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 숨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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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 숨쉬고…
  • 이병기
  • 승인 2010.11.02 1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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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여행] ⑥ 생활기반 확장


경인철도 개통 당시 인천역

취재: 이병기 기자

'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 여행'이 종반에 이르고 있다.

총 7편으로 나뉜 개항장 도보 여행의 여섯 번째 주제는 '생활기반 확장' 이다. 개항 이후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우리네 터전도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인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을 비롯해 철도와 병원, 수도, 공동묘지 등 근대문물과 관련된 공공시설이 생겨났다. 당시 도시 생활의 거점이자 상징이었던 곳들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인천역 ~ 각국 조계지 계단


청일조계지 계단

이미 다섯 차례나 방문했던 인천역. 개항장 걷기의 시작점이기도 한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의 시발지다. 1900년 5월1일 준공됐지만 6.25 전쟁으로 소실됐다가 1960년 9월 현 역사(驛舍)를 신축했다.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 삼국지 길을 지나면 선린동과 관동 1가 경계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옛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인천시 기념물 제51호)이다.

각국공원현 자유공원 지역은 1884년부터 1914년 조계 철폐시까지 외국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조계지였다. 서남쪽 계단은 청·일조계 경계를 나타내며 계단 왼편은 청국조계, 오른편은 일본조계였다.

최근 들어 좌측과 우측에 청국과 일본 고유 양식의 석등을 배치하고 중간에 계단참을 두어 인천항의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단장했다.

청·일조계 바로 윗길이 자유공원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자유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각국공동조계 안에 위치해 '각국공원'이라고 불렀다. 공원 설계는 러시아 측량 기사 사바찐이 담당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서공원으로, 광복 직후에는 만국공원으로도 불렸다.

이후 1957년 자유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인천기상대가 매일 낮 12시 대포로 시각을 알렸기에 오포산(午砲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인천측후소

자유공원에서 제물포 고등학교를 지나면 우측으로 인천관측소가 나온다. 인천관측소는 국내 최초의 근대적 기상 관측이 이뤄진 '중앙기상대'였다.

1905년부터 국내외 기상 정보를 수신해 분석, 예고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948년 중앙기상대가 서울로 이전하고 6.25 전쟁으로 관측시설이 파괴돼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지자 그 기능이 축소됐다. 1992년 인천측후소에서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변경됐다.


웃터골 운동장

바로 옆에 위치한 제물포 고등학교가 다섯 번째 코스인 '웃터골 운동장' 터다. 인천 최초의 공설운동장으로 1920년 11월1일 개장했다. 운동장을 둘러싼 삼면의 언덕이 스탠드 역할을 했으며, 인천중학교가 들어서면서 1934년 도원동으로 이전했다.

"웃터골이 유명해진 것은 한일 대결 야구 경기 때문이었다. 시합이 펼쳐지면 흰옷을 입은 남녀노소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며 웃터골 주위에 진을 쳤다. 손에 땀을 쥐고 경기에 열광하고 있는 관중들은 일본인 심판의 석연치 못한 판정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쟁취했을 때는 성난 파도와 같이 너나 없이 흥분해 무서운 함성과 더불어 돌격하듯 환호했다. 운동경기의 승부 때문에 빚어진 이 같은 항일 투쟁은 마침내 일본 경찰과의 충돌을 불렀고, 관중들은 검거되거나 해산당했다." 고일 '인천석금' 中


홍예문

제물포 고등학교에서 신포동 방면으로 언덕을 내려오면 홍예문이 나온다.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虹霓門)은 초기에 혈문(穴門)이라고 불렀다. 청일전쟁(1894) 이후 일본인들의 증가로 거주공간 확장이 불가피해지자 당시 인천시내 남북간 교통 불편을 해소하고, 새로 생긴 축현역(현 동인천역)과의 편리한 왕래를 위해 만든 교통로였다.

화강석과 벽돌을 혼용한 아치구조로 일본 공병대가 굴착공사를 하고 청국인 석수가 석축을 쌓아 1908년 완공됐다.

홍예문과 관련된 재미 있는 이야기 한 편이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나와 있다.

"40여년 전 홍예문 큰 바위 옆 으슥한 곳에서 어느 일본 여자가 급한 볼일을 참지 못했음인지, 또는 늘 그런 버릇이 있었는지 엉덩이를 허옇게 내놓고 서서 오줌을 누고 있었다. 장난을 좋아하고 힘이 세던 청년 윤치덕은 이 해괴하기 짝이 없는 거동을 보고, 힘이 있는 대로 볼기짝을 갈기고 36계 줄행랑을 쳤다. 그녀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후에 일본경찰서로 달려가 봉변을 당한 이야기를 했으나, 도리어 꾸중만 톡톡히 듣고 나왔다는 얘기가 있다."


