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혼들의 참스승 정서웅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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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영혼들의 참스승 정서웅 선생
  • 김용민
  • 승인 2024.03.0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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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27) 고 정서웅 숙명여대 교수 - 김용민 / 전 연세대 독문과 교수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다.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ss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헤르만 헤세  『데미안』)

 

1973년 5월 어느 날, 호기심 가득한 고등학교 1학년 까까머리 시절, 이 말들이 번개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이 얼마나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으며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말이었던가. 껑충하게 키가 큰, 그래서인지 자꾸 흘러내리곤 하던 바지춤을 가끔 두 손으로 치켜올리던 선생님, 독일어 문법 설명을 잠시 내려놓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여러 시간에 걸쳐 생생하게 들려주시던 선생님, 그는 바로 많은 청춘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이제 막 피어나던 젊은 영혼을 한없이 고양시킨 진정한 스승, 정서웅(1942~2022) 선생님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대사를 마치 연기하듯 입체적으로 들려주는 선생님의 시연을 숨죽이고 바라보던 그 순간은 내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접하기 전과 그 후를 나누는, 헤세를 알고, 문학이라는 멋진 신세계를 경험하기 이전의 세계와 그 이후의 한껏 풍요로워진 세계를 나누는 이정표와 같은 순간이 되었다. 그 이후 나는 헤세의 작품을 더 많이 찾아 읽었고, 점점 더 넓은 문학의 바다로 나아갔다. 그래서 이과 공부를 접고 독문과로 진학하고, 독일 문학을 공부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이후 여러 동문 선후배를 만나며 이런 경험을 나 혼자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서웅 선생님을 흠모하는 제물포 고등학교 졸업생들뿐 아니라 선생님이 대학 졸업 후 처음 부임했던 박문여중 졸업생들 역시 마찬가지로 선생님에 대해 잊지 못할 추억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살짜리 중학교 1학년 여학생들에게도, 17살짜리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들에게도 정서웅 선생님의 말씀은 마치 천둥처럼, 벼락처럼 가슴과 영혼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님 덕분에 일생 간직할 좌우명을 얻거나, 우리의 삶을 비춰줄 등댓불을 발견하거나, 지쳐 쓰러졌을 때 우리를 일으켜 세울 말씀 하나씩을 가슴에 얻게 되었다. 때로는 인생행로 자체가 바뀌어 버린 경우도 있었다. 한 사람의 참된 스승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 예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있는 정서웅 선생님, 그는 만 80이 되던 2022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이 이제 세상에 없어 더욱 그립다.

정서웅은 1942년에 중국 텐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향인 평안북도 철산을 떠나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두 살 때 철산의 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와 유년기를 보냈고 해방 이후 서울로 돌아온 어머니가 고향으로 와서 어린 서웅을 서울로 데려갔다. 6살 때 경험한 월남의 기억을 정서웅은 그가 고희를 맞아 2012년에 펴낸 문집 『현수』(賢樹)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젊은 시절 쓴 시와 소설, 에세이, 독서록, 일기초, 짤막한 자서전으로 구성되어 있는 『현수』는 선생님 돌아가신 후 자제분들이 원고를 더 보완하여 2023년에 출판사 임시프레스에서 재발간하였다.)

