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의 그늘 속, 환경 생태학의 지평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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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의 그늘 속, 환경 생태학의 지평을 열다
  • 김용범
  • 승인 2024.03.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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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이경재 서울시립대학 교수
- 김용범 / 푸른아시아 전문위원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2003년 5월 남산 생태 조사 중인 이경재 교수
2003년 5월 남산 생태 조사 중인 이경재 교수

 

ESG 경영과 생태학

최근에 ESG 경영이란 말이 유행한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그리고 지배구조(Goverment)라는 세 가지 용어의 영문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 ESG에 경영이란 말이 결합된 것이다. ESG 경영은 한 마디로 가치를 추구하는 경영을 하라는 뜻인데 어려운 사람을 돕고, 탄소 중립을 달성하고, 자원 고갈이나 생태계 파괴를 일으키는 활동 등은 하지 말라는 의미다.

이러한 요구가 등장한 배경은 산업화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도 산업화를 이루면서 생태계를 크게 훼손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천이 오염되었고, 수목이 죽어갔다. 70년대 검은 구정물이 흐르던 중량천, 복개된 도시 하천, 대기오염으로 수목이 죽어가고 온산병을 일으켰던 온산, 그리고 제련소가 있었던 장항 지역 등은 그 대표적 사례다. 근래에는 글로벌 기후 위기와 생태계 파괴로 환경 위기는 더욱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는 기업들에게 ESG 경영을 통해 지속가능성에 대한 투명한 공시를 요구하고 있다. 공시 내용에는 기후, 생태계 및 생물 다양성, 그리고 인권 등이 포함된다. 앞으로 인류가 오래 지구에서 살아가려면 과거와 같은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이 같은 인간 생활 방식의 변화 필요성을 수십 년 전부터 역설해온 사람이 바로 한국환경생태학회를 창립한 이경재(1949~ ) 교수다.

 

남산 생태계의 역사 이경재 교수

제물포고등학교를 12회로 졸업한 이경재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남산을 40년 이상 연구했다. 그는 1978년부터 산 숲을 조사,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대학원생 시절에 시작한 서울 남산에 대한 연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남산 연구를 계속했던 이경재 교수는 『서울 남산 품 40년간의 변화』라는 책도 저술했다.

 

제물포고 시절의 이경재 교수
제물포고 시절의 이경재 교수

 

이경재 교수는 2019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서울 남산 숲은 전국의 소나무 숲 중에서도 가장 불량한 숲”이라고 지적했다. 1978년 처음 조사를 시작했을 때, 남산은 강원도 심산유곡 같았다고 회고하면서 너무 빨리 바뀐다고 했다. 일반적인 숲은 약 100년 정도의 긴 시간 동안 서서히 변하는데 남산은 30~40년 만에 바뀔 정도로 변화 속도가 빨랐다는 것이다.

남산의 변화 중 대표적인 것이 2009~2013년 베어낸 신갈나무 식생이다. 참나무 종류의 하나인 신갈나무는 잎을 신발에 깔았다고 해서 그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참나무에 시들음 병이 생겨 8,700그루를 베어낸 것이다. 그런데 베어낸 자리에서 신갈나무가 아니라 단풍나무와 팥배나무가 자란다고 한다. 신갈나무는 씨(도토리)가 떨어져도 싹이 나서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특별시 남산도시자연공원 북사면 신갈나무군락 등 참나무시들음병 확산(2011. 10. 24) 가운데 절단된 나무가 시들음 병으로 죽은 신갈나무임
서울시 남산도시자연공원 북사면 신갈나무군락 등에 참나무시들음병이 확산됐다.(2011. 10. 24) 가운데 절단된 나무가 시들음 병으로 죽은 신갈나무다

 

이 교수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 이후 우리 사회는 자연환경에 대해서 소홀해졌고, 시민도 폐기물이나 미세먼지처럼 자신에게 직접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남산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남산 생태계를 계속해서 모니터링하고 관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국환경생태학회 창립

그가 남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대 임학과 대학원 시절 박사과정 지도교수였던 임경빈 교수의 연구과제가 계기였다. 결국 그 연구과제가 그를 평생 남산에 묶어 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용어조차도 없었던 환경생태학과 도시생태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다.

이 분야에서 일가로 그의 진면목을 나타내 주는 예가 한국환경생태학회 창립일 것이다. 실제 이 학회의 전신은 응용생태연구회였는데, 그 설립 동기가 국립공원 때문이었다. 1967년 지리산이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1980년대에도 관리는 형편없었다.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는 안일한 태도로 관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내실과 합리를 겸한 국립공원 관리를 위해 학회의 필요성을 느낀 이경재 교수는 초기 30여 명의 교수, 연구자들과 ‘한국자연공원학회’ 결성을 준비했다. 그러나 학회 결성은 난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8명이 이경재 교수 집 거실에서 모여 다시 시작한 것이 응용생태연구회였다. 연구회는 매월 일정액의 회비와 함께 회원 중에 프로젝트를 맡아 하게 되는 경우, 거기서 얻어지는 수입의 얼마를 기부받아 연구비에 충당하기로 했다.

