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좋은 삶을 찾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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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좋은 삶을 찾는 길
  • 최종규
  • 승인 2010.12.20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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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예수스 발라즈·프란시스꼬 인판떼, 《이자벨》

 학예회이든 성탄절잔치이든 무슨무슨 놀이마당이든 왜 아이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구경거리로 삼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처음부터 아이들을 구경거리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루 지나고 이틀이 가며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는 일을 으레 버릇처럼 삼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살피지 않고, 아이들 마음이 어떠한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무대에는 어른들이 올라야 합니다. 무대는 어른들이 꾸미고, 무대 안팎에서는 어른들이 구경하면 됩니다. 그러나 무슨무슨 행사를 할라치면 으레 아이들을 노리개처럼 삼아 구경거리로 여겨 버릇합니다. 올림픽이든 무슨 대회이든 똑같습니다. 축하공연이든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고 싶으면, 어른도 저마다 무대에 오를 노릇입니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무대에 오를 때에, 아이들은 남우세스럽지 않다 여기며 무대에 오를 만합니다. 잘나고 못나고를 가리는 무대가 아니라, 서로서로 오붓하게 어우러지면서 얼싸안는 무대라 한다면 아이이고 어른이고 가리거나 손사래칠 까닭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무대란 쓸모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무대가 아니라, 마당판이 있으면 넉넉합니다. 언제라도 들고 나면서 누구라도 들고 나는 마당판이 어울립니다. 다 함께 주인공이 되면서 서로서로 따숩게 바라보는 마당판이 알맞습니다.

..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에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때 모든 아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이자벨은 점점 더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학기에도 이자벨은 손톱을 물어뜯어 속살이 다 나올 지경이었지요. 이것은 이자벨이 걱정이 될 때 하는 버릇이었답니다. 방학이 다 끝나도록 손톱은 다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자벨은 앞으로 다가올 파티가 걱정이 되어서, 또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  (16쪽)

 무대에 올린답시고 아이들을 몇 달 동안 길들이는 짓 또한 끔찍합니다. 저는 운동회라는 놀이잔치를 마련해서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는 일은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운동회 연습’은 신물이 나도록 싫었습니다. 남자는 기계체조 여자는 부채춤이라는 틀을 지어 봄부터 가을까지 날마다 몇 시간씩 연습을 시키니 죽을 맛입니다. 놀 겨를이 없고, 이 연습을 하며 숱하게 욕을 먹고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누가 즐기라는 운동회이고, 누구한테 즐거우라는 운동회였을까요. 운동회 기계체조와 부채춤은 지난날 일제강점기 군대사열하고 다를 구석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군대사열을 했군요. 중·고등학교는 군대가 아닌 학교였으니 ‘교련사열’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아이들을 반듯하게 줄 세워서 노래에 맞추어 발소리 쿵쿵 내며 똑같은 모양새로 걷도록 하면서 교장 앞을 지나갈 때에 경례를 붙이도록 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자꾸자꾸 뺑뺑이를 돌리다가는 얼차려를 베푸는 ……. 조금 더 헤아리니, 1982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가 1987년에 마칠 때까지, 국민학교에서도 한 주에 월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 아침모임을 할 때면 으레 군대사열을 했습니다. 군대사열을 잘 못하면 운동장에서 발길질이 춤춘다든지 손찌검이 나부낀다든지, 교장이 마이크로 저기 아무개 학년 아무개 반 몇째 줄 아이 구령대로 나오라 부른다든지 하면서, 몹시 끔찍했습니다. 언제나 한 주 첫머리를 끔찍하게 열고, 한 주 마지막을 끔찍하게 닫았어요.

.. ‘파티가 열리는 날, 감기에 걸려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자벨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봐, 아프기를 바란다고 당장 몸이 아파질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래서 이자벨은 노래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20쪽)

 다른 군부대는, 또 요즈음 군부대는 어떠한지 모릅니다. 제가 군대에 끌려가서 짓밟혀야 했던 1995∼1997년에 제가 있던 군부대에서는 군대사열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군부대에서는 알통구보라는 이름으로 ‘웃통 벗고 새벽 달리기’를 시켰다지만, 제가 있던 군부대에서는 이런 달리기 또한 하지 않았습니다. 달릴 만한 연병장이 딱히 없는 깊디깊은 산골짜기이기도 했으나, 한여름에도 밤에 경계근무를 서는 사람은 두툼한 야상에 깔깔이를 입지 않으면 추위에 떨어야 했고, 겨울에 내린 눈은 부처님오신날이 되어야 비로소 녹으며, 겨울에는 영 도 밑으로 이십 도쯤 되는 날씨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날마다 바람이 몹시 거세게 몰아치는 곳이었기에, ‘대대장 지시사항’으로 ‘아침점호 안 하는 날’이 꽤 잦았습니다. 영하 이십 도에 풍속 이십 미터에다가 둘레는 온통 눈더미인데 사람 잡을 짓을 섣불리 하지 않습니다. 겨울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으레 하는 일은 눈치우기였습니다. 여름이면 새벽부터 밤까지 흔히 하는 일은 물골내기였습니다.

