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를 염원하는 '서정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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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평화를 염원하는 '서정의 언어'
  • 최일화
  • 승인 2011.10.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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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효 시집 <주머니 속의 여자>를 읽고

유자효 시인의 시를 여기저기서 단편적으로 읽다가 신작시집이 있어서 구입해 읽었다. 평소 유 시인의 시엔 정감이 가는 서정이 녹아 있어서 매우 좋아하던 터였다. 지난 7월 발간한 ‘주머니 속의 여자’였다. 방송인으로서, 뉴스 앵커로서 근엄하게 국제뉴스를 전하던 단정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시는 매우 서정적이고 다정다감하다. 그 소재도 언론인 출신답게 국제정세와 세상풍경을 많이 담고 있지만, 세세한 가정사나 섬세한 계절감각까지 고루 담아내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시집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의 성격으로 분류한 것 같았다. 제1부 ‘가족사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시를 먼저 보기로 하겠다.

가족사진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옷을 잘 차려입고
한껏 멋을 내고는
마치 아무근심걱정 없다는 듯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아들은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말을 잃고
어머니는 깊은 잠에 못든지 오래됐지만
사진 속의 세 가족은 언제나 똑같이 웃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유자효, ‘가족사진’전문-

이 시의 가족은 시인의 가족이 아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사연과 함께 비친 가족사진일 게 분명하다. 여기서도 이 시인의 직업의식이 시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 ‘평화’ ‘아버지․1'에 나타나는 가족도 시인의 가족이 아니라 감동을 불러일으킨 어느 뉴스의 주인공들이 시인의 형상화 작업을 거쳐 시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물론 ‘35년’같이 시인의 궁핍했던 어린 시절 체험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시편도 있다. ‘Home, Sweet Home’이나 ‘명절’처럼 가족의 평화가 아니라 갈등과 불화를 묘사한 시편도 있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관심사’ ‘저승’처럼 죽음의 의미를 짚어보고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시인의 연륜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시 중엔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 시가 있어서 흥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 사랑’이다. 

그 사랑

LA에 사시는 우리 외삼촌
외숙모 돌아가시자 서울에 나들이 왔다
모시고 저녁 하는 자리
“외삼촌 많이 적적하시죠?”
불콰하게 술이 오른 우리 외삼촌
눈을 지그시 감고 말씀하신다
“살아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 분이 누구신데요?”
우리 외삼촌
젊은 시절엔 아나운서로 날리셨었다
방송국으로 자주 찾아오던 여학생이 있었더란다
책상에 선물을 놓아두기도 하고
많은 편지들을 보내왔었더란다
그러나 꿈쩍 않으신 우리 외삼촌
어느 날 찾아와서는 부모 따라 멀리 떠나게 되었다고 눈물을 찍더란다
그래도 아무 말 없자
그대로 돌아섰는데
그 뒤 50년의 세월이 물같이 흘러버렸다
나는 그 할머니를 찾아나섰다
할머니가 다니던 학교의 동창회로 알아보니 의외로 연락처가 쉽게 나왔다
전화를 드리고
외삼촌 이름을 대니
잠시의 침묵 뒤에 들려오는 느린 목소리
“그 분이 계시나요?”
미국에서 사시고, 다니러 오셨다고 말씀드리자 만날 장소와 시간을 내주신다
외삼촌은 그 할머니와 몇 번 만났고
소년처럼 흥분된 며칠을 보냈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보셨냐는 물음에
말 없는 웃음으로 대신하셨다
사랑도 한 50년은 묵어야 곰삭은 맛이 나는 것인가
-유자효, ‘그 사랑’ 전문

제2부 ‘타밀 반군에게’를 보자. 2부의 시들은 여러 편이 세계를 여행하면서 혹은 세계적인 뉴스의 쟁점을 시로 옮긴 시편들이다. 뉴스 앵커의 면모는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타밀 반군에게’는 스리랑카 내전을 소재로 한 것으로 사랑과 평화에 대한 갈망, 인류애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그리고 분단과 갈등과 가난과 불평등에 관한 안타까운 심정의 토로와 그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조선족’에도 그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조선족