그렇게 각자의 회비를 모아 대상 국립공원을 정해 첫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 주제는 산림 식생, 야생조류, 등산로 훼손 및 식생 변화, 이용에 따른 식생 변화 등이었다. 여기서 얻어진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국립공원 관리 방향을 제안하려는 것이었다.

 

응용생태 연구 창간호 표지
응용생태 연구 창간호 표지

 

자비를 털어서 하는 연구이다 보니 재정은 늘 궁핍했다. 하는 수 없이 각 회원의 개별 연구실 인력도 나서서 지원했다. 그런 식으로 연구회는 회원과 회원들 주변 연구원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10년을 지내온 것이다. 그리고 1997년 마침내 환경생태학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연구 결과를 모아 책자를 내는데, 툭하면 인쇄비조차도 제대로 마련 못해 애를 먹었어요. 다행히 인쇄소 사장님 후의 덕분에 최소 실비만 지불하는 식으로 출판을 할 수는 있었으니….” 담담히, 노 교수는 이렇게 그때를 회고한다.

 

새로운 학문 방법의 도입

응용생태연구회에서 연구 활동을 하던 이경재 교수는 1988년 영국 “Forest Research Station”으로 1년간 박사 후 과정 연구원으로 떠난다. 1년 후 귀국한 이 교수는 국내에 ‘접촉각 측정’으로 침엽수 대기 오염의 영향을 분석하는 기법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했다. 접촉각 분석법은 침엽수는 표면이 왁스층으로 되어 있어서 물방울이 그 위에 있을 때 공[球] 형태로 존재하는데, 대기 오염으로 왁스층이 훼손되면 넓게 퍼지는 현상을 이용해 오염도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이 새로운 방법을 이용해 당시 임업연구원에서 전국의 숲을 조사했다.

이 같은 새 연구 기법 도입 사례는 이미 그의 박사 논문에 들어 있었다. 그는 미국의 선진 연구 방법을 도입해 ‘산림 정량화’에 성공했다. 이 교수가 도입한 이러한 연구 기법들이 우리나라 산림 연구의 표준이 되었다고 한다.

 

환경영향평가와 도시 생태 복원

학문에만 집중하던 이경재 교수가 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울산공단(온산공단)에서 배출되는 대기 오염 물질로 인해 숲(해송 숲)이 훼손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 계기였다. 숲이 훼손될 정도면 인간에게도 극히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연구를 지속하면서 그는 생태학자로서 이름이 알려졌던 것이다.

한편, 이 교수는 환경영향평가서가 부실하게 작성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제대로 된 환경영향평가서가 작성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환경영향평가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체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이를 저감시키기 위해서 작성한다. 그러나 환경영향평가제도 시행 초기에는 부실한 보고서가 많았다. 사업 대상 지역에 실제로 나가서 생물상 등을 확인, 조사하지 않는 경우가 꽤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러한 관행을 고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환경영향평가뿐만 아니라 이 교수는 다양한 생태 분야 연구도 진행했다. 생태공원 개념, 생태복원, 생태도시 개념 도입, 도시생태현황지도, 환경생태계획 도입을 추진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5년 5월에 개장한 서울 길동생태공원인데, 이 공원은 이경재 교수가 제시한 생태공원 개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인천을 향한 애정

이 교수는 평생 고향 인천을 향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1995년에 그는 「인천광역시 녹지공원 정책 방향」이란 보고서를 썼다. 애초 이 보고서의 연구 대상 지역은 인천의 내륙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강화도는 조사 범위에서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강화도까지 아울러 한꺼번에 조사해 보고서를 내었다. 이 연구의 파트너였던 기업체 대표가 이번에 다 해버리면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할 거냐고 탓했을 정도였다. 그저 교통비만 지원된다면, 내 고향 일인데 무엇인들 마다 하며, 여력이 있다면 무슨 일인들 스스로 나서지 않겠느냐는 그의 고향 사랑 자세다. 2014년 「인천시장에게 바란다」는 글을 통해 인천이 빨리 생물 다양성 도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02년 길동 자연 생태 공원에서 관련자들과 함께
2002년 길동 자연 생태 공원에서 관련자들과 함께

 

이러한 이경재 교수의 인천에 대한 애정은, 야간대학인 도시과학 대학원생 중 인천 출신에게 특혜를 제공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그 특혜라는 것이 이 교수가 직접 인천에 내려와서 주말 현장 답사를 학생과 같이하는 것이었다. 인천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언제나 기꺼이 참석했고, 신년 모임에는 계양산을 함께 둘러보고 특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곳의 하나가 자유공원이다. 특히 그를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은 자유공원 공원 남쪽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 때문이었다. 이 플라타너스는 1884년 식재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다.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인천에 가면 자유공원을 들러 꼭 한 번씩 껴안아 보라고 권했다는 일화도 있다. 더불어 자유공원 아래 모교 제물포고등학교를 알려주고 자랑스러워해서 타지 출신 제자들까지 모교 교훈인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엄격하지만 솔선수범한 스승

