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군 1번 잠수함 초대 함장, 안병구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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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군 1번 잠수함 초대 함장, 안병구 제독
  • 김락기
  • 승인 2024.03.1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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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29) 안병구 제독 - 김락기 / 문학박사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안병구 제독(〈국방일보〉2014년 11월 11일자)

 

한국 해군의 게임체인저 ‘잠수함’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신기전〉은 명나라의 압력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종의 로켓무기인 신기전(神機箭)을 개발해 결국 명나라의 대군을 물리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이 폭발해 상대를 공포에 떨게 하는 장면은 비록 허구라 하더라도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고려 말기인 1380년 음력 8월,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 진포(鎭浦)에 몰려든 왜구 선단 500여 척을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포를 이용해 궤멸시킨 고려군의 대승은 실제로도 고려군에게 환희를, 왜구에게는 공포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6.25 사변 당시 북의 인민군에 비해 각종 무기, 무장에서 열세에 놓여 고난을 면치 못했던 남의 우리 국군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70여 성상 꾸준히 전력을 향상시켜 이제는 세계 유수의 강군으로 거듭났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억지력으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도, 북한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있는 정권이 번갈아 들어서면서도 우리 국군의 전력강화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는 좌우를 막론하고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육군과 해군, 공군을 기본으로 하는 국군의 편제는 창설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각 군의 세부 전력 구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그중에서도 해군의 잠수함은 전에 없던 전력이 추가된 것이어서 전차, 함정, 전투기 등 주력 무기의 개량, 교체 과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다.

 

“앞서 해군은 지난해 7월 환태평양훈련(림팩)에도 참가, 청·황군으로 나눠 실시된 훈련에서 잠수함 이종무함은 훈련 종료 시까지 황군에서 유일하게 생존한데다 단 한 차례의 고장도 없이 가상 적함대 13척을 격침시키는 최고의 전과를 올려 탑건의 영예를 차지한 바 있다.”(〈연합뉴스〉 1999년 3월 26일  '해군잠수함 어뢰 일격에 1만t급 순양함 격침')

림팩 이종무함 활약 기사. 동아일보 1998년 9월28일.
림팩 이종무함 활약 기사. 동아일보 1998년 9월28일.

 

1998년 미국 주도의 세계 최대의 해군 훈련에 처음 참가한 한국 잠수함의 이런 활약에 놀란 미국 태평양 잠수함 사령관은 우리 해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런 성과의 뒤에는 미국의 잠수함 운용에 대한 관심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정부의 잠수함 도입 계획에 맞춰 맡겨진 업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한 한 사람의 땀방울이 스며있다.

이종무함은 장보고급 잠수함 중 여섯 번째로 건조되어 1996년에 배치된 함정인데, ‘장보고급’이라는 명칭에서 보듯, 한국 해군 최초의 잠수함은 1993년에 취역한 장보고함이었다. 이후의 잠수함을 국내에서 건조한 것과 달리 장보고함은 독일에서 건조한 것을 한국 해군이 인수하여 배치한 형태였는데, 그 전 과정을 주도하며 최초의 잠수함장으로 활약한 사람이 바로 인천이 키운 안병구 제독이다.

 

장보고함 실전배치 기사(〈한겨레신문〉 1993년 6월 3일)

 

인천에 유학 온 형제, 한국 해군의 간성(干城)이 되다

안병구는 1949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나 인천으로 유학했다. 창영초등학교를 거쳐 인천중학교를 16회로, 제물포고등학교를 13회로 졸업했다. 동기들보다 1년 늦게 해군사관학교에 제28기로 합격해 1974년 임관했다. 해군사관학교 28기 합격자는 모두 140명이었는데, 공교롭게 수석입학자인 신원식(申原植)도 같은 교정에서 꿈을 키운 제고 1년 후배였다.

 

고교 재학 당시 안병구(좌, 제고 13회 졸업앨범), 해군사관학교 28기 합격자 발표 기사(우)

 

안병구의 해사 입학은 친형 안병태 제독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1939년생으로 안병구와 10년 터울의 안병태 제독은 고향 당진을 떠나 인천에 유학해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사 17기로 임관해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해군참모총장에 오른 인물이다. ‘대양해군’의 주창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2008년 2월 19일 CBS라디오의 인터뷰를 2월 21일 노컷뉴스에서 옮겨 보도한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잠수함, 그 하고 싶은 이야기들 – 안병구 장보고함 초대함장”에서 직접 밝힌 내용이 있다.

