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산 병목안코스, '자전거 업힐'의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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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병목안코스, '자전거 업힐'의 명소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4.03.09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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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병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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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과 군포시 속달동 및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수리산의 위치는 동경 126°50″~126°55″, 북위 37°20″~37°24″이고 높이는 469m이다. 조선시대에 안산군의 명산으로 봉우리가 매우 빼어났으며 산곡이 깊었다. 
 
명칭 유래수리산의 지명유래에 관해서는 세가지 설이 있다. 산의 바위가 마치 독수리와 비슷하여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 실라 진흥왕 때 창건한 수리사로 인해 수리산이라 했다는 설, 조선시대 때 어느 왕손이 수도하여 수리산이라고 했다는 설 등이 그것이다. 일명 견불산이라고도 한다.
 
자연환경수리산은 광주산맥을 구성하는 산지 중의 하나로 군포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태을봉(489m)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슬기봉(451.5m), 북서쪽으로 관모봉(426m), 남서쪽으로 수암봉(395m)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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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상층부는 낙엽활엽수로서 굴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가 우점하고 있고 상록침엽수로는 소나무가 일부지역에 소규모로 분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수리산에서 나타나는 포유류는 종류와 개체수가 비교적 적은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두더지, 멧토끼, 청설모, 들개, 너구리, 족제비 등이 서식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현황산의 북쪽 골짜기에 있는 안양동의 담뱃골은 약 30호쯤 되는 작은 산촌으로 지금은 담배를 재배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에 헌종이 천주교를 박해하던 기해박해 때, 천주교신자들이 숨어 들어와 담배를 가꾸며 살던 곳이다.
 
 
이들 중 이 땅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의 가족들이 겪은 수난은 매우 처참하였다. 최양업의 어린 동생들은 당고개에서 죽음을 당한 많은 신자 중 어머니의 주검은 못 찾고 아버지 최경환의 주검만을 거두어 그들이 살던 수리산 골짜기에 묻었다. 그 무덤자리는 지금도 남아 있어 천주교신도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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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안양시, 동남쪽으로 군포시, 서쪽으로 신흥도시인 안산시와 접하고 있고 아름다운 숲이 있어 관광지로서 기대를 받고 있다. 숲은 약 100년에서 300년가량 된 고목들이 우거져 있고, 숲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당집이 자리 잡고 있어서 역사·민속학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당집은 중부지방 서해안 일대에 발달된 '터줏가리당'이다. 숲은 2002년에는 생명의 숲 및 산림청에서 주최한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수리산유원지와 수리산 삼림욕장이 있는 수리산은 2009년 7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병목안은 새마을교에서 안양 채석장에 이르는 지역으로, 마을의 지세가 병목처럼 마을초입(새마을교)은 좁으나 마을에 들어서면 골이 깊고 넓다고 하여 병목안이라 부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수리산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뒤띠미라 칭했고,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동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후두미동의 두 자는 豆와 頭를 함께 사용하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頭로 통일된 것으로 보이며, <<晋州 柳氏世譜>>(1982)에는 後屯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頭의 오기로 보인다.
 
병목안에 사람이 최초로 살기 시작한 것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촌로들의 증언과 이 곳에 소재한 묘소 등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조 숙종 년간에 진주 류씨에 의해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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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인조년간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柳詢(1597-1638)의 둘째 아들인 류명재 (1623-1703)의 묘를 이곳에 쓴 후부터인데, 류명재는 자가 有道, 호가 思齋 로 통정대부에 올라 안산군수와 영천군수 및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후 81 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 인물이다.
 
진주류씨의 묘는 류명재 외에 류명재의 아우 柳命雄(1636-1722, 돈지돈령부사 역임. 1973년에 화장)을 비롯하여 류명재의 큰 아들, 손자 및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인 姜世晃 (1713-1791)의 처(晋州柳氏) 묘(후에 진천으로 이장) 등이 있었다. 그 중 류석의 誌石을 이곳 토박이인 邊源信이 수습, 현재 안양시 문화공보실에 의해 보존. 관리 되고 있다. 진주류씨 이후 병목안에 세거한 성씨는 원주 원씨, 순창 조씨, 달성 서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병목안을 기점으로 서쪽지역을 새마을, 서남쪽 지역을 창박골, 남쪽지역을 담배촌이라 각각 칭한다.
 
구전에 따르면 이 마을에 진주 류씨가 부자로 살았는데, 날마다 찾아오는 식객으로 고민하고 있던 차,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그 방도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스님이 이르기를 마을초임(새마을교)산 밑에 묘를 쓰고 탑을 세우시오 라고 이른 후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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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류부자의 하인이나 가족이 죽으면 스님이 일러 준대로 묘를 쓰고, 그 옆에 탑(돌탑)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렇게 정성을 들이자 과연 류부자 집에 찾아오던 손님(식객)의 발길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진주 류씨가 일거에 패가했다는 것이다. 이는 병목안 동쪽에 있는 뉴골든아파트 뒷산이 풍수로 보아 배형국이므로 산 끝에다 묘와 돌탑 등 무거운 것을 쌓았으니 배가 뒤집혀 패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새마을교 옆에 있던 돌탑은 손을 대거나 치우면 병목안 주민들이 위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에 그래도 있었다가,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 갔고, 묘는 1980년대 초에 대부분 화장되었다. 마을 동남쪽에 있던 안양채석장은 1930년대 초에 개장되었다가 1989년에 폐장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차응설이 이곳에 야학을 세워 문맹퇴치에 헌신하기도 하였다.
 
 
안양3동 15통.17통.18통.24통에 속해있는 병목안에서는, 일제 중엽까지만 해도 창박골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창박골 앞산(약수 터 입구)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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