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편 옹야(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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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편 옹야(雍也)
  • 이우재
  • 승인 2010.03.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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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편 옹야(雍也)

1, 子曰 雍也可使南面.
  仲弓問子桑伯子. 子曰 可也 簡. 仲弓曰 居敬而行簡 以臨其民 不亦可乎. 居簡而行簡 無乃大簡乎. 子曰 雍之言然.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옹은 임금이 될 만하도다.”
  중궁이 자상백자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괜찮은 사람이다. 소탈하다.”
  중궁이 말하길 “평소에 몸가짐을 공경히 하면서 행동은 소탈하게 하여, 그로써 백성에게 임한다면 괜찮겠으나, 평소 몸가짐이 소탈하면서 행동 또한 소탈하다면, 너무 지나치게 소탈한 것 아닙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옹의 말이 옳도다.”

  <해설> 옹(雍)은 염옹(冉雍)이다. 남면(南面)이라 함은 임금이 신하를 대면할 때,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해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염옹이 임금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염옹이 비록 안연 등과 더불어 공자의 문하에서 덕행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이라고 하나(선진 2), 임금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까지 한 것은 파격적인 칭찬이 아닐 수 없다.
  중궁(仲弓)은 염옹의 자다. 자상백자(子桑伯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바로 미루어 보아 대단히 소탈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간(簡)은 소탈하여 번거로운 것이 없는 것이다. 거(居)는 평소에 한가로이 있는 것을 말한다. 평소에 몸가짐을 공경히 하면서 행동을 소탈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엄격하면서 남에게는 관대한 것이다. 평소 몸가짐까지 소탈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까지 관대한 것이니, 이는 방일(放逸)이다. 공자가 자상백자를 평하기를 소탈한 사람으로 괜찮다고 한 것에 대해, 중궁은 그의 소탈함이 지나쳐 방일함으로까지 나아간 것을 지적하고 있다. 진정한 군자는 항상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남에게는 관대한 법이니(躬自厚而薄責於人―위령공 14), 중궁은 이 대화로 미루어 볼 때 진정 군자의 풍모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염옹의 날카로운 지적에 대해 공자는 그의 말이 옳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이 대화만 갖고도 공문(孔門)의 학풍을 능히 엿볼 수 있다. 스승의 잘못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하는 제자, 그리고 그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는 스승, 진정 바람직한 사제간의 모습이다. 우리가 유교하면 떠올리는 권위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모습은 진정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고주에서는 仲弓問子桑伯子 이하를 별개의 장으로 나눈다.
 
  <보충> 공자는 당시 사회 혼란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예의 붕괴에서 찾았다. 그러기에 그는 예를 참람하는 사람들을 비판했으며, 무너져 가는 예를 복원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런데 공자가 복원을 염원한 소위 주례(周禮)는 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 혈통에 의해 세습되는 신분제 사회의 상부구조요, 이데올로기이다. 그런 공자가 여기에서는 신분제 사회를 뿌리부터 부정하는 말을 하고 있다. 자신의 제자인 염옹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지위인 임금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염옹은 얼룩소의 새끼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子謂仲弓曰 犂牛之子―옹야 4), 그 출신 성분이 비천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회적으로 비천한 신분 출신의 인물이 한 사회의 최고의 지위인 임금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말은, 신분제가 부정되는 오늘날에도 파격적인 말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당시 사회에서, 그것도 예의 복원을 누구보다 열심히 주창한 공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앞에서도 누차 강조했지만 공자가 주장한 복례는 공동체적 삶의 회복이었지, 주초 사회로의 일방적인 복귀는 아니었다. 그는 씨족공동체가 해체되어 가면서 공동체의 보호로부터 방기되어 고통에 신음하던 백성의 행복을 위해, 공동체적 삶의 복원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공자의 주장은 주례(周禮)의 복원이라는 면에서 외형적으로는 반동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실 내용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요소가 훨씬 더 많았다. 민본주의적 정치를 주장한 것이나, 학덕을 갖춘 군자에 의한 정치와 행정을 주장한 것, 그리고 교육의 평등을 주장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여기 이 대목, 즉 비천한 자기의 제자가 임금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는 말 앞에서는 그 빛을 잃는다. 우리 나라 고려 때 노비의 반란을 주도하다 처형당한 만적이 했다는 저 유명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라는 말이 공자다운 어투로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까지 신분제를 부정하고 있는 공자의 사상을 복례(復禮)라는 이름 때문에 일방적으로 반동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애공이 묻기를 “제자들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길 “안회라는 자가 있어, 학문을 좋아하고, 노여움을 옮기지 않았으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명이 짧아 일찍 죽고 지금은 없습니다. 이후로 학문을 좋아하는 자를 듣지 못했습니다.”

