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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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 이한수
  • 승인 2016.03.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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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팩션] (10)영화 『한반도』

오늘은 고종황제 장례식을 맞아 일어난 독립 만세의 물결로 조선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3.1만세운동 9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반도 전체가 민족 자립의 기운으로 넘쳐났던 1세기 전 그 무렵에 즈음하여 당대의 아픔을 그린 영화 『귀향』과 『동주』가 예상 밖으로 많은 관객을 모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게 감동적입니다. 우린 이렇게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있는데 이 나라 위정자들은 굴종의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역사스페셜.E07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덕수궁-남양주 장례 행.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40pixel, 세로 352pixel
<동대문을 지나 남양주 홍릉까지 이어진 고종 운구 행렬>
(KBS 역사스페셜 -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
 
작년말에 한국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하였고 이 합의로 한국 정부는 앞으로 이에 관한 어떤 문제 제기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번 위안부 합의와 50년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 맺은 ‘한일협정’을 비교해 보면 그 유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 맺은 ‘한일협정’ 조약문에서는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작년 위안부 합의 때 대통령이 서명한 합의문에도 “이번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 대에서 ‘최종적으로 해결된’ 일을 자식 대에서 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한 셈이 됩니다. 
 
끔찍한 만행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다 끝난 일을 왜 자꾸 들추느냐고 뻗대는 일본 정부의 후안무치에 통분을 금치 못하겠으나 우리 정부의 처사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미 다 끝난 일’이라는 저들의 말이 글자 그대로만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정권이 바뀌어도 다시 거론할 수 없고 주권 제약의 요소가 있으니 이는 ‘조약’의 체결로 보아야 하며 국회 비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탄핵 사유가 된다는 논란도 분분합니다. 영화 『한반도』는 1900년대 초 구한말 조정과 2000년대 초 대한민국 정부를 겹쳐 보여주면서 고난의 역사가 반복되는 우리 역사의 한(恨)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남북이 경의선을 개통시키려고 하는데 일본이 1907년 대한제국과 체결한 조약을 어기는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며 영화는 시작됩니다. 역사적 사실을 들춰보면 1907년에 맺어진 조약으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있는데 조약에는 경의선 철도 부설 운영에 관련된 내용이 없습니다. 조선의 시설과 토지 이용에 관한 조약으로는 1904년에 맺어진 ‘한일의정서’가 있는데 이 조약에 따라 기존의 ‘경부철도주식회사’가 1906년부터 ‘임시군용철도감부’ 1909년부터 ‘통감부철도관리국’으로 관할권이 바뀐 것으로 봐서 영화에서 말하는 경의선 부설 운영에 관한 조약은 1904년 ‘한일의정서’로 봐야 합니다.
 
조약의 효력에 대해 따진다면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때 맺어진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그 효력은 이미 상실된 것이니 영화에서 일본 측 협상단의 주장은 사실무근이며 허구라고 봐야 합니다.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으니 1907년 정미7조약이든 1904년 한일의정서든 그 효력에 대해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화는 대한제국 시대 조약에 찍힌 고종의 어새(임금의 도장)가 진짜가 아니니 그 조약은 무효하다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사라진 어새를 찾았느니 하는 진위 논쟁이 있기도 해서 『한반도』가 이야기 하고 있는 가짜 국새 이야기가 실감 있게 다가오지만 사실은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7조약 등은 조약의 비준 방식이 고종의 친필 서명이었기 때문에 어새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두 조약문에는 고종의 친필 서명이 없고 어새 날인도 없어 형식적으로는 이미 무효임이 확인된 문서입니다.
 
영화는 2007년 경의선 개통식 날 일본이 경의선 개통은 한국 일본 간의 협약 위반임을 통보하면서 한일 간에 외교 단절 위기가 초래되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지만 남북 교류가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고 마는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부적인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의선 개통은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간 공동선언(6.15선언) 발표 후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합의되고 경의선 개통식은 2003년 6월 14일에 있었으며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선언으로 경의선 철도 운행이 개시됩니다. 남북 교류가 확대되고 통일의 기운이 날로 드높아지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화물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2012년부터 경의선은 끊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결국 올해 들어 개성공단은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영화에서 경의선 운행 조약 위반을 주장하는 일본에 맞서기 위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지시하는 날, 11월 17일은 1세기 전에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된 바로 그 날입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여 가짜 어새 진상조사 중책을 맡게 된 최민재(조재현 분) 박사가 진짜 어새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국정원 요원 이상현(차인표 분)의 협박을 받고 나라 팔아먹는 놈들의 파렴치함에 통분합니다. 포장마차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홍계훈을 위해 술잔을 드는데, 홍계훈은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 명성황후의 호위무사로 등장하고 임오군란 때 황후를 피신시킨 실존 인물입니다. 이야기는 명화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을미사변(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한반도 Hanbando.2006.XviD.AC3.CD1-WAF.avi_001860066.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00pixel, 세로 336pixel
<영화의 명성황후 시해 장면>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사실로 고증된 사건입니다. 일제는 대원군이 명성황후 살해의 배후라고 헛소문을 퍼트리지만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의 기록이 공개되어 이 사건이 일제에 의해 치밀하게 추진되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쿠시다 신사에, 민황후를 살해한 일본인 자객 중 한 명인 토오 가쯔아키(藤勝顯)가 기증한 칼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칼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 라고 적혀 있습니다. 민황후 살해에 가담했던 낭인 중 하나인 데라사키라는 자가 쓴 편지에는 “나카무라 다테오가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쯔아끼가 두 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민황후 시해 칼.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98pixel, 세로 287pixel

