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이 된 신라 스님, 김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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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이 된 신라 스님, 김교각
  • 지용택
  • 승인 2013.10.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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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택칼럼] 지용택 /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구화산불학원-감로사.jpg

구화산 불학원 - 감로사

달마가 동쪽에서 받아들여지기까지
중국 춘추전국시대(B.C.770~B.C.221) 5백여 년간은 주나라 왕실이 힘을 잃어 160여 개의 제후국들이 서로 공방전을 거듭했다. 제후국들이 백성의 어려운 삶을 버려둔 채 서로 힘을 다투어 무력으로 그 세를 확장해 나갔으므로 전쟁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이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혼란기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철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관개사업으로 농업이 크게 발전한 시대였다. 상공업도 발전하여 대도시가 형성되고 청동화폐가 통용되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도 토지를 사유화할 수 있었다.
 
제후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일반 평민들도 능력에 따라 등용하였기 때문에 누구라도 출세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환경을 바탕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사상가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에서 중국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한 것이 노자(老子), 공자(孔子), 묵자(墨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뒤 한나라, 삼국시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거치면서 묵자는 퇴색하고 새로운 사조로서 불교(佛敎)가 재래의 사상인 노자, 공자와 더불어 중국의 사상과 풍속사에 자리 잡게 되었다.
 
후한(後漢)이 몰락한 이후부터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중국을 재통일(589년)할 때까지 장장 360여 년간 중국 대륙은 대단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북방의 이민족과 한족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며 치열한 권력쟁탈전을 벌이는 동안 수많은 나라가 명멸했고, 백성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었다. 이처럼 격변과 혼란을 겪던 시대, 불교는 고통과 죽음의 문제를 중국 고유의 전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으로 다뤘다. 또 사후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시각과 구원의 소망을 제공하였고, 인간은 언젠가 이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리라고 약속했다.
 
초기에 많은 중국인들은 불교를 도교(道敎)의 변형으로 보기도 하였는데, 그 이유는 불경 번역자들이 대승불교의 ‘공(空)’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도교의 ‘무(無)’라는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는 등 많은 개념을 도교의 이론과 언어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유교는 불리한 논리를 제공하는 데 반해 불교는 서로 조화로 민족 간의 통일을 시도할 수 있어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도 불교의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중국의 불교 수용사
중국 사람들은 서역의 승려인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같은 외국학자들의 불경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인도 유학을 감행했다. 예를 들어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한 법현(法顯, 337?~422?), 『서역기(西域記)』를 저술한 현장(玄奬, 602?~664),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을 저술한 의정(義淨, 635~713)과 신라에서 유학간 혜초(慧超, 704~787)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했는데 위의 저서들이 인도 사대(四大)여행기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바다에서 바다로, 육지에서 육지로,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길을 택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할 뿐만 아니라 많은 불경을 구해 돌아와 스스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신라 승려 원측(圓測, 613~696)은 외국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유학하지 않고도 서역 언어에 달통하여 현장 스님과 함께 경전을 번역한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서안 근교에 있는 흥교사(興敎寺)에는 지금도 현장과 함께 그의 탑묘가 모셔져 있다.
 
중국 사람들은 불경을 다 번역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달마(達磨),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으로 이어지는 선(禪)불교를 창안하여 인도불교를 중국불교화해서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선불교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중국 명산에 불교의 사대보살의 거처를 마련했다. 산서성 오대산(五台山)에 문수보살(文殊菩薩), 절강성 보타산(普陀山)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사천성 아미산(峨眉山)에 보현보살(普賢菩薩),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에 지장보살(地藏菩薩) 등이 그것인데 이곳에서 보살의 법력과 서원을 빌려 성역화(聖域化)하여 많은 사람의 기도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의 뿌리로 발전했다.
 
보살(菩薩, Bodhisattva)이란 누구인가?
인류가 70억이라고 하니 지구상에는 70억의 보살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보살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구하고〔自利〕,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利他〕”으로 정의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전생(前生)에 여러 겁(劫)을 거치면서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만이 부처, 아라한(阿羅漢), 보살이 될 수 있었는데, 보통 사람도 오직 자신과 모든 중생과 함께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워 고된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살의 개념이 확대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은 중생도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다는 대승불교 사유체계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대웅전(大雄殿)에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님〔本尊佛〕 좌측에 사자를 타고, 청련화(靑蓮花)를 들고 있는 보살이 문수보살이다. 지혜(智慧) 제일이라는 문수보살은 부처님을 대변하고, 모든 중생에게 지혜를 일깨워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승 자장(慈藏, 590 ?∼658 ?)이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상원사(上院寺)에 문수보살의 신앙처를 열었다.
 
법당 안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우측에 코끼리를 타고 연꽃을 들고 있는 보살이 보현보살이다. 문수보살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보현보살은 행원(行願)을 상징한다. 보현보살은 크게 서원을 세워 중생을 두루 넓게 구하고, 사람의 생명을 길게 이어 보현연명(普賢延命)이라고도 한다. 불교 역사에서 보살들 가운데에는 힌두교의 영향이 크게 보이는 편이 많은데, 문수와 보현의 경우엔 불교에서 비롯된 독창적인 보살의 사례라는 것이 특색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균여(均如, 923~973) 스님이 향가로서 보현신앙을 넓혔고, 고려승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이 전남 강진 백련사(白蓮寺)에 보현도량을 열었다.
 