불 꺼진 복도에서
아기를 앞으로 옮겨 안은
여윈 조선족 아주머니의 통화 내용

“야, 어짜든가 마음 편히 먹으라우야
너는 그토록 공불 하고 싶어 야단하지 않았냐
돈일랑 걱정 말고 공부하라우
이 애민 괜찮으니 염렬랑 말구“

수화기 너머 째랑째랑 울리는 딸의 목소리

주인 집 세 아이 키우느라 여념이 없는 아주머니
아무쪼록 돈 많이 벌어서 꿈을 이루고
가족이 있는 연변으로 돌아가시길
   -유자효, ‘조선족’전문

제 3부 ‘하늘 공원’을 살펴보겠다. 4부에선 종교적 색채가 농후한 시편들이 보인다. ‘신부와 수녀’에선 테레사 수녀를 기리고 있고 ‘기적’에선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고 있다. ‘전도’ ‘불경을 읽다가’ ‘독경’ 등이 또한 그렇다. 종교적인 색체의 제목이고 내용이긴 하지만 종교의 교리를 설명하거나 신앙의 오묘한 원리를 시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 비교적 가벼운 터치로 서정을 노래하고 있기는 여타의 시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포리즘적인 짤막한 단시들이 잔잔한 여운을 전해주기도 한다. 짧은 시 한 편 읽기로 한다.

시간 ․ 1

과거는 화석
현재는 생물
미래는 희망

화석을 붙들고
울지 말기를
-유자효, ‘시간 ․ 1’ 전문 -

이제 제 4부 ‘주머니 속의 여자’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4부의 첫 번째 시 이면서 시집의 표제시부터 함께 읽어보기로 한다.

주머니 속의 여자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주머니 속의 여자가 외친다

좋은 조건의 대출 상품이 있다고
동창 모임이 있다고
심지어는 벗은 여자 사진이 있다고
시도 때도 없이 외쳐 댄다

버튼을 눌러 말문을 막아 버리자
마침내는 온몸을 부르르 떤다
참 성질 대단한 여자
주머니 속의 여자
-유자효, ‘주머니 속의 여자’ 전문-

유자효 시에는 이렇듯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시도 꽤 여러 편이다. 일상생활에서 유머가 사람들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듯 시에서도 위트와 재치는 시 읽는 즐거움을 한껏 북돋워주고 있는 것이다. ‘장날’에도 그런 위트가 반짝인다. ‘꿈 ․ 2’처럼 인생에 대하여 미련을 피력하고 있는 시도 여럿 보인다. 삶을 유익하고 의미 있게 살고자 하는 시인의 내면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꿈 ․ 2

언 땅에 딱딱한 씨를 뿌리고
얼음 위에 불씨를 지피고 있네
씨앗이 터져 움이 되고
불씨가 큰 불이 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네
작은 꽃 하나 못 피우더라도
손 녹일 불꽃 하나 못 피우더라도
끊임없이 씨 뿌리고 불 지피건만
인생은 끝내
무수한 꿈을 살라먹고 스러진 잔해
-유자효 ‘ 꿈 ․ 2’ 전문-

인생에서 무엇인가 이루어보고 싶지만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꿈에 불과한 것인지를 노래하고 있다.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것일 수도 있다. 시집의 시를 이제 다 읽고 한 편만 남았다. ‘인각산의 삽살개’다. 왜 이 시가 이 시집에서 맨 마지막으로 읽는 시가 되었을까. 아마도 시의 길이와 제목에서 느껴지는 낯설음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시는 이 시집에서 제일 긴 시 중에 하나로 두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분명히 읽고 나면 재미 있다고 느껴지겠지만, 그렇더라도 얼른 읽기를 주저하고 있다가 맨 나중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역시 시는 너무 길거나 어렵거나 제목이 낯설면 독자들이 얼른 읽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유자효 시인의 신작 시집 독후감을 마치려 한다. 시인의 시는 읽기가 쉽고 편하다. 그렇지만 행간에서 우러나는 깊은 의미와 선명한 이미지가 감동을 자아내고 시인과 독자가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시편들로써, 현대 시중에 가장 좋은 시로 편입되기에 충분하다.

유명 문학상 수상작가라 하여 읽어 보면 무슨 소리인지 아무런 감동도 전해져오지 않는 시가 태반이어서 독자들은 정말 절망하고 시를 떠난다. 그 시가 왜 좋은 시인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왜 그런 문학상에 선정되었는지 궁금해서 해설을 찾아 읽고 심사평을 읽어 보지만 그 역시 모호한 추상적인 말만 늘어놓고 있어서 도대체 시를 어떻게 읽고 써야 하는지 난감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시집을 만나면 머릿속이 개운해지고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을 받게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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