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들은 ‘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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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은 ‘새’ 되었다
  • 유동현
  • 승인 2018.08.2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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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공원 비둘기장 -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낡은 고교 앨범은 추억 저장소이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를 한 그대가 있고 분식집 문턱을 함께 넘나들던 그리운 친구들도 있다. 3년간 발자욱을 남긴 모교의 운동장과 교실의 모습도 아련하다. 빛바랜 사진첩에는 ‘인천’도 있다. 교정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교문을 나서서 사진사 앞에서 졸업앨범 포즈를 취했던 그대들 덕분에 그때의 인천을 ‘추억’할 수 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소리 해맑은 오솔길 따라 산새들 노래 우러진 옹달샘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1960년대 가수 이석이 부른 가요 ‘비둘기집’의 일부이다.

 
  <1973년도 인성여고 앨범. 모이를 줘 비둘기를 카메라 앞에 모은 듯하다.>
 
 
비둘기는 ‘평화’ ‘사랑’의 상징이었다. 한가하다 못해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공원 오후의 풍광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소재였다. 웬만한 유명 공원 광장에는 비둘기집이 꼭 있었다. 그 앞에는 비둘기 모이를 파는 가게가 있어 행락객들은 비둘기를 모이로 한데 모으고 사진을 찍었다.
학생들도 이 평화의 상징, 비둘기를 좋아했다. 비둘기집을 배경삼아 앨범 사진을 많이 찍었다.
 
  <1974년도 인일여고 앨범. 비둘기집 뒷면에서 포즈>
  <1974년도 영화여상 앨범.>

 
자유공원 광장에도 커다란 비둘기집(비둘기장)이 있었다. 맥아더 동상 앞이 넘버원 '인증샷' 포인트였고 그 다음이 비둘기집이었다. 6층짜리 두 동으로 된 이 비둘기집은 1967년 만석동에 있는 대성목재공업에서 제작해 기증한 것이다. 공동주택이 거의 없던 시절, 비둘기들은 사람들보다 먼저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된 셈이었다.
비둘기집은 190쌍 정원의 규모로 만들어 30쌍을 처음 입주시켰다. 인근 시청(현 중구청), 경기도경찰국(현 하버파크호텔) 청사 등 건물 처마 밑에 흩어져 살았던 비둘기들이 한 ‘아파트’에 모여 살게 된 것이다.
 
 
  <1975년도 인일여고 앨범. 11층으로 증축하고 한옥 지붕을 얹은 모습.>
  <1976년도 인천수고(현 인천해양고) 앨범. 드물게 남학생들이 비둘기집을 배경 삼았다.>
 
 
비둘기들은 금슬이 좋았다. 해마다 식구가 늘어나 설치 6년 만에 30배인 1000쌍으로 늘어났다. 극심한 주택난을 겪었다. 결국 집을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74년 경 6층짜리 아파트를 두 배 정도 높여 11층으로 만들었다. 이때 지붕은 한옥 형태로 올렸다. 나중에 이 공간도 부족해져 일부 비둘기를 수원시와 여주군에 분가시키기도 했다.

 
  <1984년도 중앙여상 앨범. 수봉산의 비둘기장이다.>

 
이 비둘기집은 설치된 지 30년 만인 1996년 초 공원 환경개선 계획에 의해 철거되었다. 비둘기들은 졸지에 '홈리스'가 되었다. 그들의 배설물은 건물 부식과 차량 피해 그리고 위생상의 문제를 야기 시켰다. 급기야 정부는 2009년 혐오감을 주는 비둘기를 ‘유해(有害) 동물’로 지정했다.
비둘기는 이제 빛바랜 앨범 속에서나 환영받는 조류로 전락했다. 그들은 정말 ‘새’가 되었다.

유동현 / 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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