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천주교회와 인천 계몽운동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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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천주교회와 인천 계몽운동의 만남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4.08.14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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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방한 특집] 가톨릭교회와 인천사회 2

개항 직후의 제물포 개항장 해관 주변

제물포 본당의 학교 개설 노력

잦은 병치레를 앓았던 르 비엘 신부는 결국 1892년 10에 홍콩 요양소로 떠나게 되고 그의 뒤를 이러 빌모(禹一模) 신부가 제물포 본당의 제3대 보좌 선교사로 9월 23일 부임하였다. 폐병 때문에 홍콩 요양소로 떠난 르 비엘 신부는 그러나 1893년 4월 20일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제물포 선교사로서 본인은 한 가지 소원 밖에 없었다. 성당을 세우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가능한 한 저축을 하는 것”이라고 유언장을 작성했던 르 비엘 신부의 제물포 본당을 위한 애정은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르 비엘 신부, ?유언장? , <선교사 서한문>, 39면)

그의 뒤를 이어 부임한 빌모 신부는 부임 직후인 1893년 3월 뮈텔 주교에게 학교 개설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낸다. 전교회장과 교유들의 가정을 방문하다가 그들로부터 제물포에 학교를 세우라는 재촉을 받고, 15명의 어린이가 있으나 가르칠 선생님이 부족하여 주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물포 본당 제3대 빌모 신부

제물포 본당 내에서 학교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892년 르 비엘 신부가 재임할 때 신자수가 급속도로 늘어남과 함께 그들의 자녀와 외교인 자녀를 합하여 12명의 학생이 처음 입학하여 학교의 출발을 보았다는 보고서가 있었다. 그런데 1892년 12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곧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빌모 신부가 주교에게 학교 개설을 제안하면서 “르 비엘 신부 때, 부모들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자녀를 보내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했더니 그들을 복종시키기는 쉽고, 게다가 그들도 원하고 있다”는 언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르 비엘 신부의 주도에 의한 1892년의 학교 개설 움직임은 1893년에 들어 다시 활발하게 제기되었던 것 같다. 빌모 신부는 같은 서한에서 “주교님이 이에 대한 뜻을 본인에게 밝히셨듯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제물포 본당 내에 학교를 개설하는 문제는 이미 뮈텔 주교가 구상하고 있다가 빌모 신부에게 권유했었던 사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빌모 신부의 학교 개설 제안은 1893년 4월 22일의 인사이동으로 제물포 본당 제4대 선교사로 부임하는 마라발(徐若瑟) 신부에게로 넘어갔다. 마라발 신부는 1885년 서울에서 이미 40명 가량의 학생을 가지고 시작된 한문학당(漢文學堂)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신부였다.

한편 1893년 뮈텔 주교는 재정적인 곤란을 해결해 보고자 프랑스의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교구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1696년 프랑스 샬트르시에서 자선 수녀회에 창립한 이 수녀회는 1888년 7월에 수녀 4명이 제물포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에 진출하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수도회의 효시가 되는 이 수녀회는 이후 여자수도회의 전담 분야인 자선·의료·교육에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가난하고 몽매한 개화기의 한국사회에 처음으로 서구식 사회복지 사업과 빈민구제 사업, 육영사업의 씨앗을 뿌린 수녀회였다.(홍순호, "프랑스의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한국 진출의 의의", <교회와역사> 159호, 10면)

뮈텔 주교의 요청을 받은 샬트르 교구에서는 아시아 지역에 파견된 수녀들을 위한 요양소 건립과 자그마한 성영회 건물, 그리고 성당으로 쓸 건물 등에 필요한 자금을 물어보았다.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마라발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1893년 인천항에서 발병한 장티푸스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위해 성당내에 치료소를 두었는데, 많은 환자를 보살피기 위해 제물포에 수녀원의 설립이 필요하다가 제안하였다.