인천거류민단협회

바로 아래쪽에 인성여자고등학교가 옛 인천거류민단병원 터다. 일본은 1883년 영사관 내에 현대식 의료시설을 갖춘 의원을 설립하고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진료했다. 이후 일본 외무성은 비용절감을 이유로 1886년 거류민단으로 이관했다.

거류민단은 인천공립의원을 설립(1888)해 운영했으나 1897년 폐하고, 1906년 현 인성여고 자리에 인천거류민단 병원을 준공해 외래환자 진료를 시작했다. 1914년 거류민단이 폐지되자 인천부로 옮겨 인천부립병원으로 개칭됐다.

인성초등학교 골목길로 올라가다 보면 제일교회 옆과 아래쪽으로 긴 계단이 있다. 이곳이 '각국조계지 계단'이다. 1884년 10월3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청나라, 일본과 조선 정부가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을 체결하면서 각국공동조례가 설정됐다.

이후 응봉산과 송학동 일대 14만여평에 이르는 지역에 외국인들이 거주했다. 중구 관동 일대에서 전동으로 가는 통행로 가운데 하나였으며, 홍예문이 개통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

성누가병원터 ~ 축현역


성누가병원

지난 회 '정신문화의 현장' 편에서도 소개됐던 내동교회는 옛 성누가병원 터다.

당시는 현 내동교회 일대를 '약대이산'이라고 불렀다. 약대이산은 랜디스 박사의 별칭인 '약대인'이 와전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약대인이란 '약을 주는 대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1890년 인천에 도착한 랜디스 박사와 코프 주교는 1891년 4월 현재 중구 내동의 대지(현 내동교회 위치)를 구입해 성누가병원을 건립했다. 인천 현대식 병원의 효시인 성누가병원은 랜디스 박사가 타계한 1898년에 폐쇄됐다가 임시 러시아영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때는 임시 적십자병원으로서 러시아 부상병을 치료하기도 했다. 2004년 러시아 대사관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러시아 선원 추모 동판을 증정했다.


길담모퉁이길

10번째 장소는 신포동과 신흥동을 지나 현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위치한 동공원 터다. 이곳은 인천신사 건립(1889) 후 일대에 식수와 분수, 정자 등 일본식 공원을 조성해 동공원이라 불렀다. 반면 각국공원은 서공원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인천기독병원 방향에 위치한 낮은 언덕 길이 긴담모퉁이길이다. 이곳 일대는 1900년대 초반 일본인들의 묘지와 절이 있었던 구릉지였다. 이후 묘지가 율목동으로 이전하자 신흥동 일대에 살던 일본인들이 1907년 긴 축대를 쌓아 신흥동에서 축현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만들었다.

긴 돌담이 생기고 신흥동과 만나는 곳이 길모퉁이어서 '긴담모퉁이길'이라 불렀다. 현재 축대 위에는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회가 들어서 있으며, 돌담 중간에는 일제강점 말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방공호가 있다.


용동큰우물

동인천 길병원을 지나면 용동큰우물이 나온다. 민속자료 2호인 용동큰우물은 개항과 더불어 만들어진 우물. 상수도 보금 전까지 인천 사람들의 식수원이었다. 광복 후 수도 사정이 좋지 않을 때도 이 우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옥의 육각형 정자는 1967년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현판 글씨는 인천 출신 서예가인 박세림의 작품이다.


채미전거리

동인천역앞 큰길을 따라 배다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우측이 채미전거리다. 이전에는 동인천역 건너편에 있는 동인천청과물공판장 주변을 채미전거리라 불렀다.

채미전거리는 경인철도 개통 후 참외를 비롯한 청과물 상인이 모여들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채미'는 '참외'의 사투리다. 6.25 전쟁 이후 농촌 황폐화로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1950년대 말 지금의 청과물 도매시장 형태를 갖췄다.

당시는 도매상이 100여곳, 노점상은 30~40개에 달했으나 동인천역과 숭의동 간 도로 확장을 위해 철로변 일대 건축물을 철거하면서 현재는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든 상태다.


동인천역

개항장 걷기 여섯 번째의 마지막 코스는 축현역(현 동인천역)이다.

축현역은 1899년 9월18일 경인선 개통과 함께 채미전거리 부근에 문을 열었다. 이후 선로 변경으로 인해 현재의 동인천역으로 신축, 이전했다(1908). 한때는 상인천역으로 개칭(1926)되기도 했으나, 구한말 이 일대를 동인천이라 불렀던 까닭에 1955년 동인천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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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꺄 2015-11-06 06:54:09
개새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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