명하고 염색이 잘 되도록 조금 일찍 베는 것이 좋고, 무늬가 없는 초석에 쓰이는 질긴 완초는 완전히 자라서 줄기가 누런색이 되면 수확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 기능보유자인 이상재 선생은 1943년 7월 1일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서 부친 이강명 선생과 모친 차청례 여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선생이 태어나기 전부터 조부 및 선생의 어머니가 완초제조를 부업으로 삼아 왔다고 한다. 일제 때 선생의 조부 및 모친이 만들던 완초제품은 당시 그곳에 와 있던 성공회 신부가 구입하여 영국으로 보내었다고 한다.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집안사람들이 부업으로 하던 완초공예를 자연스럽게 배우기 시작하였다. 교동은 벼농사가 마땅치 않은 척박한 섬마을이어서 논농사를 짓지 않고 오래 전부터 왕골농사를 지어오던 곳이었다. 그래서 지역인들은 다들 왕골을 짜서 생활을 꾸려 나갔다고 한다.

처음 왕골을 접한 것은 열네 살 때라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를 졸라 처음 왕골을 만지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하여 품이 많이 들고 운신의 폭이 큰 자리 만드는 일은 배우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소품 만드는 일을 배웠다. 처음의 기본기는 할아버지로부터 배웠으며 좀더 나은 기술은 동네 할아버지인 유형식 선생에게서 둥근 삼합과 방석 만드는 법을 배웠다.

교동면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왕골경진대회를 했는데 거기에 참가하여 배운지 3년 만에 일등을 하게 된다. 이는 이상재 선생이 완초공예기술을 인정받고 공예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배경이 되었다. 14세에 왕골공예를 접하고 익힌 지 3년 만에 일명 ‘왕골 선생’으로 불리며 공예기술을 남들에게 가르치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리가 불편하여 완초제작과 동네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전념하였다. 부인인 유선옥 여사는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상재 선생에게 왕골공예를 배우던 중 선생의 우수한 완초기능에 빠져 1970년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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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윤아 2014-11-16 20:45:45
저두배우고싶은대 될까요 ? (010)9135-8861 전화주셰요 ^ ^

반윤아 2014-11-16 20:42:26
품위있고 너무 멋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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