이에 뮈텔 주교는 답동에 사두었던 3,212평의 성당 부지 중 일부분을 수녀원 부지로 떼어 1893년 7월 초 기초 공사를 시작함으로써 수녀원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8월 18일 드디어 공사가 마무리되어 서양식 3층 벽돌집으로 된 성 바오로 수녀회 제물포 분원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날 마리 클레망스 수녀와 엠마누엘 수녀는 서울 용산 나루터를 떠나 인천항에 도착하여 인천 교유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이후 수녀원은 병자들의 치료뿐만이 아니라 15명 가량의 어린들로 처음 고아원을 운영해 나갔고, 여자 아동들의 교육으로 사랑을 손길을 뻗어 나갔다.

수녀의 건립 공사가 마무리되자 성당의 건립도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895년 8월에 정초식을 거행하고, 1896년 7월에는 종탑을 완공하였다. 1897년 7월 4일 신부들이 봉헌한 두 대의 미사 후, 저녁 7시경 뮈텔 주교에 의해 신축된 인천 성당의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이어 주교가 집전한 미사가 축성된 성전에서 봉헌되고, 81명의 교우에 대한 견진성사도 주어졌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인들의 횡포가 더해가는 속에서 수녀원에 일본인 부랑자들이 난입하여 횡포를 부리고, 마라발 신부가 일본인들에게 뭇매를 맞는 곤경을 겪기도 하였지만, 제물포 본당은 날로 발전해갔다.
 


1894년 건립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물포 분원

빌모 신부의 뒤를 이어 1893년 4월 부임한 마라발 신부도 여러 차례 뮈텔 주교에게 본당내에 학교를 개설할 것을 제안해 왔다. 1898년에 들어서면 학교 개설 개획은 이미 실천단계에 들어선 듯하다. 1898년 4월 28일에 마라발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주교가 제물포 학교를 위해 많은 금액의 건축기금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직후 학교를 위한 건물의 공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4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물포 분원이 생긴 이후로 수녀회에서는 성영회를 운영하서 고아들을 기르는 한편 무료진료소를 개설하고 가정 방문치료를 병행하여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고아들에게 초보적인 읽기, 쓰기, 수공예 등을 가르치면서 교육사도직의 봉사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본격적인 교육기관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899년 8월부터 수녀회에서는 여자 통학학교를 개교하였다는 사실이 다음의 두 기록에 나타난다.

 

지난 8월에 우리는 여자기술학교를 열었는데 그 수가 30명 가량인데, 거의 절반은 외교인입니다. 학생들은 읽기와 쓰기, 바느질을 배웁니다. 외교인들도 교우들처럼 문답과 경문을 배웁니다.

- 율리안나 수녀

 

1894년에 설립된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의 고아원은 현재 106명의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읍니다. 수녀들은 또 1년 전부터 외부에서 통학하는 학교를 열었는데, 벌써 30명 가량의 한국 소녀들이 다니고 있읍니다. 거기서는 읽기, 쓰기, 바느질 등을 가르칩니다. 약 반수나 되는 외교인 학생들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기도도 배우고 교리문답도 배웁니다.

 

고아원과는 별도로 외부에서 성당으로 통학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그것도 신자가 아닌 절반 가량의 여자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교육기관으로 생각된다. 일부 교우 자녀 및 외교인 여자 아이들을 성당으로 통학하게 하여 읽기와 쓰기, 바느질 등의 실용적 기술을 가르치고 이와 함께 종교 교육을 함께 가르친 이 학교는 정식 학교라기보다는 간이 자선학교에 가까웠다. 본당 측으로 보아서는 교육사도직을 통한 선교가 좋은 효과를 거두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제물포에서의 여자기술학교에 뒤따라 1900년 종현성당, 1901년 약현성당에서도 여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하였다. 제물포의 여학교를 비롯한 이들 자선학교들은 매우 번창해 갔다. 파리외방전교회에 올리는 1901년 연말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제물포의 수녀들이 여학교를 시도했는데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개항장에는 항상 외국 풍습이 용납되며 받아들여지기조차 합니다. 수녀들의 통학 학교는 여전히 잘 운영되고 번창해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같은 시도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개항장의 개방적 분위기 속에서 제물포의 여자기술학교는 번창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학교의 성공적인 운영은 1900년 사립박문학교의 개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수녀회의 자선·봉사활동으로 시작한 이러한 여학교가 지역에 큰 관심을 일으키게 되고 아울러 선교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1892년 이후부터 1899년 여자기술학교의 운영에 이르기까지 제물포 본당 내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던 학교 개설 움직임은 1900년대에 들어 드디어 박문학교의 개교로 그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인천박문협회의 활동

