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역, 국내유일의 사람이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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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역, 국내유일의 사람이름 역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4.03.05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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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역에는 비단으로 둘러싼 병풍산 소재
 
김유정역 앞에는 금병산이 소재하고 있다. 금병산은 '비단으로 병풍을 친 듯한 산'이라는 뜻으로, 춘천시에서 남쪽으로 8km 지점에 자리잡은 산이며, 춘천시를 에워싼 산들 중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대룡산(899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이 수리봉(645m)을 솟구친 후 그 맥이 원창고개에서 잠시 가라앉았다가 마지막으로 솟은 산이 이 산이다.
 
 
사계절 중 겨울에 오르기 가장 좋은 산으로 가을이면 낙엽이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수목이 울창하다. 이 산의 들머리인 실레마을은 소설가 김유정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문학비가 길손을 맞는 곳이다. 김유정은 1931년 23세에 고향에 내려와 야학을 열었다. <금병의숙>이라는 간이 학교로 농민계몽운동을 펼쳤으며 고향을 무대로 삼은 여러 편의 농민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30세로 요절하였다. 이 산은 《동백꽃》 《만무방》 《금 따는 콩밭길》 《봄봄》등 그의 작품 제목으로 등산로 이름을 달고 있는 호사를 누리는 산이다.
 
 
금병예식장 앞에서 김유정 기적비를 보고 동쪽으로 난 길을 따른다. 약여교 건너 작은 저수지를 지나면 세 갈래 길이 나온다. 가운데 길이 만무방길이다. 어느 길로도 주능선인 산골 나그네길에 이른다.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가지쳐 나간 능선이 금 따는 콩밭길이다. 여기서 소나무 숲과 억새밭을 지나면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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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은 동백꽃길로 한다. 동쪽 능선은 동내면 원창고개로 내려서는 봄봄길이다. 멀리 삼악산과 북한강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능선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간다. 송전탑에서 왼쪽 좁은 능선길을 택하면 실레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무덤을 지나 폐농가가 나온다. 여기서는 들머리인 금병예식장이 바로 보인다. 느린 걸음으로도 4시간이면 충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춘천행 열차를 타고 김유정역에서 내리거나 남춘천역에서 신남행 시내버스를 타면 실레마을까지 간다. 이 마을에는 숙박시설이 없어 남춘천역까지 나와야 하며 산행을 마친 뒤에 춘천의 대표적인 음식인 막국수와 닭갈비를 맛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소설가 김유정의 아명은 멱설이이다. 김유정은 김유정역이 소재한 실레마을에서 태어나 1916년부터 약 4년간 한문수업을 받았다. 그 후 휘문고보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 중퇴했다.  1931년 몸이 아파 고향인 실레마을에 내려와  야학을 열었고, 그 후 얼마 동안 금광을 전전했으나 1932년부터 실레마을에 금병의숙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계몽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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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단편 《소낙비》와 《산골나그네》를 집필, 1934년엔 단편 《만무방》을 지었다. 1935년 〈조선일보〉에 《소낙비》가, 〈중앙일보〉에 《노다지》가 각각 당선되었다. 뒤이어 《금따는 콩밭》(開闢), 《떡》(中央), 《만무방》(朝鮮日報), 《산골》 (朝鮮文壇), 《봄 · 봄》(朝光)이 각각 발표되어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9인회(九人會)」의 회원으로 활약했으며, 1936년에는 《산골나그네》(四海公論), 《옥토끼》(女性), 《동백꽃》(朝光), 《정조》(朝光), 《야앵(夜櫻)》(朝光), 《슬픈이야기》(女性), 《가을》 등을 계속 발표했다. 또한 이듬해 《따라지》(朝光), 《땡볕》(女性), 《정분》(朝光), 《총각과 맹꽁이》 등을 내놓았으며, 〈중앙〉 10월 · 11월호에 미완성 장편 《생의 반려》를 연재 중 지병인 결핵성치질과 폐결핵으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에서 요절했다.
 
 
청소년시절에 불우했고 작가로 등장한 후에도 역시 생활고에 시달린데다가 폐결핵으로 인한 우울은 이 작가의 성격이 되었다. 그 우울성은 일견 유머러스해 보이는 작품 뒤에 항상 애수의 그림자를 숨겨 놓았다. 문단 생활은 불과 2년여 밖에 되지 않는데 그동안 병마와 빈한과 시대고 속에서도 30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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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와 같이 찬란하게 나타났다가 무지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간」 그는 1930년대 문학의 주경향의 하나인 「최적한 장소에 최선의 말을 배치하는」 조사법에 가장 뛰어난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재면으로 볼 때 청년시절의 생활에서 온 금광에 관한 《노다지》 · 《금따는 콩밭》이라든지, 농촌을 다룬 《산골》 · 《동백꽃》 ? 《봄 · 봄》의 세계를 위시하여 도시적 소시민의 생활, 심지어 여급의 생활에까지 그 작품세계를 광범위하게 확대시켰다.
 
 
또한 인생파적인 태도를 취하여 그 작중인물들을 대개 어리석고 무지한 인물들로 설정했고,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토착적 유머를 형상화시켜 놓음으로써 현대문학의 유산 가운데 값진 자기발견의 한 원형을 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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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계몽적 이상주의나 감상적인 현실중시의 피상적인 농민문학이 아닌 당시의 농촌과 서민 · 농민의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그 생활감정과 습속의 내면적인 흐름 및 본질적인 인간상들을 보여 줌으로써 하나의 사회학적인 입장에까지 작품의 차원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다만 그 스타일면의 개척과 유우머 등의 많은 공적이 그의 요절로 대성하지 못한 관계로 몇몇 작품에서 사상성의 빈약이 문제되는 경향이 있다.기타 작품으로 사후에 발표된 단편 《형》(鑛業朝鮮, 39)과 《두꺼비》(文學思想, 73)가 있으며, 《두꺼비》는 작가가 생존시에 있었던 국창 박녹주에 대한 유명한 짝사랑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유고집으로 〈동백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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