  <해설> 학문을 좋아한다는 것은 먹는 데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며, 거처하는 데 편안함을 찾지 아니하고, 일을 행하는 데 민첩하고 말은 삼가며, 도를 지닌 선생을 찾아 가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학이 14).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다(不遷怒)는 것은 갑에게 화난 것을 을에게 화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상 때문에 노여워하는 것이므로, 그 대상이 아니면 노여움이 마음 속에 남아 있지 않으며, 따라서 노여움을 옮기지 않는 것이다.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不貳過)는 것은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 것으로, 부단히 자기 수양에 힘쓰는 모습이다.
  안회가 비록 가난하였으나 학문하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고(옹야 9), 그 마음가짐이 노함을 옮기지 아니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니, 스승인 공자의 총애를 받을 만하였다. 그런 안회이었기에 그가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孔子家語』에서는 31세 때라고 한다. 그러나 청의 유보남은 41세 때라고 고증하고 있다), 공자는 하늘이 자기를 버렸다고까지 하며 슬퍼하였다(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선진 8). 여기에서도 요절한 안회에 대한 공자의 그리움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다산은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에 대해 좀 색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산에 의하면 불천노(不遷怒)는 빈천(貧賤)과 우환(憂患)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하늘이나 사람에 대해 원망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또 불이과(不貳過)의 이(貳)는 기(歧)로 갈림길이다. 잘못이 있을 때 갈림길에서 망설이지 않고 용감히 고치는 것이 불이과(不貳過)다.

  <참고> 선진 6에도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의 문답이 계강자와 공자 사이에서 전개되고 있다. 
  안회의 죽음에 대한 공자의 비통함은 선진 8, 9, 10에 절절히 나타나 있다.

3, 子華使於齊. 冉子爲其母請粟. 子曰 與之釜. 請益. 曰 與之庾. 冉子與之粟五秉. 子曰 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裘. 吾聞之也 君子周急不繼富.
  原思爲之宰. 與之粟九百. 辭. 子曰 毋 以與爾鄰里鄕黨乎.
  자화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자, 염유가 그 모친을 위하여 곡식을 달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한 부(釜)를 주어라.”
  염유가 더 달라고 청하니, “한 유(庾)를 주어라.” 하셨다.
  염유가 다섯 병(秉)의 곡식을 주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적이 제나라에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털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 ‘군자는 곤궁한 사람은 도와주지만, 부유한 자에게 더 보태주지는 않는다.’고 하더라.”
  원사가 공자의 가재를 맡으니, 그에게 곡식 구백(九百)을 주었다.
  원사가 사양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양할 것 없다. 네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라.”

