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00대 명산 1위, 지리산 겨울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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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00대 명산 1위, 지리산 겨울 종주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5.01.0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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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시민기자의 한국기행]


 

지리산의 높이는 1916.77m이다.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렀고, 또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는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 등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이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6.77m)을 주봉으로 하는 지리산은 서쪽 끝의 노고단(1507m), 서쪽 중앙의 반야봉(1751m) 등 3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100여 리의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한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흘러내리는데, 하나는 낙동강 지류인 남강의 상류로서 함양·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멀리 마이산과 봉황산에서 흘러온 섬진강이다. 이들 강으로 화개천, 연곡천, 동천, 경호강, 덕천강 등 10여 개의 하천이 흘러들며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로 ‘지리산 12동천’을 이루고 있다.

지형은 융기작용 및 침식·삭박에 의해 산간분지와 고원·평탄면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어 있다. 최고봉은 섬록암(閃綠岩)으로 되어 있고 주변은 화강암·화강편마암의 지질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등 유서 깊은 사찰과 국보·보물 등의 문화재가 많으며, 800여 종의 식물과 400여 종의 동물 등 동식물상 또한 풍부하다.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흙이 두껍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적당하다. 산속에는 100리나 되는 긴 골이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쪽은 넓어서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이 있고, 나라에 세금도 바치지 아니한다. 지역이 남해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온난하여 산속에는 대가 많고 또 감과 밤이 매우 많아서 저절로 열려 저절로 떨어진다. 기장이나 조를 높은 산봉우리 위에 뿌려두어도 무성하게 자란다. 평지의 밭에도 모두 심으므로 산중에서는 섞여 산다. 중이나 주민들이 대를 꺾고, 감ㆍ밤을 주워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생활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농부와 공장(工匠)이 노력하지 않아도 살 만하다. 이리하여 이 산에 사는 백성은 풍년ㆍ흉년을 모르므로 지리산을 두고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이중환의 말처럼 지리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육산이다. 그래서 조용헌은 골산(骨山)과 육산(肉山)을 빗대어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처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남원의 동쪽에 자리한 지리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은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하였다 하여 유(流) 자는 유(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 한다. 또 지리(地理)라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의 시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의 주(注)와 통감(通監) 집람(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라고 한 곳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南岳)을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다.

산 둘레에는 십 주(州)가 있는데, 그 북쪽은 함양이요, 동남쪽은 진주(晋州)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한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깎은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의 천왕봉과 서쪽의 반야봉이 가장 높으니 산허리에 혹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뇌성과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모여드는데 열군(列郡)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태을(太乙, 북극의 신)이 그 위에 살고 있으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백두산에서 비롯한 백두대간이 끝나는 산이다. 이중환은 지리산을 전국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았다.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조선 중기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병년과 흉년이 없는 피난, 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에는 혁명을 꿈꾸다 실패한 동학도들이 찾아와 후일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지리산에 들어와 1차, 2차, 3차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고, 진주형평사운동(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을 배후 조종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김단야 같은 사람은 조선공산당을 만들기도 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지리산에 들어와 수없이 죽어가고 포로가 된 비운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나라의 지리산은 스페인 내전 당시 파르티잔들이 활동했던 무대와는 판연히 달랐는데도 지리산으로만 가면 살 길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수없이 들어왔다가 죽고 만 한이 서린 산이다. 지리산은 한민족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 그 이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지리산 남쪽에 하동군 화개와 악양동이 있다. 고려 인종 때에 기인이었던 한유한은 처음에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이자겸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장차 나라에 환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으로 숨어들었다.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아껴 사방으로 찾았으나 그는 숨어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했는데, 훗날 지리산의 화엄사ㆍ연곡사ㆍ신음사ㆍ쌍계사 등에서 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신라 말기의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의 도를 이어받아 세상 사람들이 삼신산이라고 부르는 금강산ㆍ한라산ㆍ지리산을 신선을 따라 오가면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화개동과 악양동이 그의 피신처였다고 한다. 수많은 문신들이 금강산과 더불어 이곳 지리산을 찾았다. 그중 조선 초기의 학자인 김종직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천왕봉에 올랐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새벽,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느라고 노을빛이 눈부시다.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옷자락을 걷어붙인 후 석문을 거쳐 오르는데 밟히는 풀과 나무마다 얼음이 맺혔다. 성묘(지리산 여신묘)에 들어가 다시 잔을 올리는데 천지가 맑게 개어 산천이 활짝 열린 것을 사례하였다. 그런 후 북쪽 봉에 오르니 비록 나는 기러기라도 우리 위로 날지는 못할 것같이 높이 오른 것이다.