“새벽에 어머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 길로 나는 할아버지 집을 나와 새벽길을 걸었다. 기차를 타러 차련관 역까지 가는 동안 전선주가 윙윙 울던 기억이 또렷하다. 남북이 갈라지는 시점이었기에 월남하다 발각되면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한탄강 근처까지 기차로 온 다음 어머니와 나는 안내인이 이끄는 대로 어두운 밤에 한탄강을 넘었다. 아무도 업어주질 않아 나는 가슴까지 차는 물속을 걸어서 쫓아갔다.”(『현수』, 285)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해 학교에 다니다 2학년 때 6.25를 맞는다. 일요일이라 남산에 올라 놀이판을 기웃거리던 그는 “갑자기 저 아래 시내 한복판에서 요란한 굉음이 터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어디론가 뛰는 것을 목격한다. 이후 피난에 나섰지만 한강다리가 끊겨 되돌아오고 서울에서 9.28수복을 맞는다. 밤새 방공호에 피신해 있다 새벽에 밖으로 나와 바라본 그때의 서울 풍경을 8살의 정서웅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아직도 그 새벽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온 동네가 불에 타고 있어 주위가 대낮처럼 밝았다. 여기저기에 시체가 나뒹굴고 발에 차이는 유리들은 엿가락처럼 뒤틀려 있었다.... 회현동으로 내려갈 때도 함포사격은 그치지 않았다. 쾅하고 포탄이 터지면 섬광이 번쩍하고 이어서 파편들 날아가는 소리가 쉭쉭하고 울렸다.”(현수, 289)

1.4후퇴 때 예산으로 피난 갔던 정서웅의 가족은 이후 인천 송림동에 정착하였고, 정서웅은 동명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중학교에 입학한다. 텐진에서 태어나 철산에서 자라고 어린 나이에 한탄강을 건너 월남하고 6.25와 1.4후퇴까지, 한 사람이 일생을 거쳐 경험해도 다 못할 엄청난 일들을 정서웅은 어린 나이에 겪었지만, 신기하게도 가슴 깊은 곳에는 여전히 맑은 시심이 상처받지 않고 남아있었다.

정서웅은 인천중학교에서 문예반 담당이던 최승렬 선생님을 만나 문학에 눈을 떠 이후 맹렬한 활약을 한다. 중2 때 한글날 기념 전국학생백일장에서 1등을, 중3 때엔 학생잡지 <학원> 주최 문학상에서 중등부 우수상을 받았고 제물포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고1 때 소설 <접동새>로 학교에서 주최한 제인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에 심취한다. 그의 수상작 <하모니카>나 <접동새>는 물론 고3 때 쓴 <눈밭 속에서> 등의 소설은 중고등학생이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은 주제와 잘 짜인 형식 그리고 긴장감 있는 서술이 단연 돋보인다. 정서웅이 문학가의 길로 쭉 나아갔다면 뛰어난 소설가가 되었을 터인데 못내 아쉽다.

정서웅의 자서전에서 회고하는 흥미로운 사건은 고3 때 길영희 교장의 전출 반대운동을 한 일이다.

“5.16으로 정권을 쥔 군사정부는 교육 쇄신의 일환으로 한 학교에 오래 재직한 교장들에게 전보 발령을 내렸다. 길 교장의 전출이 밝혀지자 학생들과 졸업생, 그리고 학부형들까지 반대운동을 벌였다. 시내 여러 곳에 전출을 반대하는 벽보를 붙이고, 3학년 학생들은 일제히 상경, 덕수궁에 진을 치고 대표 몇 명이 문교부 장관댁을 방문해 우리의 뜻을 전했다. 간곡한 탄원이 받아들여진 것일까, 다음 날로 길 교장의 전근은 일단 유예되었다.(현수, 293)

 

고1 때 제인문학상을 받는 정서웅
고1 때 제인문학상을 받는 정서웅

 

정서웅은 1962년에 서울대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속하여 인천에 사는 대학생들과 문학서클 <형상>을 조직해 작품발표와 토론회를 열었고, 동인천역 근처의 <크라운 예식장>을 빌려 <문학과 음악의 밤>을 열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열망은 이후 그의 교직 생활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정서웅은 1966년 졸업과 함께 인천 박문여중 교사로 부임한다. 어렸을 때 황반염을 앓아 오른쪽 시력을 잃었기에 군면제를 받아 졸업하자마자 약관 25세의 나이로 교단에 서게 된 것이다.

