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한미통상조약 찬양하는 화도진축제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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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한미통상조약 찬양하는 화도진축제가 부끄럽다
  • 이희환 기자
  • 승인 2015.05.2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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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의 뜻 담긴 화도진을 기념하는 축제로 거듭나야
유정복 인천시장(조선 전권대사 신헌 분)과 이흥수 동구청장(부관 김홍집 분)이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약체결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이흥수 동구청장 페이스북)
 
인천 동구(청장 이흥수)가 5월 23~24일 이틀 동안 화도진공원과 동인천역 북광장 일대에서 제26회 화도진축제를 진행했다. 23일 저녁 화도진 축성행렬 시가행진으로 시작된 축제는 행령이 화도진공원 동원에 도착하자마자 미국대사관 공보관들을 초대해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조인식을 재현하면서 화려하게 시작됐다고 한다. 조인식 자리에는 최근 인천의 정체성 확립을 강조한 동구 출신의 유정복 인천시장과 중구에서 내리 시의원에 당선된 노경수 시의회 의장 등이 참석해 이흥수 구청장과 함께 조인식의 조선측 담당자로 서명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한다.

이틀간 진행된 화도진축제는 이날의 퍼포먼스를 제외한다면, 동인천 북광장에 무대와 천막을 설치하고 여느 축제에서 흔히 보는 유흥과 홍보와 먹거리로 꾸며진 축제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화도진축제는 수많은 기초자치단체들의 마을축제 가운데 하나지만,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끌어들여 이처럼, 역사적, 정치적인 홍보의 장으로 승화됐다. 그러나 동구청장에 의해 주도되고 시장과 시의장, 미국 대사관 공보관들까지 동원된 이날의 한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은 거짓된 역사를 과장된 정치적 이벤트로 연출한 허영의 산물일 뿐이다. 이를 위해 재정이 어려운 동구가 주민들의 세금을 도대체 얼마나 썼는지는 별도로 따져봐야 할 것이지만, 역사를 거짓으로 꾸며 화려한 거짓 조인식을 거행하고 거짓을 확대재생산 하는 행위가 백주대낮에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학계에서 아무런 비판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더 서글프다.

쇄국정책과 자주국방의 산물 화도진(花島鎭)

화도진축제는 1990년 지방자치제의 실시가 확정된 직후 정월대보름 행사를 확대해 동구의 축제로 시작된 마을축제이자 기초자치단체의 소박한 축제였다. 인천 동구의 화도진축제는 개항 직후인 1879년 인천 앞바다의 해안경계를 위해 설치된 화도진의 이름을 딴 축제로 올해로 26회째를 맞고 있다. 화도진은 대원군 섭정기에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잇따라 발발하고 또 1875년엔 영종도에 일본군이 무단상륙하는 운요호사건이 일어나자 수도 방어의 요충인 인천의 해방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1878년 고종의 지시로 어영대장 신정희가 축조해 포대와 함께 진사(鎭舍)를 1년간이 공사 끝에 1879년 7월 1일 완공됐다. 이때 화도진과 함께 서구에는 연희진이 함께 만들어졌다.

화도진은 대원군이 추진했던 쇄국정책과 군사정책의 산물이었다. 화도진이 세워진 데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까지 거슬러 올라간 충격적인 사건에 이어 1866년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침략과 외규장각 도서 등의 약탈(병인양요), 그리고 1871년 슈펠트 제독의 지휘 아래 로저스 제독의 아시아함대가 미 해병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신미양요 혹은 조미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6월 10일 강화 초지진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미 해병대의 강화도 침략은 덕진진과 광성보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거쳐 7월 3일 미 해병대가 철수하면서 끝났다. 광성보 전투로 인해 어재연 장군이 이끌던 조선군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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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 직후의 처참한 현장과 전투에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탈취해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신미양요는 미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사 항전해 이양선을 몰아낸 사건으로 인식됐다.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일본이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875년 영종도에서 운요호사건이 발발하고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화도진은 조일수호조규 체결 이후에 서양 외세의 침략과 이양선의 출몰에 대비해 수도를 방비하기 위해 마련한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고종의 친정체제가 들어서면서 별다른 대안 없이 지방군사력의 중추였던 각 진영을 해체하거나 축소하는 가운데 화도진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갑오경장의 와중인 1894년 10월 9일 폐쇄되었다.(조우성, [외세 막았던 최후의 수군 진영 화도진], <인천이야기 100장면>, 인아트, 2004 참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불타 버린 화도진이 다시 복원된 건 1982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에 의해서였다. 향토사학자 최성연 선생이 화도진 평면도를 남겨둬 이를 비탕으로 화도진을 복원했고,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인천시 지정 기념물 2호로 지정됐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 화도진으로 잘못 알려져