 

“부모님은 전형적인 농부이셨는데요. 저희 가족이 6남2녀였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이렇게 시골에서 지내면 안 되겠다 생각하셔서 제 바로 위의 형님을 공부시켜야겠다고 데리고 인천으로 오신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그 뒤로 저도 인천에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죠”

 

부모님이 6형제 중에 공부를 할만한 아들로 안병태를 꼽아 인천으로 간 뒤에 어린 안병구는 “우리는 시골에 있었고요. 그러다가 가만 보니까 저도 형에게 가야겠더라고요. 그래서 7살 때인가 혼자 한진에서 통통배를 타고 인천으로 갔어요. 인천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형님댁으로 찾아가서 그때부터 인천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인천에는 당진과 서산 등 충남 해안가 출신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는데, 안병구 형제의 출향과 인천에서의 학업은 그중에서도 상당히 빠른 편이며 또 성공적인 결실을 맺은 셈이다.

해군참모총장 안병태 제독 임병기사(한겨레 신문 1995년 3월26일)

 

안병구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인 김식훈 아쿠아프로펄션엔지니어링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의 안병구에 대해 아주 의리있었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친구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있으면 대신 나서서 싸울 정도로 정의감이 넘쳤는데, 넉넉지 못한 형편에 신발이 좋지 않아 잘 싸우라는 의미로 자신의 운동화를 빌려준 적도 있다고 했다. 실례겠지만 왠지 까무잡잡한 피부에 까까머리의 ‘깡다구’가 넘치는 똘똘하게 생긴 10살 전후의 소년이 떠오른다.

고교 시절에는 공부도 잘하고, 축구를 비롯한 운동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동기였다며 해군 장교로서 맨바닥에서 잠수함 전력을 일구어 간 데에는 그러한 어린 시절의 성품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예! 잠수함을 배우고 왔습니다!”

안병구는 “인생의 길이란 결국, ‘사람과의 만남’에서 방향이 잡히는 것일 텐데 나의 해군 장교의 길은 19년 선배인 이종수(李種秀) 제독(9기생)과의 만남으로 나도 모르게 이미 정해졌던 방향을 걸어온 것 같기만 하다”고 했다. 1976년 5월 하순 미국 해군에서 대잠전 유학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해군작전사령부 훈련단 교관으로 발령받아 전입신고를 하러 갔을 때 만난 이종수 제독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사령관이 물었다. “자네는 무얼 배우고 왔나?” 함께 전입신고를 하러 온 선배 대위는 “예! 대잠전 전술을 배우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 묻는다 . “자네는 무얼 배우고 왔나?”. 생각 끝에 안병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예! 잠수함을 배우고 왔습니다!”였다.

잠수함에 맞서 싸우는 전술을 배우라고 보낸 유학길에서 정작 잠수함을 배우고 왔다는 대답은 확실히 좀 이상하다. 이종수 제독의 질문이 이어진다. “오 ~그래! 자넨 대잠전 과정을 갔다 온 게 아닌가?”, “예! 대잠전 과정을 갔다 왔으나 더 배운 것은 잠수함입니다!” 같은 대답이었다.

잠수함을 배웠다고 당당히 말하는 후배 장교에게 이종수 제독은 본인이 직접 번역한 일본 잠수함에 관한 책자를 두 권을 주며, “안 중위는 이제부터 만사 제쳐놓고 잠수함 공부만 해라. 알겠나!”라고 당부했다. 돌아서 나가는 안병구의 뒤로 이종수 제독의 혼잣말이 들렸다. “해군에 잠수함 전문가 하나 나오겠구먼……!”

배우라는 건 안 배우고 엉뚱한 걸 배워 왔다고 답하는 신참 장교를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그 대답에서 한국 해군 잠수함의 미래를 내다본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서로 알아본 두 사람의 만남은 현재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우리 해군 잠수함 전력의 뿌리가 된 셈이다. 뭉클하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장면이다.

시간은 흘러 1992년이 되었다. 그 사이 안병구는 이종수 제독의 배려와 지시로 1983년 1월 초부터 해군이 확보해야 할 잠수함의 최고수준 요구서를 작성했고, 프랑스 주재 대사관 국방무관 보좌관을 거쳐 한국 해군 최초의 잠수함 승조원 선발과 교육을 담당했으며, 마침내 첫 잠수함 함장이 되어 독일 HDW사에서 제작한 장보고함을 인수하는 숨가쁜 여정을 지나왔다.