  <해설> 자화(子華)는 공서적(公西赤)의 자이다. 공야장 8에서 공자가 외교에 재능이 있다고 평가한 인물이다. 제나라에 사자로 간 것은 노나라의 사자로서가 아니라, 공자의 사자로서 간 것이다. 따라서 염유가 그를 대신해 자화의 모친에게 곡식을 줄 것을 공자에게 청했던 것이다. 부(釜), 유(庾), 병(秉)은 모두 곡식을 재는 도량형 단위로, 1부는 여섯 말 네 되(六斗四升), 1유는 열여섯 말(十六斗), 1병은 백육십 말(十六斛〓百六十斗)이라고 한다. 현재의 단위로 얼마인지는 불분명하나, 5병은 125부다. 염유는 공자가 원래 말한 것보다 125배나 더 주었다.
  주(周)는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이요, 급(急)은 곤궁(困窮)한 것, 계(繼)는 남음이 있는데 더 보태어 주는 것이다.
  원사(原思)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원(原), 이름은 헌(憲), 자는 자사(子思)이다. 공자보다 36세 연하라고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전해진다. 원헌은 공자가 죽은 후 늪 지대에 숨어살았다. 어느 날 위(衛)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자공(子貢)이 그를 찾아왔다. 자공은 초라한 행색의 원헌을 보자 안타까워하며 말하였다. “병색이 완연하군요.” 원헌이 말하였다. “나는 ‘재물이 없는 사람을 가난하다고 하고, 도(道)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들었다고 한다.’라고 들었소. 내가 비록 가난하기는 하나 병들지는 않았소.” 자공은 몹시 부끄러웠다. 이후 원헌과 헤어져 돌아간 뒤에도 자공은 이 때의 실언을 평생의 수치로 여겼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헌이 명리(名利)에 초연했음을 알 수 있다.
  재(宰)는 가재(家宰)로, 공자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직책이다. 원헌이 공자의 가재를 맡았던 것에 대해 고주나 신주 모두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司寇, 지금의 법무장관)였을 때의 일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 직을 맡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어 확인하기 어렵다. 자세한 것은 술이 16의 <보충>을 참고하기 바란다. 곡식 구백은 단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얼마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고주의 공안국은 900두(斗)라고 한다.  
  5 가(家)를 가리켜 인(隣)이라 하고, 25 가(家)를 리(里), 12,500 가(家)를 향(鄕), 500 가(家)를 당(黨)이라고 한다. 고주의 정현의 설이다.
  공자는 자화에 대해서는 곡식을 주고자 하지 않았고, 원사에 대해서는 받기 싫다는 것을 억지로 주려고 했다. 서로 상반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원사의 경우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원사에게는 직책 수행의 대가, 즉 녹(祿)으로서 준 것이다. 응당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공자가 주려고 한 것이고, 원사가 정 받기 싫다면, 그것을 이웃에게라도 나누어주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자화의 경우는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자화가 어떤 위치에 있었고, 또 무슨 용무로 제나라에 갔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공자는 자화에게 그 일에 대한 별도의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염유는 왜 공자를 말을 거역한 것일까? 염유가 자화의 가난을 걱정하여 그 모친을 위해 곡식을 청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자화가 제나라에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털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염유는 공자가 자화를 제나라에 사자로 보냈으므로, 그 일의 대가를 마땅히 지불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말로 표현한다면, 공자는 출장에 대한 약간의 수고비 정도를 생각했던 것 같고, 염유는 출장에 대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자 사이에 그렇게 금액의 차이가 많이 날 이유가 없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염유와 공자 사이의 경제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4, 子謂仲弓曰 犂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공자께서 중궁에 대해 이르시기를 “얼룩소의 새끼라 하더라도 색깔이 붉고, 뿔이 가지런하다면, 비록 사람들이 쓰지 않으려고 해도, 산천의 신들이 그냥 내버려야 두겠느냐?”

  <해설> 犂牛는 얼룩소다. 주나라에서는 색깔이 붉은 소를 제사의 제물로 쓰고, 얼룩소는 쓰지 않았다. 성(騂)은 색깔이 붉은 것이고, 각(角)은 뿔이 가지런한 것이다. 색깔이 붉고 뿔이 가지런하면 제물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이다. 사람들이 쓰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은 얼룩소의 새끼라는 그 출신 때문에 제물로 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천의 신들이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은 산천의 신들은 그 출신을 따지지 않고 제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염옹이 임금이 될 자격이 있다는 본 편 1장과 함께 공자가 세습적인 신분 질서에 얽매이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유명한 말이다.
  한편 다산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다산에 의하면 이우(犂牛)는 얼룩소가 아니라 검은 소로 천신(天神)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색깔이 붉은 소는 검은 소보다 천(賤)한 것으로, 천신에게 바치는 제물로는 쓰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천신에게 바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산천(山川)의 신에게는 제물로 바칠 수 있다. 따라서 중궁이 비록 자기 아비만은 못하다 하더라도 학덕이 있으니 능히 한 단계 낮춰서는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상당히 파격적인 해설이나 통설과는 거리가 멀다.  
 
5, 子曰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이나 인(仁)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나 한 달쯤 인(仁)에 이를 뿐이다.”