제물포 본당내의 이러한 움직임과는 별도로 1890년대 말에는 근대 교육에 대한 관심이 인천 지역 내에서도 점차 고조되어갔다. 특히나 1896년 7월 설립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영향 아래 인천에서도 활발한 신교육열과 지식열이 널리 확산되었을 것이다. 1898년 6월 무렵에 설립된 것으로 보이는 인천박문협회(仁川博文協會)를 통해서 우리는 인천의 활발한 교육열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인천박문협회는 독립협회의 자매단체이자 인천지회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신용하, <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975. 118면) 이 단체의 설립 목적과 그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독립협회에 관해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인천박문협회의 활동을 보도한 <독립신문>
 

주지하다시피 독립협회는 19세기말에 여러 열강의 침략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이 훼손당하고 민족적 위기가 조성되었을 때를 당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전개하여 민중의 힘으로 민족이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여 궁극적으로 자주독립을 지켜려고 만든 사회단체이다. 서구시민사상의 세례를 받은 개화파 일부와 전통적 교육과 신식교육을 병행하여 받은 개신유학적 학풍의 선각자들이 결합하여 전개된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독립문의 건설과 독립공원의 조성을 창업 사업으로 발족하였다. 발족한 이후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을 기관지로 하여 자주독립 사상, 자유민권 사상, 자강개혁 사상을 역설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개혁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한다. 비록 독립협회의 존속기간은 2년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근대사에 있어 그 역할과 의의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수많은 회원의 참가와 다양한 형태의 운동을 전개한 독립협회의 운동 과정은 그 조직과 회원구성, 그리고 운동방식에 따라 크게 4단계의 궤적을 밟으며 전개되었다. 제1기는 1896년 7월 2일 창립으로부터 토론회를 개최하기 이전인 1897년 8월 28일까지로 ‘모금운동’을 중심으로 한 창립사업기 또는 고급관료주도기이다. 제2기는 독립협회가 정기적인 토론회를 시작한 1897년 8월 29일부터 구국선언운동 하기 이전인 1898년 2월 20일까지로 토론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기 또는 민중진출기라고 부른다. 제3기는 구국운동 상소(上疏)를 한 뒤부터 김홍륙 독차사건(金鴻陸 毒茶事件) 이전인 9월 10일까지로 눈부신 민족운동의 승리를 구가한 민중운동기 또는 민중주도기이다. 이 시기의 독립협회 회원은 관료층이 대거 퇴진하고 재야 인사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며, 임원진도 개편되어 개혁파 중심의 체제로 전화하였다. 제4기는 김홍륙 독다사건이 발생된 9월 11일부터 민회금지령(民會禁壓令)이 내려진 12월 25일까지로 ‘만민공동회’로 격화된 민중투쟁기 또는 민권투쟁기이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과 계급이 참여하여 광범위한 개혁운동을 전개한 독립협회이지만, 이러한 자강(自强)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1차적 사업으로 신교육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독립협회의 제1회 토론회가 무엇보다도 먼저 교육문제를 중시하여 그 주제를 “죠션에 급션무는 인민의 교휵임”으로 설정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국가의 전반적 개혁을 민권에 기초하여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신지식을 습득하고 세계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협회의 영향 아래 1898년에 인천에서 인천박문협회가 결성되었다. 그 정확한 설립일자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월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 1898년 6월 28일자에 인천박문협회와 관련한 최초의 기사가 보이는데, 회원 한우근(韓禹根)의 연설이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모임을 뜻하는 ‘회(會)’자의 한자 뜻풀이로 시작하여 모임의 단결을 강조하고, 박문협회도 단결하여 “우리 대한국 회를 보존하야 남의 나라에 압졔를 밧지 말고 개명한 자주 독립국이 되자”고 하였다. 한우근이 속해 있는 인천박문협회의 설립 취지와 활동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독립신문> 1898년 7월 4일과 6일에 실린 ?박문 협회 회원의 연설?