향토사학자 최성연 선생은 1959년 간행한 저서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미국 선교사이자 인천 내리교회 목사였던 존스 선교사가 1901년 1월에 <코리아리뷰>(The Korea Review)란 잡지에 쓴 '새로운 세기'(The New Century)라는 글을 근거로 조약 체결장소를 화도진이라고 단정했다. 이후 복원된 화도진 내에는 조약을 체결하는 모습을 담은 인물을 재현해놓은 상태다. 그러나 이후 학계에서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장소로 구 영국영사관이 위치했던 파라다이스호텔을 유력한 체결지로 주장하는 박철호 목사의 견해가 제시되면서 파라다이스 호텔에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라는 표지석이 들어서 있는 상태다.

이러한 혼란은 2013년 9월 구한말 세관사를 연구하는 김성수 서울세관 조사관에 의해 유력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장소를 보여주는 지도가 발견되면서 자유공원 내 석정루 바로 아래 위치한 오늘날의 ‘오리날다’ 음식점(옛 한국관) 자리가 거의 확정적인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서울세관 공무원인 김성수 씨가 지난해 발굴한 구한말 인천해관 문서 제물포지도. 지도의 D39 필지번호에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이다. (지도 제공=김성수)

김성수 씨가 발견한 제물포지도를 보면 좌측 화상조계(청국조계)와 일본조계 경계면 상단 부근에 정사각형 모양의 부지에 'D lot No 39'라는 고유지번이 있고, 오른쪽에 한자로 '稅務司公館'(세무사공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함께 'Commissioner's present residence'라고 병기돼 있다. 이와 관련, 구한말 미국공사로 활약한 알렌(H. N. Allen)이 작성한 연표를 보면1901년 4월 항목에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장소는 인천해관세무사의 관사터'라고 적고 있다. 이번에 바로 그 해관세무사 관사터가 지도를 통해 발견된 것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장소와 관련해 강덕우 인천시사편찬위 전문위원은 "새롭고 명백한 사실이 밝혀진 만큼 어떤 형태로든 전문가들이 모여 이를 비정하는 것을 놓고 논의를 벌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향토사학자인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도 지난해 <인천일보>에 이와 같은 사실이 보도된 직후 특종이라고 평가하면서 관련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문제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가 이처럼 새롭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시 문화재 당국이나 문화재청 등에서 이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강덕우 인천시사편찬위 전문위원은 <인천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롭고 명백한 사실이 밝혀진 만큼 어떤 형태로든 전문가들이 모여 이를 비정하는 것을 놓고 논의를 벌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가 확인된 후에도 역사관광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관할 구청인 중구청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상태다.

한미통상조약,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22일 조선이 서양 국가가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1882년 당시에는 인천해관장의 관사에 건물이 지어지지 않아 우선 조약 체결을 위해 급하게 천막을 쳐서 조인식을 가졌다. 이 자리는 특히 같은 해 6월 6일 영국과의 조약, 6월 30일 독일과의 조약도 체결한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영국 화보신문에 보도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면
 