제자들은 이경재 교수를 강하지만 빈틈이 없는 분으로 기억한다. 수준이 되지 않으면 석사과정도, 석사학위도, 박사학위도 주지 않아 어떤 학생은 상처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교수는 강한 리더십의 소유자로서 연구실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제자들이 논문이나 보고서를 쓰면, 이과생이라도 문장이 약해서는 안 된다며 빨간펜 선생처럼 하나하나, 토씨까지 확인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주말에도 그의 제자들은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이경재 교수는 늘 제자들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학생과 함께 하느라 당연히 주말에 있는 경조사에는 갈 수가 없었다. 낭랑한 목소리, 활기찬 목소리였지만, 혹시 수업 중에 학생이 졸면 그건 자신의 모든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고 스스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연구비는 모두 제자 육성에 투자했다. 국내에서 박사를 하면 유학파에게 밀릴 수 있으니 해외 답사 많이 해야 한다며 여름엔 유럽, 겨울엔 일본으로 제자들과 답사 여행을 다녔다. 연구비 운영을 늘 투명했다. 교수 연구비 부당 사용 문제가 사회에 대두되었을 때, 오히려 모범사례가 되었다고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한다. “공부를 할 거라면, 돈에는 신경 쓰지 말라” 이 교수는 부친이 말씀대로 산 것이다.

오로지 제자 육성에만 힘을 쏟은 이경재 교수에게는 경조사 참여도 없었고, 연구 외에 다른 친구가 없었다. 학생들을 벗 삼아 학문에 매진했다. 학생을 위한 그의 진심 어린 교육 덕분에 2014년 정년 퇴임 당시까지 제자 박사 20명, 일반대학원 석사 51명, 그리고 도시과학대학원 석사 85명을 배출했다.

 

생태적 삶, 자신에게도 적용하다

제물포고등학교 시절, 생물반 활동을 한 것이 전부라는 이 교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 임학과에 진학했고, 박사학위를 마친 후 1981년부터 영남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84년 서울시립대 조경학과로 옮겼고, 같은 대학에서 2014년에 정년을 맞았다.

생태학을 연구한 까닭인지 육식은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FESCO 식단을 실천한 것인데, 육식은 생태적으로 많은 부정적 영향을 일으킬 수 있는 음식이니 그랬을지도 모른다. 술은 좋아하면서도 양주는 마시지 않았는데, 양주는 수입하려면 바다를 건너는 수송과정에서 배가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는 또 평생 운전면허증을 가지지 않았다.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학자로서 자연생태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삶의 여러 가지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담배, 운동, 그리고 작은 글씨, 이 세 가지이다. 산불로 인해 산림이 훼손될까 걱정해 담배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또 산림을 대량으로 훼손해야만 하는 골프와 스키를 즐기지 않았다. 종이는 늘 이면지를 활용했으며, 종이 낭비를 줄이기 위해 글씨를 매우 작게 쓰는 것이 버릇이었다. 한번은 영국에서 엽서가 왔는데 작은 글씨가 A4 용지 한 페이지도 넘는 분량만큼 빼꼭하게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종이도 목재로 만드니 산림 훼손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생물 다양성 시대를 꿈꾸며

국립공원 생태연구는 늘 산에 올라야 하는 일이다. 이경재 교수는 낮에는 땀을 빼고 밤에는 술로 수분을 보충하는 삶이라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평했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숨이 차 헐떡이게 되는데 그는 산에 올랐다. 회원들과, 제자들과 산에 올라가는 일을 수십 년 지속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태계를 연구했고 학문적 업적과 제자들을 남겼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 때문에 자연은 인간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잘못된 이용, 잘못된 영향으로 지구촌에 사는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 스스로 여섯 번째 대멸종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지금까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해온 방식은 전혀 현명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경고하고, 막으려 노력하며 그 방법을 실천한 사람이 이경재 교수이다.

조이불강 익불석숙(釣而不網 弋不射宿, 낚시는 했으나 그물질은 하지 않았고, 주살로 새를 잡기는 했지만 잠자는 새는 쏘지 않았다.)라는 공자(논어) 말씀대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했던 이경재 교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성심을 다해 노력했다. 선진적 방법 도입에 주저하지 않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바로 잡으려 애썼다. 아울러 자신이 배운 것을 현실에 적용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으며, 그것이 이어지도록 전력을 다해 제자를 가르쳤다. 그의 삶을 보면 마치 세계가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삶의 해법이 보이는 듯하다. 교수로서 살아온 지난 40년 여정이 앞으로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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