이라는 논설에서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의 이치를 궁리하여 어떤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할 때는 목적과 행위와 이해가 있어야 한다며 이를 공부하는데 적용하여 강조하면서 시작된 이 연설의 주제는 박문협회의 설립 취지에 있다. “오날날 설립 하는 우리 박문 협회도 또한 그러 하야 초절은 신문 보고 연설 할 목적이오 중절은 날마다 와셔 신문을 보고 들으며 쥬일마다 모혀 연셜 하는 행위오 종절은 지식을 널녀 문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인천박문협회의 설립 취지인 것이다. 이것을 자세히 놓고 보면, 인천박문협회는 첫째, 신문을 보고 세계정세를 비롯한 신지식을 얻으며 토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협회의 일차적 목적이자 협회 회원 내부에서 진행되는 성질의 것이다. 이 첫번째 사업을 통해 인천박문협회는 새로이 얻은 지식과 의견을 대외적으로 연설하고 전파하는데 두번째 설립취지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 효과로써 “지식을 널녀 문명? 사?이 되”는 것이 세번째 설립 취지이니, 협회 회원 뿐만이 아니라 지역 인민에게 널리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전파하고자 했던 것 같다. <독립신문> 1898년 7월 25일자에 이를 통해 인천박문협회는 “남의게 슈모와 압뎨를 밧지 말고 우리 대황뎨 폐하의 챡한 백셩이 되는 일”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는 독립협회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자주독립 사상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취지 아래 이들은 매주 일요일 소위 ‘통상회’라는 토론 모임을 개최하였는데, 1898년 7월 하순에는 ‘단발’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여 “단발 함이 가 하다”는 결론을 얻고 그날 저녁 회원 20여명이 단발하고 나머지 회원도 곧 단발할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이 “쥬일마다 모혀 연셜 하는 행위”를 갖는다고 하는데 있다. ‘일요일’이라고 하지 않고 “쥬일”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인천박문협회 회원들이 천주교 내지는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짐작되는 것이다. 1898년 <독립신문>에 몇번의 단편적인 관련 기사가 보일 뿐, 회원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으며 언제까지 존속하였고 무슨 사업들을 전개해나갔는지 현재까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회원이 20명을 크게 상회하는 작지 않은 모임이라는 것과, 이들이 인천을 기반으로 해서 모인 종교인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이 무렵 독립협회의 사법위원(司法委員)으로 있었던 강화석(姜華錫)이다. 세레명이 요한인 강화석은 1898년 3월 20일 독립협회의 조직개편에 따라 새로 마련된 사법위원에 투표로 선출된 인물이다. 그는 또한 독립협회 대변지의 하나인 <황성신문>이 1898년 창간될 때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과 함께 자본을 모아 신문사를 설립하였고, 주주로서 신문사의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여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사법위원으로 활약하던 때는 독립협회 운동의 제3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간부진보다 일반회원이 주도하는 민중주도기였다. 사법위원이라는 간부직에 선출되면서 독립협회에 참가하기는 하였지만 강화석의 서울에서의 독립협회에서의 활동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 있지 않아 민중에 의해서 주도되는 독립협회의 제4기 조직개편이 이루어지고 강화석도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용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독립협회의 총대의원의 한 사람이면서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서울보다는 주로 인천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화석과 영어학교의 개설

1845년 평남 중화군 출생인 강화석이 가톨릭에 입교하게 된 것은 베르뇌 주교가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을 주요 선교지역으로 삼아 포교하였던 때의 일이다. 1865년에 베르뇌 주교에게 영세를 받아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된 그는 1866년 무렵 병인박해가 계속되자 1870년 중국으로 들어가 공부하면서 리델 주교를 도와 ????한불자전(韓佛字典)????을 편찬하는데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후 12년간 청국에서 체류하면서 서양학문을 공부하였고, 부산, 일본 고오베(神戶), 상해를 오가며 일어와 영어를 배우고 1882년 민영익(閔泳翊), 묄렌도르프와 함께 상해에서 귀국하였다.

