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이던 청춘과 낭만의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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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던 청춘과 낭만의 거리에서…
  • 이병기
  • 승인 2010.11.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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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여행] ⑦ '모던보이·모던걸의 여가'


표관. 현 외환은행 인천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취재: 이병기 기자

동인천과 신포동 일대는 인천에서 청춘을 보낸 40~60대들에게 '젊음의 거리'로 기억된다.

지금에야 구월동이나 부평 등 위락시설이 집중된 곳이 늘어났지만, 당시만 해도 인천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은 동인천과 신포동 일대가 유일했다. 당시 골목골목 자리잡았던 추억의 장소들은 아직도 그들의 술안주로 곱씹어진다.

그러나 동인천과 신포동 일대는 현재 중년층들이 모이기 한참 이전인 개항때부터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의 중심지였다. 당시 개항장 일대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을 비롯해 일본식 여관, 극장, 중국음식점, 외국인 사교클럽, 카페 등 도시 생활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위락시설이 생겨났다.

'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여행'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을 장식할 '모던보이·모던걸의 여가'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공화춘 ~ 인천공회당 터


이태호텔 터. 현재는 중화요리집이 있다.

인천역을 출발해 차이나타운에 들어서면 중구 선린동 38-1, 38-2 일대가 등록문화재 제246호인 공화춘이다. 공화춘의 전신은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 숙식업소인 산둥회관이었다.

1911년 산둥성 출신 화교 위시광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 개업했다. 이후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해 공화춘으로 개명(1912)했다. 현 건물의 정확한 신축연도는 알 수 없으나 화강암 석축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눈목(目)자 구조다.


대불호텔 터

인천화교소학교 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우측으로 이태호텔 터가 나온다. 지금은 중화요리집이 위치한 이곳은 화상 이태호가 경영했다고 해서 이태호텔, 혹은 해리호텔, 스튜어드호텔로 불렸다. 당시엔 일본식 기와를 올린 3층 건물이었다. 건축된 시기는 알 수 없으며, 6.25 전쟁 중 소실됐다.

대불호텔바로 맞은 편 공터는 대불호텔 터로 1888년 일본인 사업가 호리 히사시타로가 신축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었다. 1918년경 매도돼 중화루라는 중국음식점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1978년 철거됐다.

호리 히사시타로는 개항 직후 부산에서 올라왔으며, 당시 일본군 군수물자를 납품하며 돈을 벌었다. 이후 대불호텔을 건립하고, 아들 오히 리키타로와 함께 해운업에 진출해 인천~진남포 항로, 인천~부산 항로, 블라디보스토크 항로 등을 개척하면서 우리나라 연안의 항로를 독점하기도 했다.

대불호텔에서 자유공원 인천시역사자료관 방면으로 가면 제물포구락부가 나온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이곳은 1891년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조직됐다.

초기에는 중구 관동1가의 목조 단층건물이었으나, 중구 송학동 1가에 지상 2층 벽돌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다. 당시 최초 설계는 사교실을 비롯래 당구장, 독서실(이상 실내) 및 테니스장(실외) 등의 편의시설들도 갖췄다.

이후 각국조계 철폐(1914)에 따라 사교장으로서 기능이 중단됐으며, 이후 건물은 정방각, 미군 장교클럽, 시립박물관, 문화원 등으로 사용됐다. 현재는 제물포구락부의 옛 모습을 재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물포구락부

다음 장소는 개항장 걷기에서 자주 등장한 인성여고다. 현재 체육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이 옛 인천공회당 터로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집회장소였다.

1899년 관동1가에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을 짓고 일본거류민단사무소, 상업회의소, 인천구락부와 함께 사용했으나 1923년 송학동3가에 2층 벽돌조 건물을 신축해 옮겼다. 2층에는 넓은 홀과 무대가 있었으며,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음악회를 비롯해 여운형, 조병옥 등의 강연도 열렸다. 6.25 전쟁 중 불에 타 없어졌다가 1957년 인천시립시민관을 세워 극장으로 운영됐다.