 그러나 강원도 양구 가장 깊은 산골짜기 군부대에서 하나만큼은 모질게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하는 혹한기훈련을 비롯해, 산골짝에 있다가 주둔지로 내려오면 한 해 내내 시달리듯 이어지는 갖가지 훈련 때 대대장과 연대장이 번갈아 찾아오며 마련해 주는 군장검사.

 군대사열이란 쿵쿵 발소리를 내며 팔을 높이 올리며 걷다가 경례를 붙이는 일이지만, 군장검사는 40킬로그램짜리 완전군장을 꾸역꾸역 싸서 등에 짊어지고 소총과 탄약을 챙겨 든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꼼짝 할 수 없이 서 있는 짓입니다. 꼼짝 못하게 세워 놓고 아무나 콕콕 집어 군장을 끌르라 해서 물품을 빠짐없이 챙겨 들고 있는가를 살핍니다. 이동안 모두들 눈썹 하나 움직이지 못합니다. 완전군장을 한 채 열 시간 내리 쉬지 않고 멧자락 따라 길 없는 길을 걷는 일이 훨씬 쉽지,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꼼짝 못하게 세워 놓는 일은 피를 말리고 허리가 나가게 하는 짓입니다.

 우리들 살아가는 이곳 남녘나라는 평화가 아닌 전쟁이 감돌기 때문이겠지요. 남녘과 북녘은 누가 먼저 치느냐 누가 먼저 서로를 차지하느냐를 놓고 다투기 때문이겠지요. 군대힘이든 경제힘이든 남녘나라는 진작부터 북녘나라를 앞질렀을 뿐 아니라, 북녘나라는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데, 이런 판에도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사회 얼거리는 차디차고 춥디춥습니다. 군부대 살림을 북돋우는 데에 더 큰 돈을 쏟아붓고, 젊은이나 어린이 모두 군부대 훈련이나 틀에 길들도록 내몰립니다. 제식훈련 교련훈련은 끊이지 않고,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어울림마당이나 놀이마당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축제이니 운동회이니 있지만, 막상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거나 즐기는 잔치마당이 되지 못합니다. 딱딱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홀가분한 만남터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올림픽이니 월드컵이니 있으나, 정작 사람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운동경기가 아닙니다. 그예 구경만 하는 돈놀음판입니다.

 그림책 《이자벨》을 생각합니다. 《이자벨》에 나오는 이자벨이 두렵게 느끼는 ‘파티’는 오늘날 한국땅처럼 아이들을 구경거리로 삼으며 무대에 올리는 그런 어수룩한 학예회가 아닙니다. 신나게 즐기는 놀이마당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나는 놀이마당일지라도 ‘의무처럼’ 노래를 꼭 불러야 한다면 무거운 짐이 됩니다.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부르기 싫으면 안 부르는 흐름이라면 이자벨이 두려워 하거나 걱정으로 짓눌리지 않겠지요. 가락을 못 맞추거나 높낮이가 엉터리라 하더라도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동무를 보면서, ‘어머나, 저렇게 노래를 부르네. 그런데 참 즐겁게 부르는구나. 나도 한번 불러 볼까.’ 하는 마음이 샘솟는다면 참 좋겠지요. 언제나 스스로 우러나도록 이끌 때가 즐거우면서 좋으니까요.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공부이든 학원 공부이든 배우려 하는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고 싶어요’ 하는 마음이 우러나와야 참다이 배울 만합니다. ‘경쟁에 밀린다’는 말이나 ‘대학교 가야지’ 하는 말로 아이들을 닦달해서는 참다이 배울 수 없습니다.

 스스럼없는 삶이어야 하고, 거리끼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 살가운 삶이어야 하며, 사랑스러운 삶이어야 합니다.

 자랑하거나 내보이는 삶이 아닙니다. 뽐내거나 우쭐거리는 삶이 아닙니다. 1등이 되거나 2등으로 뽑히는 삶이 아닙니다. 등수도 숫자도 없는 삶입니다. 나한테 좋을 자리를 찾는 삶이요, 나한테 기쁠 꿈을 키우는 삶입니다.

 그림책 《이자벨》에서 이자벨은 마침내 맑으며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자벨은 이자벨이 아끼고 사랑하는 멍멍이한테서 기운을 얻어 이자벨 노래결과 마음결과 삶결을 새삼스레 깨닫고는 씩씩하게 주먹을 불끈 쥡니다. 상을 탄다거나 우쭐댄다거나 콧대를 높인다거나 잘나 보인다거나 하려는 노래부르기가 아닌 줄 비로소 알아챘기에 다부지게 노래를 부릅니다. 내 좋은 삶을 찾으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든 꾀꼬리 소리로 노래를 부르든 한결같이 어여쁩니다.

― 이자벨 (예수스 발라즈 글,프란시스꼬 인판떼 그림,유동환 옮김,푸른나무 펴냄,2000.10.29./5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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