인천해관 

능통한 어학실력으로 1883년에 해관이 설치되면서 방판(幇辦)에 임명되면서 처음 관직에 나간 그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887년 3월 17일 교섭아문(交涉衙門)의 주사 직급으로 인천 해관의 방판에 임명된 뒤부터의 일이다. 1896년 개혁법령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이 제정·공포됨과 함께 한성재판소의 판사로도 임명되었던 그는 곧 개항장에 새로 경무청관제가 실시되자 제물포 경무관(警務官)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897년 9월에는 인천항 감리 겸 부윤으로 임명되었다. 인천감리가 학교장을 겸임하게 된 학교관제에 따라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漢城外國語學校 仁川支校, 인천상업학교의 전신)의 교장직을 맡은 것도 이때다. 그러나 그가 인천항 감리로 부임한 기간은 고작 3개월 정도였다. 그가 징계를 받고 갑자기 감리에서 해임된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을 경무관으로 채용한 것에 반감을 품은 경무사(警務使)와의 알력 때문이었다. 1897년 12월 31일 관직에서 물러난 강화석은 곧바로 이듬해인 1898년 3월에 독립협회 사법위원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천항 감리에 있을 때 받은 그의 징계는 1898년 4월 10일에 풀렸고 그는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된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6. 10)을 거쳐 외부(外部) 참서관(參書官)(7. 5)으로 한동안 일하다가 1900년 2월 6일 농상공부로 전임하여 1907년 무렵에도 서기관으로 재직하였다. 1906년에 무렵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에서 별도로 발간하던 <보감(寶鑑)>에 '법률문답'이라는 고정란의 필자로 참여하였다.

통감부 하에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던 이 무렵에 그는 또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에서 활동하면서 교육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06년 10월 창립된 서우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이 학회가 1908년 1월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개편된 후에도 평의원으로 계속 활동하는 동시에 이 학회에서 세운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西友學校의 후신이자 五星學校의 전신)의 설립자 겸 교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1909년 무렵에는 뮈텔 주교의 청에 따라서 천주교 종현성당에서 세운 계성보통학교의 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 때의 경험으로 그는 1908년에 <부유독습(婦幼獨習)>이라는 아동 및 여자교육용 한문교과서를 집필하였고 이 책은 학부에 의해 압수되기도 하였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17년에 갑자기 쓰러져 아들을 따라 황해도 수안에서 살다가 1926년 3월에 영면하였다.
 


 요한 강화석(姜華錫)

다소 길게 강화석의 경력을 소개한 이유는 그가 인천박문협회와 깊은 관련이 있을 뿐더러 박문학교의 설립에도 중요한 산파 구실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기 영세를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능통한 외국어와 해외경험을 통해 선진 개화사조를 일찌기 체험한 지식인이었고, 인천을 주무대로 활동한 외교관이자 행정가였으며, 1898년 독립협회에 관여한 이후로는 계몽운동에 참여하면서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간 인물이었다.

1887년 인천 해관에 근무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은 그는 1897년 말에 갑자기 인천항 감리 겸 부윤에서 면직되면서 1898년 독립협회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때부터 그는 계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특히 교육을 통한 근대적 사상과 문물의 전파에 노력하였을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의 신앙인 천주교 전교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가 독립협회의 운동과 그 취지를 같이 하는 운동을 인천에서 전개하기 위해 고심했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때문에 주일날 모여서 연설회를 개최하고자 목적한 인천박문협회의 설립은 그에 의해서 주도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이자 동시에 박문학교 설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기사가 <독립신문> 1898년 7월 25일자에 게재되었다.