  <해설> 위(違)는 벗어나는 것이다. 기여(其餘)는 안회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안회의 어짐을 칭찬한 말로, 석 달이라 함은 꼭 석 달이라고 한정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인(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의 이토진사이(伊藤仁齋)는 『논어고의(論語古義)』에서 기여(其餘)를 나머지 제자가 아니라, 인(仁) 이외의 여러 가지 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여 “안회가 그 마음이 석 달이나 인(仁)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그 나머지 것들은 하루나 한 달이면 이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6, 季康子問 仲由可使從政也與. 子曰 由也果 於從政乎何有. 曰 賜也可使從政也與. 曰 賜也達 於從政乎何有. 曰 求也可使從政也與. 曰 求也藝 於從政乎何有.
  계강자가 묻기를 “중유는 정사를 맡길 만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는 과단성이 있으니, 정사를 맡기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사는 정사를 맡길 만합니까?”
  “사는 사리에 밝으니, 정사를 맡기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구는 정사를 맡길 만합니까?”
  “구는 재주가 많으니, 정사를 맡기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해설> 과(果)는 과단성이 있는 것이고, 달(達)은 사리에 통달한 것, 예(藝)는 재주가 많은 것이다. 「何有」는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라는 뜻으로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공야장 7에서 맹무백은 자로, 염구, 공서적의 관리로서의 역량에 대해 우회적으로 공자에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계강자는 자로, 자공, 염구를 관리로서 등용할 만하냐고 노골적으로 묻고 있다. 공자는 자로는 과단성이 있어서, 자공은 사리에 밝아서, 염구는 재주가 많아, 관리로서 능히 등용할 만하다고 적극 추천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에 대한 사랑이며, 또 자신의 제자들이 세상에 나아가, 자신으로부터 배운 바를 능히 실천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염원일 것이다.

  <보충> 공자는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기를 그렇게 염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정치 사상은 당시의 군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친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런 그의 말년의 희망은 바로 제자들이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그 제자들이 관리로 등용되어, 자신이 못다 이룬 염원을 대신 실현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염옹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옹야 4), 전통 질서(주례) 하에서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관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신분의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주례(周禮)에 의한 신분 질서가 붕괴되는 속에서만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그런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이해관계는 역설적으로 스승이 그렇게도 복원하려 했던 주례와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물론 공자가 복원하려고 했던 것은 주례 그 자체이기보다는 공동체적인 삶이었지만 말이다).
  또한 당시 중원 각국에서는 많은 경우 정치의 실권이 제후에게 있지 않았다. 주의 천자는 명목 상의 존재였으며, 또 많은 제후국에서 제후의 가신들이 제후의 실권을 빼앗고 사실상의 통치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노나라의 계손씨 등). 이들 새로운 실력자들은 자신들의 참례, 월권을 부정하는 주례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또한 약육강식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실력을 배양하기 위해, 기존의 신분 질서(주례)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있는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굴, 등용하려고 하였다. 학문이 장려되었고, 학자들은 자신을 등용해 줄 군주를 찾아 열국을 방랑하였다. 학문이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 즉 주례가 붕괴되면서 신분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한 바로 이 무렵부터이다.   
  공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주례를 복원할 수 있기를 기대했던 제자들이 실제로 관리로 등용된 것은 바로 이들, 주례를 파괴하는데 앞장선 신진 실력자들에 의해서였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았던 것이다. 게다가 공자 자신도 공야장 7이나,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한 신진 실력자들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었다. 공자나 그의 제자들에게는 이외에 다른 입신(立身)의 길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공자의 제자들과 같은 이들 비세습 학자 관리들은 실제로 자신들을 등용한 신진 실력자들을 도와, 주례를 붕괴시키고,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선구적 기여를 하게 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아이러니다.

7, 季氏使閔子騫爲費宰.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계씨가 민자건에게 비땅의 읍재를 시키려고 하자, 민자건이 말하길 “나를 위하여 잘 말해 주시오. 만일 또 다시 나에게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문수(汶水) 강가에 있을 것입니다.”

  <해설>민자건(閔子騫)은 공자의 제자로 성은 민(閔), 이름은 손(損), 자건은 자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15세 연하라고 한다. 공자의 여러 제자 중 안연, 염백우, 중궁과 함께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선진 2). 비(費)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비현(費縣) 일대이다. 계씨가 환공(桓公)으로부터 분여받은 읍으로 계씨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문(汶)은 제나라와 노나라의 국경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문수 강가에 있겠다는 말은 노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도망가겠다는 뜻이다.
  민자건이 벼슬을 마다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원래 벼슬을 싫어한 것인지, 아니면 계씨가 노나라를 전횡하기 때문에 그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겸양의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나라를 떠나겠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단순한 겸양의 말은 아닌 것 같다.

