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 아니라 불관용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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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이 아니라 불관용이 먼저다
  • 권영숙 교수(서울대/민교협 노동위원장)
  • 승인 2015.01.27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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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교협의 정치시평]
기아차 비정규직 윤주형 열사2주기 추모제가 열린 대한문 앞 (권영숙 선생 페이스북에서)

어떤 사회나 부패하고 부후화되고 퇴행적이고 반동적이고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측면은 있다. 그리고 각 사회마다 그를 인내하지 않는 불관용의 수위라는 것이 있다. 이 이상은 도저히 안돼!라고 보는 수위 말이다. 그 수위는 사회적으로 결정되고 역사적으로 축적된다. 그 사회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권력이든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인내의 한계, 그 사회가 도저히 인내하지 못하고 처벌해야하고 관용하지 말아야하는 수준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관용의 문화를 찬양하지만, 나는 '관용'이 아니라 '불관용'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불관용, 즉 어떤 행위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고 용납되지 않고 단죄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용불허의 행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용할 수 없는 언행들에 대해서 응분의 처벌이 따르고, 그리고 사람들은 그 기준을 내면화한다. 그렇게 해서 불관용은 관용의 범위를 결정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관용보다 불관용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불관용이 없다면 '관용' 도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관용은 불관용의 사실상 결과물일 뿐이다. 사람들은 '똘레랑스(관용)'의 문화라는 프랑스의 문화를 아주 낭만화하곤 하지만, 프랑스든 어디든간에 한 사회의 똘레랑스의 수준은 그 사회의 불관용의 한계에 의해 정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회에 관용의 문화가 깃들어 있다면, 잘 정착되어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 사회가 관용하지 않는, 즉 불관용하는 행위를 분명히 정식화하고 그에 대해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반드시 처벌하기 때문일 것이다. 되는 것은 되고 안되는 것은 안돼!를 명확히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을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관용과 똘레랑스는 사회적인 것이다. 개인의 도덕적 강제나 양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사회적 압박과 강제로서의 불관용이 또하나의 사회적 강제로서의 관용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용의 문화 이전에, 관용의 미덕 이전에, 불관용의 문화를 먼저 세워야한다.

불관용의 문화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으로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문화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절대 안돼! 절대 하지마!의 사회적 공감속에 사실상 이른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이 나오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나오고, 차이에 대한 긍정이 나온다. 소수자를 고립시키고, 약자를 괴롭히고, 차이를 무시하고, 개인의 고유성을 묵살하는 잔인함과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적 분위기는 그런 행위를 용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그런 행위들을 '관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폭력, 언어폭력, 성희롱에서부터 장애인과 성적 소수자들, 이주민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보호해줄 불관용의 장치다. 그들을 대상으로 하지 말아야할 짓들, 언행들, 호칭들, 욕설들을 사회가 금기시하고 부정하고 비판하는 시선과 목소리 말이다. 이것을 나는 ‘사회적 올바름’(socially correctness)이라고 부르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들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을 명료히 정식화하고 사회적으로 준엄한 잣대를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사회적인 처벌의 문턱을 높여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 사회는 관용의 문화인가! 아니다, 반대로 묻자. 우리 사회는 불관용의 문화를 확립했는가! 우리 사회는 무엇을 불관용하는가, 어떻게 불관용해야 하는가, 그리고 관용하지 말아야할 것들에 대해서 관용을 정말 베풀지 않고 있는가! 즉 개인이든 집단이든 권력이든, 절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불관용의 잣대를 제대로 세웠는가! 어떤 행위는 도저히 용서되지 않고 용납되지 않으며 그래서 단죄하고 처벌함으로서 불관용의 기준을 올곧게 세웠는가!

아마 부정적인 답변이 우세할 것이다. 이 사회는 전혀 불관용을 정식화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절대 안돼!라는 사회적 기준을 명료히 하고, 이를 개인이든 집단이든 권력이든 모두에게 절대 허용하지 않는 그런 불관용의 잣대를 세우지 못했다. 어떤 이에게는 안되는 일이 어떤 이에게는 너무도 쉽게 가능하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즉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올바름’에 대한 기준도 없다.

범죄행위에 대해서마저 가해자의 논리가 판을 친다. 가해자에 대한 관용적 목소리가 넘쳐난다. 예컨대 성폭력에 대해서 터무니없이 낮은 형량, 그리고 가해자를 비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법원의 판사마저 피해자 중심주의를 잊어버리란다. 참으로 편의적이고 근거없는 정상참작의 논리가 난무한다. -가장이라서, 사회적으로 공헌한 자라서, 수출산업의 주역 재벌이라서, 나아가 사회지도층(즉 출세한 자)라서 등의 관용의 핑계만 들이댄다.

