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전시체제의 인천항, 미곡 수탈의 창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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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전시체제의 인천항, 미곡 수탈의 창구가 되다
  • 김광성
  • 승인 2024.05.03 0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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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7) 1940년대 인천 축항의 풍경
1940년대 인천 축항 풍경(143x74cm)
1940년대 인천 축항 풍경(143x74cm)

 

축항이 완공되고 이십여 년이 지난 부두의 모습이다.

인천항은 전례없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 대형 선박들이 미곡 집산지인 인천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각지에서 운송된 곡물을 싣고 서둘러 떠났다.

 

이미 일제는 만주사변을 촉발 하고 이어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은 일본은 1941년 진주만을 공습,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리는 긴박한 상황에 돌입해 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전시체제로 개편하여 경제를 완전히 통제하고

인천항을 미곡 반출 창구로 활용하였다.

 

식민지 조선은 이제 지옥과 같은 암흑 속으로 내던져 졌다.

쌀을 죄다 퍼주고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이나 푸석푸석한 안남미를

배급으로 먹는 것도 서러운데,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고자 하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은

더더욱 숨통을 죄었다.

우리말 사용 금지,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황국 신민 서사,

학도병, 여자정신대, 공출...

사기와 협박과 회유와 유괴가 난무했다.

화로, 놋그릇, 제기를 비롯한 모든 쇠붙이가 공출 대상이 되어버렸다.

 

1940년대 인천항(75x44cm)-
1940년대 인천항(75x44cm)-

 

징발, 징용, 징병, 이란 명목의 강제 연행,

일본이나 사할린의 노동자로 끌려 가는 것 보다

싱가폴이나 미얀마, 사이판 등지의 전선 노무자로 끌려 가는 것을 더 무서워 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리는 것이었다.

공출은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반 인륜적 수탈이었으며

가장 악랄한 정책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모습들을 담은 사진 자료에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수탈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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