 
명성황후가 끔찍하게 살해되고 고종은 청일전쟁의 소용돌이를 틈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1년 뒤인 1896년에 있었던 ‘아관파천’이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 커지자 일본은 대륙 침략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난국을 영화는 경운궁(현 덕수궁) 화재 사건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고종황제가 러시아로 보내는 밀사가 무사히 궁을 나가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고 화재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고종이 국새를 궁궐 안 땅에 묻게 했는데 그 때 사라진 국새를 찾기 위해 대통령은 친일 세력과 한 바탕 전쟁을 벌입니다. 일본 자위대 함대가 한반도로 진주해 오자, 전쟁도 불사하겠고 단호하게 나선 대통령과 휘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 총리가 있는 정부청사에 불을 지르고 덕수궁에서 고종의 국새를 찾아냅니다. 실제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고종의 거처 함영전에서 불길이 일어나 많은 전각이 타 버린 적이 있는데 고종을 죽이기 위해 일본이 방화를 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습니다. 영국인 기자 베델이 ‘일제의 방화로 경운궁이 불탔다’는 기사를 써 서방 세계에도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고종이 혼란을 틈타 밀사를 파견한 일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1907년의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한반도 Hanbando.2006.XviD.AC3.CD3-WAF.avi_001429776.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00pixel, 세로 336pixel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1904년 경운궁(덕수궁) 화재.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46pixel, 세로 432pixel
<영화의 경운궁 화재 장면>                         < 1904년 불타버린 경운궁 실제 모습>
 
일본의 재정적 지원이 중단되면 한국 경제는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현실론을 주장하는 국무총리(문성근 분) 세력과 대결하다가 대통령은 의문의 음료를 마시고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가 됩니다. 이 장면은 고종황제의 독살 장면과 오버랩 됩니다. 외세에 맞서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게 민황후, 고종황제에서 끝난 게 아니라는 메타포(은유)로 읽혔습니다.
 
영화에서 고종이 피를 토하며 혼절할 때 일본 공사 관리들과 조정 신하들이 줄지어 서서 현장검증을 하듯 지켜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 낭인 중의 하나였던 이시즈카 에조가 본국에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가 최근 발견되어 그 실상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시간(시체 강간)까지 당하고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친일파 윤치호의 일기, 궁내성(宮內省) 일본인 관리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 등의 사료에 의거하여 고종이 독살을 당했으며 민병석, 윤덕영, 한상학이 주모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상학은 이완용과 사돈관계에 있는 사람이니 고종황제는 친일 매국노에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일 매국노에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그림입니다.원본 그림의 이름: 한반도 Hanbando.2006.XviD.AC3.CD2-WAF.avi_002966514.jpg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00pixel, 세로 336pixel
<영화의 고종 독살 장면>
 
영화 『한반도』가 고증이 제대로 되지 않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하는 이들이 많은데 저는 이 작품을 그렇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을 제대로 밝히는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열강의 침략 전쟁 틈바구니에서 찢겨진 이 나라 역사의 진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일전쟁(1894년)에 승리하여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하였으나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자 친러 외교 노선을 펼치던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듯이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선언되는 등 국제 정세 변화에 맞춰 고종이 파리강화회의에 밀사(의친왕)를 파견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투쟁을 펼칠 뜻을 품자 일제는 고종을 암살한 게 역사적 진실입니다. 영화는 구한말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남북 교류 좌절은 열강이 획책한 것이며 비운의 역사는 100년을 전후하여 반복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진짜 국새가 발견되고 한국 정부가, 고종이 일제와 맺은 모든 불평등조약이 허위로 날조된 것임을 발표하려고 하자 일본 외무상은 황급히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지난 역사의 과오에 대하여 사과드리며 앞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평등한 이웃나라가 될 것을 약속한다.”고 공식 입장을 발표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참 안타까운 건 우리 현실은 영화의 결말과 너무 다르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푼의 돈을 받고 일본의 만행을 덮어주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통일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분열과 상쟁(相爭)의 비극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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