8, 伯牛有疾. 子問之 自牖執其手. 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백우가 병에 걸렸다. 공자께서 문병 가시어, 창 너머로 그의 손을 잡으며 말씀하시길 “이제 그만이로구나. 운명인가?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해설> 백우(伯牛)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염(冉), 이름은 경(耕)으로, 백우는 자이다. 안연, 민자건, 중궁과 함께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선진 2). 질(疾)은 병(病)이다. 『회남자(淮南子)』를 비롯하여 일부 한(漢)대 학자들은 염백우의 병을 나병(癩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공자가 문병을 가서도 방에 들어가지 않고, 창 밖에서 그의 손을 잡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병은 신체가 썩어 문드러지기는 해도,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며, 또 바로 생사(生死)와 관계되지는 않는 병임에 비추어 볼 때 나병설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문(問)은 문병가는 것이다. 유(牖)는 창문이다. 亡之는 이제 가망이 없다는 말이다. 命矣夫는 운명이라는 뜻으로, 사랑하는 제자의 병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체념하는 것이다. 공자의 염백우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와 닿는다.

9,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질구나, 안회는! 거친 밥 한 그릇과 물 한 그릇을 먹고, 누추한 집에 살면서도, 남들은 다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려 하지 않는도다. 어질도다, 회는!”

  <해설> 一簞食는 대나무로 만든 도시락(簞)에 든 밥, 一瓢飮은 표주박(瓢)에 든 물로, 거칠고 반찬도 빈약한 한 끼 식사를 말한다.  
  그 즐거워하는 것의 대상은 가난한 생활이 아니라, 도(道)를 배우는 것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두지, 부귀영화나 빈천(貧賤) 같은 몸 밖의 물건(身外之物)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안회의 사람됨이 가히 눈에 선하다.

  <참고> 이인 9와 술이 15에서도 군자가 빈부에 연연해 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10,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염구가 말하길 “제가 선생님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힘이 부족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서 그만두지만, 너는 해 보지도 않고 스스로 금을 긋는구나.”

  <해설> 설(說)은 보통 기쁠 열(悅)로 읽는다. 그러나 중국의 조기빈(趙紀彬)의 『논어신탐(論語新探)』에 의하면, 설(說)은 해(解)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기빈의 주장을 따랐다. 획(畫)은 획(劃)으로 미리 선을 긋고 스스로 한정하는 것이다. 힘이 부족한 자(力不足者)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스스로 금을 긋는 자(畫者)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나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신주의 호인(胡寅)은 앞 장과 연관지어, 염구가 안회가 가난 속에서도 공부하는 즐거움을 버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자신은 그런 생활을 감당할 수 없다고 지레 선을 그은 것이라고 한다. 능히 하루만이라도 인(仁)에 힘을 쏟는 데 그 힘이 부족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는 말처럼(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이인 6), 공자가 해 보지도 않고 도망가려고 한 염구를 책망한 말이다.

11,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공자께서 자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되어야지, 소인 같은 선비는 되지 말아라.”
 
  <해설> 군자와 소인의 나눔은 의(義)와 이(利)에서 비롯된다. 군자는 의를 생각하며 처신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하며 처신한다. 의(義)는 공동의 선(善)이고, 이(利)는 개인의 이익이다. 따라서 군자는 공동체 전체를 위하여 노력하고, 소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노력한다. 공자는 자하에게 공동선(共同善)을 위하여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공자가 자하에게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전후 사정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고주의 공안국은 군자가 선비가 되는 것은 도를 밝히기 위한 것이고, 소인이 선비가 되는 것은 그 이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청의 유봉록(劉逢祿)은 『논어술하(論語述何)』에서 자하가 고전에 박학하고(文學 子游子夏―선진 2), 너무 말단의 일에 치중하므로(子夏之門人小子 當洒掃應對進退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如之何―자장 12), 이렇게 훈계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그 규모의 크고 작음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12, 子游爲武城宰. 子曰 女得人焉爾乎. 曰 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未嘗至於偃之室也.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되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사람을 얻었느냐?”
  “담대멸명이란 자가 있사온데, 길을 가되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저의 집에 오지 않습니다.”