햇병아리 시간강사 정서웅은 박문여중에서 국어와 작문을 가르치며 <시와 산문의 밤>행사를 기획 실행하고, 도서실장을 맡아 학생들의 문학적 소양을 한껏 고양시켜 주었다. 그때 <시와 산문의 밤>에서 멋진 산문을 발표했던 우선덕은 문학의 길로 나아가 소설가가 되었다. 우선덕이 기억하는 새내기 선생님 정서웅의 모습이 흥미롭다.

“약관 23세에, 나중에 들으니 실상은 25세라고 하신, 어리고 우아한 청년이 인천박문여중 1학년 선반 칠판에 ‘정 서 웅’이라고 매력적인 글씨체로 크게 쓴 후 저희를 쭉 둘러보시던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네이버 우선덕 블로그)

그 우선덕에게 정서웅은 “너만은 필을 꺾지 말라고” 느닷없는 말씀을 해주시고 명심보감에 ‘옳고 떳떳한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베토벤’이라는 글귀를 써서 선물해 주었는데 그게 그녀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다. 훗날 유명 작사가가 된 또 다른 박문여중 학생 임선경은 당시의 정서웅을 이렇게 회고한다.

“영화 얘기도 해주시고, 가곡도 불러주시고, 소설 얘기도 해주시고....영화, 음악, 소설, 시, 편지.... 그 어느 것 하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내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것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네이버 임선경 블로그)

 

정서웅이 중학생 우선덕에게 써준 친필 엽서
정서웅이 중학생 우선덕에게 써준 친필 엽서

 

박문여중에서 4년을 근무하고 정서웅은 마침내 모교인 제물포고등학교의 독일어 교사로 부임한다. 1970년의 일이다. 이후 1978년에 동인천고등학교로 옮길 때까지 8년간 정서웅은 제물포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박문여중 학생들에게 했던 것처럼 제고 학생들에게도 시, 소설, 음악, 영화를 들려주며 예술세계에 눈뜨게 하였고, 많은 까까머리 남학생들의 마음에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모두들 제각기 다른 인생의 길로 들어섰지만 제고 교정에서 들었던 정서웅 선생의 말씀은 그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두고두고 삶의 밑거름이 되었다. 정서웅 선생께 배울 수 있는 행운을 누렸던 제고 졸업생들은 그래서 하나 같이 그를 인생의 참 스승으로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제물포고 시절부터 문명(文名)을 떨쳐 정서웅 선생이 천재 시인이라 이름 붙여준 김영승 시인(21회)은 2013년 지훈문학상 수상소감에서 그를 자신의 진정한 스승이자 문학적 뿌리라고 고백하였다.

 

“고1 독일어 시간 첫 시간에 당시 독일어 선생님이셨던 정서웅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판서를 해주셨습니다. Übung macht den Meister! 연습이 대가(大家)를 만든다!

그렇듯 스승은 그 제자의 가슴 속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후 선생님께서는 토마스 만, 하인리히 하이네, 하이데거, 고트프리트 벤 등등 독일 철학과 문학에 대해서 많은 독일어 원문과 함께 저에게는 등대와 북극성 같은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제13회 지훈문학상 수상소감)

 

정서웅은 제물포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인중9회 제고6회 동창회를 조직하고 동기회장을 맡아 동문회를 활성화하였고,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에는 동기인 추연화(나중에 제물포고 교장 역임)와 함께 동기회 이름으로 격려 광고를 싣기도 하였다. 공립학교의 교사 신분으로 유신을 반대하는 광고를 싣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소금과 등대의 역할을 하자”는 광고문구처럼 참 제고인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었다.