하지만 관용은 이들에게만 주어질 뿐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와 서민들은 불관용이 오히려 익숙하다. 노동자들은 헌법에 보장된 파업권을 행사해도 어떤 빌미를 잡아서라도 불법파업으로 불관용하고, 그리고 파업 한번의 후과로 온갖 돈으로 하는 압박과 재산상의 불이익 등으로 끝까지 불관용한다. 철거민들은 도시개발업자와 중산층의 아파트 욕심에 자신들의 주거권을 박탈당하지만 그들이 하는 최소한의 저항은 불관용된다. 그에 저항하며 망루를 오른 자들에겐, 조금의 타협하고 교섭할 시간조차 허여되지 않은 채, 용역과 경찰의 합동 몰이로 죽어갈 불관용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제주 강정마을과 밀양 송전탑 건설예정지 아래 마을들의 원주민들 역시 도시로 보내는 전깃줄에 자신들의 주거 생명권이 위협당한다고 하는데, 그들을 관용하긴 커녕 젊고 건장한 의경들과의 불관용의 몸싸움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당신들의 삶의 터전을 이리 훼손해서 미안하다고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말해야할 것 같은데, 이들이 내몰리는 불관용의 대상이 돼버린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관용은 지배자, 가진 자, 출세한 자의 몫이고, 불관용은 못가진 자, 서민, 낙오자들의 것이 된다.

하지만 반대였어야 했다. 관용의 방향과 불관용의 방향이 반대여야 한다. 돈 있고 힘 있고 출세한 자들에겐, 그들이 타인에게 그만큼 피해를 주고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엄정한 잣대, 즉 불관용의 기준을 들이대야 하고, 가진 것 없고 기댈 데 없고 힘없는 자들에겐, 그들이 불관용 앞에 그만큼 취약하기에 더욱 폭넓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있는 자들에 대한 관용은 무한대로 넓어진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에서 연유할까.

아마 누구는 이것을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혹은 이 사회 기강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도 할 것이다. 다 맞는 말이다. 구태의연하지만 맞는 말이다. 역사를 바로 잡지 못했고 기강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권력자들의 부정과 부패, 그들의 주권 짓밟기를 단죄하긴 커녕 관용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일제 부역자의 청산을 하지 못한 ‘반민특위’의 실패를 흔히 생각하겠지만 내 생각엔 멀리 갈 것 없다.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최근의 역사도 바로잡지 못했는데 무슨 일제 부역자 청산까지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역사는 이 정권과 집권여당의 뿌리이기도 한 80년 쿠데타 세력의 단죄와 처벌이다. 그 80년의 역사, 광주항쟁을 짓밟으며 피를 뿌리며 등장한 군부출신들의 정권, 그리고 지금 새누리당 정권의 전신인 민정당 정권에 대한 말이다. 쿠데타 주역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형을 제대로 살지도 않았다. 변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범법자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대통령의 예우를 자유주의 정부시절에도 호사스럽게 받았다. 뭐, 그들에 대한 사면복권조처를 단행한 것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였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 그 때의 관용이 결국 이후에 권력자가 무슨 짓을 해도 다시 살아남는, 그리고 호위호식하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아닌가!

또한 사회적 기강 역시 무너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너무도 어울리게, 재벌들은 모든 법망을 빠져나간다. 법의 단죄를 받는 순간에도 그들은 ‘법앞에 만인의 평등’을 비웃으며 특별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유죄판결을 받아도 감옥에서도 호화감옥, 그리고 감옥이 아니라 병원으로 직행한다. 병보석으로 바로 풀려난다. 이런 사회적 기강이니, 어찌 불관용의 문화를 제대로 세울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이건 절대 안돼!를 통해서 관용의 폭을 결정지을 수 있었겠는가. 관용에 대해서 엄정한 잣대를 댈 수 있었겠는가. 결국 복불복이고, 자기 하기 나름이고, 가진 것, 그리고 시쳇말로 빽(연줄) 나름이다. 관용은 있는 자들의 것이 되고, 불관용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을 상대로 한 불호령이 되고 철퇴가 되고, 엄정한 법집행이 되고, 그들을 일시에 사회적 불순세력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정의는 멀어지고 권력은 폭력적이다.

그러므로 관용의 문화를 부르짖고 싶다면, 먼저 무엇을 불관용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불관용해야 할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프랑스의 똘레랑스가 그리도 부러우면, 우선 우리 사회에서 관용하지 못할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 그러면 관용해야 할 것들이 잡힌다. 절대 안되는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 된다는 것을, 사회적 약자뿐 아니라 권력자들 가진 자들에게도 균등히 적용시킬 때, 제대로 된 불관용의 문화가 정립된다.

당신은 지금 이 사회에서 무엇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가, 불관용해야겠는가. 이 사회에서 가장 부패하고 부후화되고 퇴행적이고 반동적이고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그래서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들로 한국사회는 ‘사회적 올바름’을 구성해야 한다. 우리가 도저히 인내하지 못할 것들에 대해서 불관용하고, 아니라고 거부하고, 그 짓거리를 하는 자들을 대장부터 수족까지 제대로 처벌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사회적 약자보다 권력자에게 더 가혹한 불관용의 잣대를 들이대고 실제의 처벌을 가할 때, 그래서 안되는 것은 안되는구나라는 기준을 정립할 때, 그 때 비로소 관용의 문화에 전제조건이 확보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불관용의 문화가 먼저 필요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관용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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