  <해설> 무성(武城)은 노나라의 고을 이름이다.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서남방 부근이다. 재(宰)는 읍재(邑宰)로 읍장이다. 사람을 얻었느냐라는 말은 쓸 만한 인재를 등용했느냐는 뜻이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은 성이 담대(澹臺), 이름이 멸명(滅明)으로 자는 자우(子羽)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의 제자로 공자보다 39세 연하라고 한다. 용모가 추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공자는 그가 대수롭지 않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후에 장강(長江) 유역에서 제자 300여명을 모아 가르치면서 그 명성이 널리 제후에게 알려졌다. 공자가 그를 일컬어 말하길 “나는 말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재여(宰予)에게 실수를 했고, 용모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子羽)에게 실수를 했다.”고 한다. 
  경(徑)은 밭을 가로질러 난 좁은 지름길이다. 行不由徑은 원칙을 중요시하는 것이고, 非公事未嘗至於偃之室也는 공사를 구분하는 것이다. 담대멸병의 위인됨이 곧은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올바르게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자유에게 훌륭한 인재를 등용했는가를 물었고, 그에 대해 자유는 스승이 평소 가르친 대로 담대멸명이란 곧은 사람을 등용했다고 대답한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정치의 요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다산은 行不由徑을 관청에 갈 때 정로(正路)를 따라 가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사사로이 알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참고>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되었을 때의 행적은 양화 4에도 나타나 있다.

13, 子曰 孟之反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 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맹지반은 공을 자랑하지 않는구나. 전쟁에 패배하여 후퇴할 때, 후위를 맡아 적을 막았으면서도, 성문을 들어설 때, 그 말을 채찍질하며 말하길 ‘내가 감히 후위를 맡은 것이 아니라, 말이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는구나.”

  <해설> 맹지반(孟之反)은 노나라 대부로 이름은 측(側)이다. 벌(伐)은 공적을 자랑하는 것이고, 분(奔)은 패배하여 달아나는 것이다. 전(殿)은 군대의 후위(後衛)이다. 군대의 전위(前衛)는 계(啓)라고 한다. 책(策)은 채찍질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을 채찍질했다는 것은 직접 말을 탔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 끄는 전차(戰車)를 몬 것이다. 말에 직접 올라타는 기마(騎馬)는 전국(戰國) 시대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말을 수레에 매어 타고 다녔다. 맹지반의 일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1년에 기록되어 있다.
  전쟁에서 공격을 할 때는 전위에 서는 것, 후퇴할 때는 후위에 서는 것을 공으로 친다. 그 중에서도 후퇴할 때 후위에 서는 것이 더욱 큰 공이다. 맹지반의 사람됨을 족히 알 수 있다.

14, 子曰 不有祝鮀之佞 而有宋朝之美 難乎免於今之世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축관인 타의 말재주와 송나라 사람 조의 미모가 없고서는, 지금 세상에서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해설> 주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注或問)』에서 후씨(侯氏)를 인용하여 而有宋朝之美의 이(而) 자가 불(不) 자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다산도 불(不) 자가 有祝鮀之佞, 有宋朝之美의 양 유(有) 자에 모두 걸친다고 하고 있다. 즉 “타의 말재주와 조의 미모가 없다면”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축(祝)은 종묘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관리다. 타(鮀)는 위나라의 대부로 자는 자어(子魚)이다. 공자에 의하면, 위나라 영공이 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잃지 않은 것은, 이 사람을 비롯하여, 왕손가(王孫賈), 중숙어(仲叔圉), 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헌문 20).
  조(朝)는 송나라의 공자로 미색이 뛰어났으며, 젊은 시절에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의 애인이었다고 한다. 면(免)은 화(禍)를 면하는 것이다.
  난세를 살아가기 힘듬을 한탄한 말이다.
  한편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은 “축타의 말재주가 없다면, 설사 송조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세상에서 화를 면하기가 어렵다.”로 해석한다. 말재주가 숭상받고 있음을 한탄한 말로 보고 있는 것이다.

15, 子曰 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누가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있으리오만, 어찌하여 이 도를 따라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해설> 호(戶)는 문짝이 하나 있는 문이다. 문짝이 둘 있으면 문(門)이라 한다. 유보남(劉宝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에 의하면 건물의 바깥 반을 당(堂)이라 하고 안쪽 반을 실(室)이라 하며, 실에는 남쪽으로 벽이 있고, 동쪽으로 호(戶)를 열어 당(堂)에 이른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있음을 한탄한 말이다.