 

학교 셜립

인쳔 박문회에셔 공의 하고 본 회관에다 샤립 영어학교를 셜립 하기로 작뎡 되엿는데 학교쟝은 본 회쟝이 겸대 하고 학도는 본 회원으로 하야 월연금을 이젼 보다 배로 내여 등유비를 보용케 하고 다른 학비는 업스며 교샤도 월급이 업고 명예로 하는데 회원즁에 영어 하는 해관 방판 리학인 강쥰 냥씨가 교샤를 하야 이달 이십 오일 브터 매일 오후 칠시에 영어를 갈으친다더라.

 

인천박문협회의 설립 취지에서 이미 학교 개설에 관한 강한 지향을 엿볼 수 있었는데, 협회 설립 후 몇달 지나지 않아 인천박문협회는 학교를 설립하였음을 위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학교는 협회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였으며 매일 오후 7시에 수업하는 야간학교로 설립되었다. 보통 교육을 실시하는 초급 학교라기 보다는 지역 사회를 이끌어가는 학식 있는 지식인들이 영어를 배우는 외국어학교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인천박문협회의 회관을 학교로 삼아 회장이 곧 교장이고 교사도 회원인 인천 해관의 방판 이학인과 강준이 월급도 없이 명예로 가르치는, 정식학교라고 하기엔 부족한 조그만 학교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해관 방판들이 인천박문협회의 회원이며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해관 초기부터 방판으로 활동했던 강화석의 강한 영향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나 교사 강준(姜準, 바오로)은 강화석의 독자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인천항 사립박문학교의 설립자 중 한 분이다. 이 점에서도 인천박문협회는 독립협회의 회원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강화석이 주도하여 그의 연고지인 인천에 설립한 단체였으며, 그 회장도 강화석이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천박문협회에서 설립한 이 사립 영어학교가 바로 사립 박문학교의 전신이자 그 기원의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박문학교의 학교 명칭은 바로 독립협회의 자매단체로 활동하던 인천박문협회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의 교사로 참여했던 강준이 후일 인천항 사립박문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이 학교와 뒷날의 사립박문학교가 전혀 별개의 학교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박문학교 연혁지 

그러면 우리는 박문학교의 개교를 지금까지 알고 있던 1900년 9월 1일이 아니라 1898년 7월 25일로 봐야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1898년이 박문학교의 개교 연도임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또 하나 있다. 해방직후인 1948년 6월에 발행된 <경향잡지>의 19면 회보란에는 인천박문학교가 4월 28·9 양일간 창립 50주년 행사를 거행하였다고 보도하였다. 1948년이 50주년이 되려면 1898년에 개교했어야 한다. 박문협회 학교와 창립 연도가 같은 셈이다. 그러나 위 기사에는 창립일이 4월 28일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박문협회의 영어학교가 개교한 7월 25일과 차이가 있다. 더 이상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더 이상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다.

자료가 없는 현재로선 1898년의 영어학교나 위의 50주년 기념식을 학교의 정식적인 출발로 보기에는 다소 주저된다. 박문협회의 영어학교는 보통 교육을 담당하는 사립박문학교와는 그 성격이 같지 않고,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도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들 자료를 통해서 ‘박문’이라는 학교 명칭이 이미 1898년에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통 교육을 담당하는 뒷날의 박문학교와는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그 모태가 되었던 학교가 이미 1898년에 분명하게 설립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학교는 박문학교의 전신이자 그 맹아로써 교육사뿐 아니라 인천지역사에 소중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보통교육을 통한 전교를 목적으로 했던 제물포 본당 내의 지속적인 학교 개설 움직임과, 독립협회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인천에서 전개된 인천박문협회의 독립자강 사상의 구현인 영어학교의 설립은 박문학교를 떠받치는 두 주춧돌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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