 

“1992년 10월 14일, 드디어 장보고함을 인수했다. 장보고함을 올려놓은 리프팅 도크 앞 광장에서 인수식이 열렸다. 본국에서 해군 참모총장과 사업단장, 대우조선 사장과 임원 몇 명이 오고, 주독한국 대사, HDW조선소 회장단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의례적인 순서가 지나고 장보고함 마스트에 올려져 있던 독일 국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올리는 순간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구령하던 나의 목이 떨렸다. 킬시 경찰 밴드가 애국가 연주를 시작하는 순간엔 눈물이 나올뻔했다. ‘잠수함’이란 것을 알게 된지 16년 만이다.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헤쳐왔느냐. 그때까지의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벅차고 감격스럽고 후련했다.”(안병구, 《잠수함과 함께》, 다물아사달, 2017, 154~155쪽)

 

1992년 10월 14일 독일 HDW 조선소에서 장보고함 인수 후 안병구 함장과 승조원 기념 촬영 (〈국방일보〉2014년 11월 11일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잠항의 추억’영원히 잊을 수 없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1976년 이종수 제독과 나눈 대화 이후로 16년이 흘렀다. 안병구의 고군분투에 더해진 장병들의 열성은 만재배수량 1,290톤의 장보고급 잠수함 9척의 전력화에 이어 1,860톤급의 손원일급 잠수함 9척, 3,700톤을 넘는 도산 안창호급 잠수함 2척을 운영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도산 안창호급은 진수된 1척을 포함한 7척을 더해 모두 9척을 확보하는 계획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비로소 명실공히 잠수함 강국이 된 것이다.

안병구의 후배 장교는 이렇게 말한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장보고함은 부대창설 이래 1997년 하와이 파견훈련, 2004년에는 림팩훈련에 참가해 미 항모 존 스테니스(John C. STENNIS) 호 등 총 43회에 걸쳐 30만 톤을 격침했다. 당시 미 태평양사령관은 장보고함이 가장 성공적인 훈련을 했으며,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며 대한민국 잠수함 부대의 저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 우리 잠수함 부대는 20년간 단 한 차례의 사고 없이 잠수함을 운용하고 있으며, 장보고함은 2011년에 무사고 안전항해 20만 마일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국방일보〉2012년 10월 18일 해군 9전단 이용태 소령, “장보고함 부대창설 20주년)

독일 잠수함부대의 대부라는 칼 되니츠 제독의 회고록을 직접 번역해 출간했다는 데서는 잠수함에 대한 안병구의 진심이 느껴진다. 일일이 다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난관을 극복해 낸 원동력은 역시 잠수함에 대한 진심인 것이다. 퇴역 후에도 잠수함 관련 회사에서 한국 최초의 잠수함 수출을 성사시키는 활약을 하기도 한 안병구는 여전히 잠수함과 관련한 꿈을 꾼다.

 

안병구 제독의 번역서 출간 기사(〈조선일보〉 1995년 7월 28일)
안병구 제독의 번역서 출간 기사(〈조선일보〉 1995년 7월 28일)

 

“잠수함은 평화 시에는 조용한 ‘존재의 위협’이지만 전쟁 시에는 적에게 선도적, 최종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확실한 ‘전쟁 수단’이다. 우리는 조속히 ‘완전한 잠수함’인 핵 추진 잠수함을 확보해야 한다. 확실한 전쟁 수단을 갖고 있어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해군 첫 핵잠수함의 초대 함장이 또다시 당시의 색깔을 담은 책을 쓸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것이 졸저를 접는 바람이다.”

 

2017년 10월 펴낸 회고록 《잠수함과 함께》(다물아사달)의 후기 맨 마지막에 안병구가 쓴 글귀다. 원자력 에너지를 동력으로 해서 이론상 수십 년간 바다 밑에서 활동할 수 있는 핵 추진 잠수함의 꿈은 비단 안병구의 꿈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북과 대치하는 현실, 나아가서는 중국, 러시아, 일본에 미국까지 더해 세계 열강의 한복판에서 평화로운 일상과 미래를 꿈꾸는 우리 국민 모두의 염원일 것이다.

은퇴한 노 제독의 간곡한 바람대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하고 평화로운 한반도, 세계에서 존중받는 통일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길 소망한다. 드러나지 않는 바닷속에서 치열하게 싸웠고, 싸워나갈 한국 잠수함 전력의 선두에 우리 인천의 인중·제고인 안병구가 서 있었다는 것도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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