정서웅은 동인천고등학교로 옮겨간 후 고려대 독문과 대학원에 진학해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다. 일주일에 수업을 26시간씩 하면서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대학원 수업을 받고 수업이 비는 시간에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리포트와 학위논문을 쓴 끝에 석사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청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교수로 부임한다. 그의 나이 40세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교사 시절 두 딸과 함께
고등학교 교사 시절 두 딸과 함께

 

정서웅은 청주대에서 6년 반을 근무하고 1987년에 숙명여대 독문과로 옮긴다. 2008년에 숙대에서 정년을 맞기까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도서관장, 특수대학원장 등의 보직을 맡아 특유의 성실함과 친화력으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대학교수로서의 정서웅은 숙대 학생들에게 영국신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여전히 많은 학생들에게 다정하고 다감하며 따뜻한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교수로서 많은 학생들에게 문학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불러일으켜 주었지만 학자로서도 수많은 번역과 학술논문을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번역한 책만 해도 수십 권이 된다. 그중에서도 괴테의 『파우스트』나 『이탈리아 여행기』, 헤세의 『크눌프. 로스할데』, 『환상동화집』, 『환상소설집』, 『테신』 등의 고전을 비롯하여 독일 현대문학인 슈테판 하임의 『콜린』. 크리스토프 하인의 『탱고연주자』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정서웅이 일생에 걸쳐 연구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그는 이순을 맞아 펴낸 저서 『독일 문학의 깊이와 아름다움』(민음사 2003년)에서 이들 작품에 대한 애정을 전문적이면서 대중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 이 책에는 독일 문학의 연구가 결코 학계에서만 통용되는 지엽적 작업이 아니라 일반 대중과도 함께 공유하고 말을 거는 보편적 작업이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지론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제목이 ‘독일문학의 깊이와 아름다움’이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 때 그랬던 것처럼 독일 문학을 통해 우리의 삶 또한 깊고 풍요로워지기를 바란 것이다.

정서웅은 특히 번역에서 큰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 연유는 타고난 문학적 감수성에다가 어린 시절부터 갈고 닦아온 우리말 글쓰기의 도저(到底)한 내공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체는 매끄럽고 유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여기에다 선생 특유의 투철한 책임감과 성실함이 더해졌으니 그의 번역은 빛날 수밖에 없다. 그의 꼼꼼함과 성실함은 독일 작가가 쓴 『베네치아와 시인들』을 번역하다가 책에 언급된 장소를 현지에서 직접 확인하고 그 느낌을 경험하기 위해 바로 여행을 떠나 생생한 관찰을 한 후에 번역을 다시 시작했다는 일화가 잘 말해준다.

누가 뭐라 해도 정서웅 번역의 백미는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괴테가 평생에 거쳐 완성한 대작인 『파우스트』 1부와 2부를 정서웅은 오랜 절차탁마 끝에 생생한 우리말로 옮겨 국내 『파우스트』 번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파우스트』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가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베스트 셀러인데 외국 문학 번역서에 흔히 보이는 번역투의 어색한 문체가 아니라 신선하고 감칠맛 나며 매끄러운 우리말이 돋보이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정서웅 선생은 정년 후 느지막이 그림에 입문하여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유의 성실함과 문학성이 그림으로 발현되어 2018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열 정도로 열심이었다. 중고등학교 동기이자 화가인 홍용선 화백은 맑고 서정성 짙은 그의 그림이 꼭 선생의 정신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다 정서웅 선생은 2022년 8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부인이 폐암으로 돌아가신 지 몇 개월 후 서두르듯 황망히 가셨다. 그전부터 친구들에게 아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니 정말 삼 개월도 안 되어 부인 곁으로 가셨다. 30년 이상을 주말마다 서울의 산들을 부인과 함께 오르던 선생님은 저승에서도 여전히 사모님과 다정히 산을 오르고 계실까?

 

정서웅 선생의 작품
정서웅 선생의 작품
산행길에서의 정서웅 선생 부부
산행길에서의 정서웅 선생 부부

 

정서웅 선생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번역서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서웅 선생님은 살아 생전 젊은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했던 스승이었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고전문학 번역서를 통해 더 많은 젊은이들의 스승이자 길잡이로 남을 것이다.

 

또 하나의 가족 가우디와 함께
또 하나의 가족 가우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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