관세음보살은 보타락가(補?洛迦, potalaka)에 사시면서 세상 중생의 소리를 듣고 보는 자비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언제나 생명수인 감로수(甘露水)병을 가지고 다닌다. 고난에 빠지거나 소망이 있는 중생이 그 명호를 부르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소리를 듣고 보아 고난에서 구제하고 소원을 성취하게 하는 보살이다. 끝없이 방황하는 서민들이 얼마나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두 손 모아 서원하였을까.
 
우리나라의 관음신앙은 민속화되고, 대중화되어 절마다 관음보살을 모시지 않는 곳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관세음보살이 사시는 곳이 다른 나라에 비해 여러 곳이다.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낙산사(落山寺) 홍련암(紅蓮庵), 경남 남해시에 있는 보리암(菩提庵), 인천 강화군에 있는 보문사(普門寺)인데 이곳들이 모두 보타락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타락가를 특정 지역의 명칭으로 제한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관음신앙과 인연이 있는 곳을 관음주처(觀音住處) 즉 관세음보살이 사는 곳이 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화엄경에서 제26선지식인 ‘비슬지라(毘瑟祗羅) 거사’가 선재동자에게 바다 위에 산과 바다와 모래가 어우러진 맑고 깨끗한 곳에 관세음보살이 계시다고 가르쳐준다. 이것은 경문에 있는 말이지만 우리나라 관음주처 세 곳은 모두 바다 위에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불세계(無佛世界)의 등불, 지장보살(地藏菩薩)
지장보살은 인도에서 시작된 오래된 신앙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토속신앙과 결합되어 여느 절마다 명부전(冥府殿)을 차리고 그 안에 모셔져 왔다. 시대에 따라 모습이 다르지만 이 근래에는 머리를 삭발하고 푸른 띠를 두른 형상에 석장(錫杖)을 들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시고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없는 혼탁하고 지루한 험한 시간 속에 특히 육도(六道,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도, 천도) 가운데서도 가장 혹심한 고통을 받는 지옥의 중생을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구원하는 것을 서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지장보살의 서원은 바로 철저한 중생제도의 비원(悲願)인 것이다.
 
또 지장보살은 다른 보살들과는 달리 지옥을 주거지로 삼아 무불세계(無佛世界)의 험난한 세상을 사는 중생을 대상으로 교화를 펼치면서 마지막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결코 성불(成佛)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 까닭에 육도 어느 곳이든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 끊임없이 중생을 구제하는 무한한 공덕을 지닌 보살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휘성 지주시(池州市)에 있는 구화산 지장보살 김교각(金喬覺, 695~794) 신라 스님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이나 『신승전(神僧傳)』의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스님은 신라 왕자라고 하는데, 스님의 고행과 법력에 경탄한 주위의 사람들이 대가람을 지어 화성사(化城寺)라 하고 스님이 주석하도록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스님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일컬어져 신라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와 함께 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가부좌를 한 상태로 음력 7월 30일 세수 99세로 입적하였다. 시신을 관에 안치하였고 3년 후에 탑속에 모시려고 관을 열었을 때 얼굴 모습이 생시와 같았고, 뼈마디에서 금쇄(金鎖)소리가 났다고 한다.
 
경전에 따르면 시신에서 금쇄소리가 나면 바로 보살의 화신이라 했는데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지장보살로 생각하고 김교각 대신 김지장이라 하였다. 육신탑을 세워 공양하게 되었고, 그 후로 구화산이 지장보살의 도량(道場)이 되었다. 문헌의 내용은 대충 이러한데 이곳을 방문해보면 스님의 전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 전당시(全唐詩)에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가 실려 있고, 다른 문헌에도 스님의 작품들이 보인다.
 
만리타국에서 보살이 된 김교각 스님
지난 9월 초 안휘성 구화산에 세계 최고 높이의 지장보살상이 제막되었다. 좌대를 제외하고 불상 높이만 99m나 된다.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46m)이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39.6m)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금도금으로 황금 35kg이 사용되었다고 하니 제작비만도 엄청났으리라.
 
중국을 많이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관광사업을 개발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광역화, 성역화, 역사화하는 소리가 대단하다. 중국이 이런 정책을 펼치는 속내가 무엇이든 지장보살이 된 김교각 스님의 문헌과 전설이 살아있는 곳에 99m의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세수 99세에 입적하신 스님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는데, 한국 사람으로서는 정서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를 구제하기 위하여 몸을 낮추다 못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뛰어드는 보살신앙에서 우리는 김교각 스님을 새롭게 재조명할 의무가 있다. 종교를 떠나서 신라 스님이 만리타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기에 지장보살이라고 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과정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어려움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면서도 존경스럽고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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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노천대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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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 노천대동상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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