위의 일러스트 삽화는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882년 9월 2일자에 보도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모습이다. 언뜻 보아도 참석자들이 위한 천정에 넓은 천막을 치고 체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도진에서 체결했더라면 화도진 본관 건물이나 적어도 그런 건물이 보여야 한다. 좌측에는 미국과 서양인들이 오른쪽에는 조선측 대표들이 참석해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체결 장면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연단 좌우에서 조인식을 지켜보고 있는 두 명의 중국인의 모습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당시 조선에 대해 여전히 종주권 행사를 하려 했던 청나라가 일본의 대륙진출을 막을 하나의 방편으로 서양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을 것을 <조선책략>(황준헌 저)으로 권하면서 맺은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체결과정에서 조선은 철저히 배체된 채 청의 이홍장과 미국의 슈펠트 제독간의 4차례 천진 회담을 통해 조약 체결과 내용이 결정된 조약이다. 네 차례 회담 기간 동안 조선 관리는 참석조차 하지 못했고 슈펠트 제독을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고 한다. 조약의 내용이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으로 체결되는 것도 또한 당연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 바닷가의 임시장막에서 거행된 조인식에는 조선 전권대사 신헌과 부관 김홍집이 나섰고 미국은 전권대표 슈펠트가 나서 한문3통, 영문3통으로 된 조약에 서명했다. 전문 14개 조항으로 구성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내용은 미국에 대해 최혜국대우권을 삽입한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다. 조선은 미국에 개항장 설치권, 영사재판권, 관세협정권, 외국화폐통용권, 내지통상권, 연안무역권, 군함정박권, 기독교포교권를 비롯해 다른 나라와의 통상조약에서 새롭게 조선이 내준 권리를 미국에도 최혜국으로 인정해주는 최혜국대우권까지 부여했다. 그러나 조선은 미국에 대해 이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불평등조약이 바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다.(김정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이권침탈], <역사비평> 19, 1992년 여름호 참조)

우리 사회에 만연한 숭미주의 보여준 화도진축제

이처럼 화도진의 정체성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동구청은 화도진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는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이를 근거로 축제를 홍보하고 심지어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동구 길거리에 내거는 과도한 '성조기 마케팅'을 벌여 시민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동구청은 끝내 화도진축제 공식행사로 한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을 재현하는 행사를 유정복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다. 5월 22일 저녁 어영대장 축성행사를 마친 행렬이 화도진 동헌마당에 이르면 당시의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하고 미국 국가를 연주하면서 축포 21발을 발사해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을 축제 형식으로 재현했다.
동구는 화도진축제를 홍보하면서 동구 거리 곳곳에 성조기를 내걸었다.

이 행사를 위해 동구청에서는 슈펠트 제독과 쿠퍼 함장을 대역할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주한미국대사관에 발송했고 미국 대사관에서 공보관들이 참석한 모양이다. 이흥수 동구청장은 조인식 사진을 자신의 SNS에 자랑스럽게 올렸을 뿐만 아니라 내년부터는 리퍼트 주한미국대사가 참석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가 화도진이 아닌 자유공원의 ‘오리날다’ 음식점이라고 밝혔던 <인천일보>는 동구청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 기사화하기도 했다.

인천 역사학계도 침묵하고 있다. 동구의 역사를 재현하겠다며 시작된 화도진축제가 오히려 동구의 역사, 화도진의 역사를 가려보리고 '한미수교기념축제'로 변질된 것이다. 서양외세를 배격하기 위해 만든 화도진에서 불평등조약을 강요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걸 축포까지 쏘아 올리며 숭미주의에 열을 올리는 메인 행사로 만든 동구청장과 여기에 조인식 조선인 관리로 나선 유정복 시장은 과연 제 정신인가? 지하의 어재연 장군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동구과 인천시는 더 이상 부끄러운 소식에 밖으로 확산되기?전에?화도진축제의 개막일인 5월 22일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일을 기념해 제정한 ‘동구 구민의 날’부터 바꿔야 한다. 이와 관련해 인천시 기념물2호로 지정된 화도진지(花島鎭址)의 역사적 가치를 감안해 화도진이 창설된 7월 1일을 동구 구민의 날로 삼는 것이 좋겠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화도진은 고종시대 들어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그리고 1875년의 운요호사건 등을 겪으면서 자주국방을 위한 해안방비책의 하나로 1878년 어영대장 신정희(申政熙)로 하여금 수도 방어의 요충지인 인천에 포대와 진사를 새로 짓게 해 1년만인 1879년 7월 1일 완공됐다. 화도진에서 체결되지 않은 한미수호통상조약을 기념하는 것보다 화도진지 그 자체를 동구의 역사적 자원으로 기리고 재해석하는 관점으로 축제를 전환해야 한다.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화도진도>와 함께 서세동점의 침탈의 시대에 맞섰던 조선의 자존심이 살아 있는 곳인 화도진을 되살려야지 거기에서 맺지도 않은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화도진 창설과 함께 제작된 군사지도 <화도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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