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불신의 구조와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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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불신의 구조와 뿌리
  • 이창수 법인권사회연구소 준비위원장
  • 승인 2014.09.05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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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의 법과 인권 이야기] 2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잇단 선거 패배와 정치적인 역량의 부재의 원인을 두고 잘 나가는 논객들의 논쟁이 뜨겁다. 강준만 교수는 “싸가지 없는 진보”를 통해 진보세력이 국민을 낮게 보는 도덕적인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며 싸가지 없는 태도를 지적했다. 진중권 교수는 새누리당에 정치의제를 선점 당해 “국민에게 내 놓을 메시지의 부재”를 지적했다. 강 교수는 잘난 척하는 태도를, 진 교수는 참신한 정책의 부재를 문제 삼았다. 그런데 이들의 논쟁은 선거에 패배한 진보 세력이 있다는 사후적인 분석에 불과하다. 둘 모두 유권자에게 잘 보이는 법을 제시했는데 강 교수는 소비자 고객인 국민 존중 경영을 하라고 주문한 것이고, 진 교수는 혁신적인 신제품을 내 놓으라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새누리당은 싸가지가 있고 국민에게 전할 메시지도 있어 승리했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선거 공학적인 얘기고 정당 입장에서 서술한 약장수 같은 진단이다. 국민의 참정권의 입장에서 한국 정치를 보면 정당정치의 붕괴가 더 본질적인 문제다. 국민들은 정신 불신을 넘어 분노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정당정치가 불신 받는 원인을 생각해 봤다. 그저 비판하고 반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정치적인 꼼수도 이젠 청산해야 하는 생각도 든다. 곱씹어 생각해도 한국의 정치는 잘못되었고 정당은 주식회사처럼 사익을 추구하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사악하다. 정치를 보자. 집권 새누리당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는 조사위원회의 설치를 반대하며 제시한 논거는 우리 법체계에 맞지 않는다는 게 전부이다. 이런 논리 자체는 추상적인 원칙론을 말한 것이지만 경청할 만한 측면이 있다. 새정치민주연합도 이런 법체계 부합론 입장을 전제로 세월호 특별법 협상 벌이다가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혹독한 비판으로 옹색해 졌다. 여야 할 것 없이 ‘논리’의 추상적 함정에 빠져 있다. 정치는 없고 추상적 논리와 공허한 공방만 있다. 정치의 민주적인 조정 능력이 우리 현실 정치에는 없다. 정치가 한참 잘못되었다.

 

또 정당은 어떤가? 정당을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하는 국민의 자발적인 조직으로 정의한 정당법의 규정도 허술하지만 이런 법전상의 정당도 현실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정당은 정치적 주장과 정책을 추진하고 공직선거에 후보를 추천 또는 지지하는 방법으로 국민의 이익을 실현하게 된다. 이런 정책은 공약이나 당론이라는 형식을 빌려 중앙과 지역의 의회 기구를 통해서 제도화된다. 결국 국회, 광역과 기초 의회 의원과 대통령 및 지방자치단체 장이 국정을 독점한다.

 

정당은 사실상 이들 공직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관철시키는 장에 불과하며 이들은 다시 공천을 받기 위해서 당원과 특정 지지 세력과 협력적인 공존을 한다. 당내 민주주의는 오로지 공직 후보로 추천받기 위한 이들 간의 투쟁을 의미할 뿐이다. 선출직 공직자와 자당 당원 등과의 협력적인 공존으로 인해 실질적인 국민의 지위로 정당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거의 없다. 정당에 대한 비판 여론은 언론에서 사라지는 순간 무의미한 메아리가 된다.국민 배제의 논리가 정당 운영에 항상 있다.