16,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본바탕이 꾸밈을 누르면 야인처럼 거칠고, 꾸밈이 본바탕을 누르면 문서나 다루는 사관과 같을 것이니, 꾸밈과 본바탕이 고루 어울려야만 군자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 질(質)은 인간의 본바탕을 말한다. 문(文)은 인위적으로 세련되게 가꾸고 꾸미는 것으로, 예악(禮樂) 등을 말한다. 야(野)는 시골 사람처럼 거칠고 비속한 것이다. 사(史)는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로 그 꾸밈이 번잡하다. 빈빈(彬彬)은 서로 섞이어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군자는 중용(中庸)을 귀히 여겨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니, 인간됨(質)과 꾸밈(文)도 이와 같아야만 가히 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안연 8에서도 문(文)과 질(質)에 대해 말하고 있다.
 
17, 子曰 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의 삶은 곧은 것이다. 곧지 않으면서도 살고 있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고 있는 것이다.”

  <해설> 직(直)은 곧고 정직한 것, 망(罔)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幸而免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는 것이다.
  공자는 맹자처럼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 착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삶이 정직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서 이충은 직(直)을 직립(直立), 즉 곧게 서는 것으로 풀이한다. 즉 인간이 짐승과 달리 곧게 서기 때문에 삶도 곧아야 한다는 것이다.
 
18,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해설> 아는 것은 그 대상이 자기 밖에 의연 그대로 있는 것이요, 좋아하는 것은 그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즐기는 것은 대상이 자기와 일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인(仁)에 비유한다면, 안다는 것은 인(仁)을 아는 것이오(知仁), 좋아한다는 것은 인(仁)을 구하는 것이오(求仁), 즐긴다는 것은 인(仁)에 안주하는 것(安仁)이라고나 할까?
 
19, 子曰 中人以上可以語上也 中人以下不可以語上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보통 이상의 사람에게는 높은 도리를 말할 수 있지만, 보통 이하의 사람에게는 높은 도리를 말할 수 없다.”

  <해설> 중인(中人)이라 함은 그 학문적 자질이 보통인 사람을 가리킨다. 상(上)은 자질이 높은 사람(上知)이 공부하는 고원한 학문이다.
  후한(後漢) 때의 역사가 반고(班固)는 이 장과 양화 3장에 기초하여 『한서(漢書)』 「고금인표(古今人表)」에서 사람을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 중상(中上), 중중(中中), 중하(中下), 하상(下上), 하중(下中), 하하(下下)의 아홉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이후 중국에서는 이 아홉 단계에 입각하여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학문은 처음부터 높고 어려운 데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성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처음부터 고매한 도리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배우는 자의 피부에 와 닿는 절실한 것, 가까운 것(切問而近思―자장 6)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높고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을 하는 방법이다. 중인 이하라고 하여 높고 어려운 것을 배울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참고> 양화 3에 “가장 지혜로운 자와 가장 어리석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20,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
  번지가 아는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의 도리(道理)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면,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仁)에 대해 물으니, 말씀하시길 “어진 자는 어려운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이득을 얻는 일은 남보다 뒤에 한다. 그렇다면 가히 어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설> 務民之義는 고주의 왕숙(王肅)의 설명에 의하면 백성을 도의(道義)로써 교화하고 이끄는 데 힘쓰는 것이다. 敬鬼神而遠之는 고주의 포함(包咸)에 의하면 귀신을 공경하되 친압(親押)하지 않는 것, 즉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신주의 주자는 務民之義의 민(民)을 인(人)으로 보고 있다. 즉 백성을 다스릴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즉 가까이하지 않는 먼저 인간의 도리를 힘써 행하고, 귀신의 일은 의혹이 많고 알 수 없으니, 공경은 하되 멀리 하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신주를 따랐다.
  先難而後獲은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에 의하면 먼저 힘들여 일을 하고 난 이후에 그 결과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어려운 일은 남보다 앞장서고, 이득을 얻는 일은 남보다 뒤에 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다산의 해석을 따랐다. 다산은 이러한 마음을 서(恕)라고 하고 있다.
  지(知)는 어떠한 사물에 대해 그 궁극에까지 파고들어 한 점의 의혹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혜로운 자는 의혹됨이 없는 것이다(知者不惑―자한 28). 귀신의 문제는 인간이 확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깊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의혹만 늘어날 뿐이다. 그러기에 잘 알 수 없는 귀신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인간의 문제에 보다 충실한 것이 지혜로운 자가 취할 방도이다.
  잘 알 수 없는 종교적인 문제보다 현실적인 인간의 문제를 우선시하는 공자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공자로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세계관은 중국 문화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어려운 일에는 앞장서고, 이득을 얻는 일에는 뒤에 서는 것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는 자의 마음가짐이다. 이기적인 욕심을 억제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인(仁)이다.
  논어 안에서 번지는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세 번, 지(知)에 대해 두 번 묻고 있다. 여기가 그 첫 번째요, 두 번째는 안연 22에 나타나 있고, 마지막으로 자로 19에서는 인(仁)에 대해서만 묻고 있다. 이 세 번에 걸친 문답을 종합하면, 번지의 사람됨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로 19로 미루기로 한다.