마침 새로 갠 날씨여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창창 망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일행에게 물었다. “먼 곳을 보는 데에 요령이 없으면 나무꾼들이 바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선 북쪽을 본 후에 동쪽을 보고 그다음 남쪽, 서쪽을 보되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눈을 옮기면서 보아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이 산은 북으로 남원에서 뻗어 여기까지 이른다. 첫 봉우리가 반야봉이며 동으로 200리를 뻗어 우리 서 있는 봉우리에 와서는 다시 북으로 서리다가 끝난다. 그 사면이 솟고 뻗은 지붕과 골짜기는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셀 수가 없다. 끌리듯 둘러친 성은 함양성인 것 같고, 청ㆍ황빛으로 무지개처럼 가로지른 것은 진주의 강물이며, 물 고동이 점을 찍어 비끼듯 솟은 곳은 남해 거제의 여러 섬이 아닌가 싶다.

산음, 단계, 운봉, 구례, 하동 등의 현은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여러 산은 혹 작은 언덕 같기도 하고, 용이나 범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를 괴어놓은 것 같기도 하며, 칼날 같기도 하다. 계립령 이북은 푸른 기운이 하늘 가득하고 섬 이남에는 바다 기운이 하늘에 잇닿아 시력이 끝까지 미치지 못하여 더는 분별할 수가 없어 대충 알 만한 것을 적어놓게 하고는 “예로부터 이곳에 오른 자는 있었겠지만 오늘 우리처럼 통쾌하게 본 사람이 있겠는가?” 하며 자축하였다.


그 뒤로도 김일손, 조식, 유몽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답사한 뒤 기행문을 남겼으며 화담 서경덕은 지리산 반야봉에 올라 그 정상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반야봉은 지리산 최고봉이다. 이날은 청명하여 엷은 구름까지도 모두 씻은 듯하여 만 리가 탁 틔었는데, 해는 저물고 길은 멀어서 마침내 봉우리 위에 묵게 되었다. 밤에는 별과 은하수가 깨끗하고 맑았으며, 조각달이 밝아 나무 우거진 골짜기를 맑게 비치어, 맑은 기운이 자욱하게 솟아나는 듯하였다. 동편에 아침 해가 뜰 무렵이 되자 희미하던 여러 산봉우리들이 점점 모두 드러나서, 태초에 자욱하던 기운에서 천지 만물이 생겨나던 때도 반드시 이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되어 이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지리산은 우뚝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

올라가보매 마음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험한 바위는 장난한 듯 솟아 봉우리들 빼어났으니

아득히 넓은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리

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 일으키고

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산은 다만 나를 위하여 구름과 안개 맑게 하였으니

천 리 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일세
 

근현대에 접어들면서도 지리산은 이병주의 『지리산』, 문순태의 『달궁』, 서정인의 『철쭉제』,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숱한 소설 속 배경이 되었고, 김지하ㆍ고은ㆍ이시영 등이 지리산을 주제로 많은 시를 남겼다.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 경계에 솟아 있다. 해발 1915미터로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다. 지리산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그중의 한 곳이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인데, 10킬로미터에 이르는 그 길은 지리산 산행 중 힘든 코스의 하나다.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숲에 가려지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은 팍팍하기만 하다. 1970년대 말 가을, 화엄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산길을 오르다 떡 벌어진 으름들이 빼곡하게 열린 으름 밭을 만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올라가기에 바빠서 그런지 눈길도 안 주고 부산하게 오르기만 하고, 우리 일행만이 처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배가 부르게 따서 먹었다. 가슴 답답하고 힘겹게 오르다 노고단에 올라서 바라보는 끝없이 펼쳐진 백두대간과 지리산 아래를 흐르는 섬진강의 위용은 성삼재에서 금세 올라와 바라보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데도 사람들은 편리에 길들여져 힘든 그 길을 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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