인천공회당 터. 현 인성여자고등학교 다목적관

"인도청년 빠빠솔라씨와 뱅카라씨 두 사람이 자전거로 세계 무전 여행 도중에 서울에 들어온 것을 인천지국장 박창한씨가 교섭해서 강연회를 인천공회당에서 성대히 개최하였다. … 단지 자전거 한 대를 가지고 돈 없이 넓은 세계를 일주한 이야기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 있고 모험적일까 싶어서 모여왔던 만큼 조선일보 인천지국 주최의 이 강연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 고일, '인천석금'

금파 터 ~ 용동권번 계단


금파

신포동 쪽으로 내려오면 현 청실홍실 건물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금파 터다. 당시 카페는 간단한 서양요리와 커피, 맥주, 양주 등을 판매하던 곳이었다. 1920년대 인천에도 부사, 흑선, 일화루 같은 카페가 등장했다.

금파(金波)는 신포동과 신생동 경계 5거리에 위치한 카페였다. 태평양 전기(1931~1945)에는 문을 닫기도 했다. 광복 후 고려회관으로 영업을 재개했으나, 6.25 전쟁 중 소실됐다.


금파 터. 현 청실홍실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양식과 일본식 식당 겸 '빠'를 운영했던 금파는 신생동 어구에 우뚝 솟은 인천의 마천루였다"면서 "백계 러시아 계집이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굴리면서 거품이 허옇게 넘쳐흐르는 '기린' 맥주로 새빨간 입술을 축일 때, 향수에 우는 '빌르스냐'는 가슴을 불살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포동 주민센터를 지나 큰 길가에 위치한 외환은행 인천지점이 표관 터다. 표관은 1909년 신축된 상설영화관으로 주로 일본영화를 상영했으며, 객석 수는 797석이었다. 표관(瓢館)은 가운데 본관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부속동을 둔 2층 건물이었으며, 광복 후에는 미군의 해마극장, 인천시 직영 문화관으로도 사용됐다.


표관 터. 현 외환은행 인천지점

6.25 전쟁 때 소실됐으나 1960년 그 자리에 키네마극장이 설립돼 20여년간 운영됐다.

천주교가톨릭회관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경동 치안센터 우측에 협률사가 나온다. 현재 애관극장으로 사용되는 이곳은 부산 출신의 사업가 정치국이 용동의 창고건물을 개조해 설립한 극장이다.

협률사 설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2년 축항사, 1926년 애관극장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연극과 영화를 주로 올리는 상설관의 면모를 갖췄다. 표관과 달리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또한 번스타인의 피아노 연주회나 무용수 최승희의 공연을 비롯한 각종 행사도 열었다.


협률사. 현 애관극장

"'육혈포 강도'라는 제목으로 임성구 일행의 혁신단이 협률사에서 공연할 때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이 아닌가 싶다. 소위 '신파 연극'의 시초였다. 악한 역을 맡은 한창렬씨가 권총을 번쩍 들고 강도짓을 할 때, 어느 때는 딱총이 터지지 않아서 육성으로 '이놈! 총 받아라! 탕!' 하기도 했다. 정말 총소린 줄 알고 놀라기도 했지만, 강도가 제 입으로 '탕' 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그 자체가 희극이었다." -고일, '인천석금'

가구골목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다가 신신컨벤션 웨딩홀 골목으로 꺾어지면 앞쪽에 허름한 계단이 놓여 있다. 이곳은 이번 개항장 걷기의 마지막 코스인 용동권번 계단이다.


용동권번 계단

권번은 자치조직과 규율을 지닌 기생 양성소이자 관리소였다. 1900년대 초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인천에도 권번이 등장했다. 1901년 허가를 받은 소성 권번이 그 시초였으며, 요릿집과 공생관계였던 시기에는 용동 기생조합소 형태로 있다가 1925년 용동권번을 설립했다. 1930년대에는 인화권번, 인천권번으로 재조직됐다.

현재는 용동 주택가에 '용동권번 소화사년(1929) 유월 수축(龍洞券番 昭和四年 六月 修築)이라고 쓰인 돌 계단이 당시 용동권번의 위치를 알려준다. 

용동권번은 물산장려운동과 의연금 모집 등 지역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배우 복혜숙, 유신방, 가수 이화자, 명창 이화중선 등 한국 대중예술계 스타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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