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 조선시대 산수화 중 최고 걸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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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 조선시대 산수화 중 최고 걸작품
  • 이창희
  • 승인 2012.03.23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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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몽유도원도 한국에 반환해야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그림이며, 현재 전시를 하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들은 이 그림을  자신들의 국보로까지 지정했다. 조선 산수화의 걸작 중 걸작인 현동자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견은 세종 29년(1447년) 4월 21일, 화원으로서 출세할 수 있는 최고직인 종6품의 별제와 선화가 전부였던 시기에 예술을 사랑했던 세종의 총애로 정4품인 체아직호군이라는 파격적인 직책을 받았다. 안견은 출근하자마자 안평대군이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안평대군 사저인 수성궁으로 달려갔다.

안평대군(1418~1453)은 시, 서, 화, 음악 등 다방면에 훌륭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왕자가 여덟명 있었는데, 그 중 문종, 세조, 안평대군은 글씨를 잘 썼고, 그림과 음악은 영웅대군과 안평대군이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부왕의 풍부한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왕자는 바로 셋째 안평대군이었다. 예술을 사랑한 안평대군은 호탕한 성격과 자유분방한 생활태도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며 예술적 재능이 있는 사람을 몹시 아꼈던 당대 최고의 문객이자 풍류남아였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안견에게 들려주고, 그 꿈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다. 꿈을 그림으로 그리다니, 그것도 자신의 꿈이 아닌 다른 사람의 꿈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니, 보통 사람 같으면 고민을 할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안견은 3일만에 그림을 완성하였다. 몽유도원도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게 됐다.

그림을 살펴보면 파격적인 구도, 엄청난 정성을 들인 붓 놀림, 세부 부분의 높은 완성도와 전체와의 통일성 등 조선 최고의 산수화 대작이 3일만에 완성됐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 당시 실정으로 보아 꿈 이야기를 들은 날 하루는 비단 등을 구하느라 하루가 갔을 것이고, 그 다음날 하루에 그림을 다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아마 가능했던 이유는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거기에 시를 얹어 합작하는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맨 오른쪽 도원경 중간 부분이 현실세계에서 도원경으로 연결되는 험난한 기암괴석군, 맨 왼쪽이 현실세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두루마리 그림이기에 그림을 펼치는 순간 가장 먼저 안평대군이 보고 싶었던 부분, 바로 도원경의 모습을 배치한 것이다. 원래 꿈이야기상으로는 현실세계부터 나와야 정상적이지만 그림은 이러한 일반론을 뒤집고 먼저 도원경을 그렸다. 기암괴석과 도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모습을 한 화면에 절묘하게 배치해 도원경이 더욱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전체적인 구도, 공간의 기술적 처리의 탁월함, 평원과 고원의 대조, 사선운동을 활용해 달성한 웅장함, 그리고 실경적 요소와 환상적인 세계의 교묘한 구현 등에는 안견의 독자적인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돼 정선의 『인왕재색도』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산수화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몽유도원도는 그저 ‘아름다운 산수화의 하나’로만 기록됐을 것이다.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삼문,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신 23편의 자필 찬사가 연결돼 있다. 그 당시에는 그들의 운명이 고작 6년 후 어떻게 엇갈릴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6년 후 한 살 위인 수양대군이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세종이 애써 키운 충신들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모반의 수괴로 몰아 강화도로 유배시킨 후 사사시키고는 결국 단종에게터 왕위를 찬탈하고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는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조선의 예원을 주도했던 대수장가이자 예술을 사랑해 조선 문예를 부흥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풍류왕자 안평대군은 36세란 꽃다운 나이로 세상과 작별하고 만다.

그림에서 안평대군과 박팽년의 뒤에 갑자기 나타난 최항과 신숙주는 그림이 마치 앞을 암시한 것처럼 자신들을 아끼고 보살핀 안평대군의 은덕을 배신하고 수양대군 편에 서서 쿠데타에 가담한다. 신숙주는 세조의 오른팔이 되어 단종의 처형을 주장했으며, 최항도 쿠데타에 앞장서 정난공신으로 된다. 계유정난 2년전 궁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무렵 안견은 안평대군의 호출로 ‘무계정사’를 방문한다. ‘무계정사’는 자하문 밖에 있는데, 안평대군이 몽유도원 꿈을 꾼 후 가장 경치가 비슷한 곳을 찾아 다니다 거처를 마련하고 이름 붙인 곳이다.

안평대군은 안견을 반갑게 맞이하며 중국서 들여온 용매먹을 보여주며 한 번 써보라고 한다. 언제나 진귀한 물건을 새로 구입하면 안견에게 사용케 해 그의 안목과 실력이 느는 것을 기뻐하는 안평이었다. 하지만 안견은 대세는 기울었고 이번 기회를 통해 몸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용매먹을 몰래 소매 속에 감춘다. 먹이 없어진 걸 알고 안평대군이 노복을 다그치는 순간 그림을 그리던 안견이 몸을 일으킬 때 소매속의 먹이 떨어져 발각된다. 안평대군이 노여움으로 안견에게 “다시 오지 말라”고 호통을 쳤고, 안견은 묵묵히 서 있다 돌아갔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궁중화가였던 안견이 먹이 탐나 도둑질 했을 리 만무하며 왜 그가 그랬는지 모를 안평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안일을 위해 사대부가 아닌, 일개 미천한 궁중화사가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배신이 용서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견은 결국 세조 연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많은 화가에게 큰 영향을 줘 ‘안견파’라는 명칭이 사용될 정도로 조선 전기 화단에 일획을 긋게 된다.

시문에 참여한 인사들 중 김종서 이현로 이개는 죽임을 당했고, 신숙주 정인지는 수양과 손을 잡아 권력을 유지했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단순한 산수화를 넘어 권력과 정치의 비정함이 새겨 있는 우리 선조의 아픈 기억이다. 더군다나 이 그림이 안타깝게도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은 이제 몽유도원도를 한국에 반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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