 

이런 공당이기 보다 그들만의 이익집단 성격의 이런 사당은 국민을 주권자(주인)에서 유권자(구매자)로 전락시킨다. 협력적인 공생은 결국 지식과 논리를 통해서 분칠한 불량 정책 상품을 만들어 낸다. 주권자는 주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파당들의 함량 미달 정책이나 후보를 선택하든지 말든지 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한국의 정당은 마치 영리 회사와 같고 현재 권력을 맡고 있는 자들은 대주주이고 당원과 당료 그리고 지지세력 일부는 소액주주가 된다. 이런 파당들은 다른 파당과의 ‘적대적인 공생’을 통해서 사적인 이익을 은폐한다. 즉 끝없이 싸울 수 있는 표적 세력을 필요로 하고 적대적인 정치집단의 존재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집권당과 야당의 적대적인 공존 구조가 존재하는 한 국민은 정치에서 배제된다.

 

그래서 국민은 이런 정당과 이런 정당정치를 불신한다. 일부 언론은 국민을 대변한다면서 정치적인 무관심과 염증을 조장하여 선거권을 행사하지 않는 ‘유권자’를 양산하는데 앞장섰다. 이 언론들은 국민을 위한 정치와 정당정치의 복원을 위한 정당법,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의 개혁보다는 현상유지를 의도하는 기득권 세력의 편에 서서 파당들의 적대적 공생 구조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보조세력으로 역할을 한다.

 

한국의 정당은 민주적인 조정 능력이 없는 정치 부재의 모래 위에 선출된 권력자들이 주도하는 독점과 과점의 정책형성 구조를 가졌다. 이런 구조를 형성하는 실질적인 힘이자 그 수혜자인 정치인들은 어떤가? 우리 정치인들이 무능하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명백한 오판이다. 무능한 정권과 무기력한 정치인은 현실 정치에서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사악하기도 하고 법과 원칙의 장막 뒤에 숨어 현실을 왜곡하는 파렴치한 같은 행태를 보인다고 해야 한다.

 

대통령은 경제 회생에 발목을 잡는다고 의회 특히 야당을 탓하면서도, 세월호 특별법 문제, 사병의 자살과 구타 사망 사건이나 군 고위지휘관들의 기강해이 등에는 입을 닫고 있다. 집권세력이나 대통령이 정치적인 현안을 풀 의지도 없거니와 국민 통합 보다는 광적인 지지자들의 감언을 국민의 뜻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제왕의 의식이지 국민의 대리자로 국민 주권을 실현할 민중에 의해 통제된 집정관이 아니다. 국회의원이 철도 비리와 관련해 현금을 수수하고도 대가성이 없다며 뇌물죄를 부인하는 주장을 하고 동료의원들은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는 행태를 보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정도로 사악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국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할 정치적, 법적 책무를 갖고 있는 정치인들은 국민이 불신하는 원인을 스스로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정치 관계 법률의 개정을 통한 정당과 선거 제도 개혁은 번번히 실패했다. 개혁의 대상인 현재의 정당과 그 구성원들이 바로 현재의 부당한 선거 제도를 통해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로 보면 정치권력자(선출직 공직자)들의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정당정치와 대의주의를 동일시하고 이를 통해 정당은 민주주의 꽃이라는 추상적인 지식을 만들어 냈으며 그런 연장선상에서 정당은 공직후보자를 추천하거나 지지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신화를 재생산하고 있다. 정치 부재 상황에서 사적인 이익 집단처럼 되어 버린 정당, 그리고 사악하고 교활한 특권의 정치인들이 가진 정치기술들은 역사적으로 누적되고 관습화된 정치 의식과 관행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사회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국민을 주권자가 아니라 왕의 노예인 신민으로 간주하던 전근대적인 정치관의 유습을 청산하지 못했다. 지금도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또는 국부로 간주하는 경향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또 국민을 후견적으로 지도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이른바 한국적인 민주주의 궤변을 신봉하는 집단의 광기를 청산하지 못했으며, 민주주의를 쟁취한 뒤 정당은 정권을 잡으려고만 했지 진정한 국민주권을 실현할 개혁을 강력하게 수행하지 못했다. 잘못 형성된 신념과 한번 경험한 잘못된 정치제도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소명의식을 갖고 과거와 단절하고 민주질서에 맞는 정당제도로 혁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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