  <보충> 귀신의 문제는 생물을 복제해 내는 단계까지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아직 뚜렷한 결론이 내려지지 못하고 있는 가장 불가지(不可知)한 문제 중 하나이다. 인간 삶의 불확실성,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기에서 비롯된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 무한한 우주의 시초와 그 결말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 자연에 대한 경이와 공포, 이러한 것들과 연관된 귀신의 문제는 인간이 유한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어쩌면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일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식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인의 세계에서 귀신의 존재는 당연하였을 것이다. 고대인에게 자신을 둘러싼 객관적 세계는 그 거대한 위력 만큼 경이의 세계였고, 또 그 정확한 법칙성은 알 수 없는 만큼 신비의 세계였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무력을 절감한 만큼, 이 세계의 주재자로서 자신들을 초월한 어떤 강력한 존재(귀신)를 상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된 현상이었다.
  중국 민족 또한 이러한 현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BC 18세기 경부터 12세기까지 존재했다고 추정되는 은(殷)나라의 경우 왕(王)은 제사장(祭司長)을 겸하고 있었다. 왕의 통치 행위는 우주의 주재자이며 은족(殷族)의 최고신인 제(帝)의 신탁을 받아 행해졌다. 왕은 거북의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글을 새겨, 그것을 불에 구울 때 나타나는 균열의 모습을 판독하여 우주의 주재자인 제(帝)의 뜻을 확인했다. 제(帝)는 인간에게 상벌을 내리고,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며, 왕의 통치 행위의 정당성을 보증하고,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절대적 존재였다. 농업 생산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홍수, 가뭄 등의 천재(天災)는 산천의 신(神)들이 좌우했으며, 씨족공동체의 안정과 번영은 조상신(鬼)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주(周)나라 대에 오면서 사정은 조금씩 바뀌어 간다. 우선 우주의 최고신이 제(帝)에서 천(天)으로 바뀌었다. 천(天)은 주(周)족의 최고신이었다. 인간 세계에서의 왕조의 교체가 우주의 주재자인 신을 바꾼 것이다. 거기에다 인간의 지혜도 점차 늘어갔다. 자연 현상의 어떤 것은 이제 그 법칙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생산력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은 조금씩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우(禹)임금이 했다는 황하(黃河)의 치수 설화는 바로 그러한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자연히 신의 영역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주나라 왕은 이제 은나라 때의 제사장이 아니었다. 그는 신탁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써 파악할 수 있는 천의 뜻(天道)에 입각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그 천의 뜻은 또한 인간 세상의 마땅한 도리(人道)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천은 우주의 주재자로서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존재였다. 왕의 통치는 천에 의하여 보증받았고, 그 왕에 도전하는 모든 행위는 천에 의하여 주벌(誅罰)될 것이었다. 제후끼리의 맹약(盟約)은 천과 조상신(鬼)이 담보하였다. 그 맹약을 어기는 자는 그들이 벌을 내릴 것이었다. 씨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조상신(鬼)의 보호 속에서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고 있었다. 농업은 아직도 산천의 신(神)들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춘추 시대로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철기가 도입되면서 생산력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제 농업은 더 이상 석기(石器)나 목기(木器)에 의한 화전(火田)적 영농(榮農)이 아니었다. 철기로 말미암아 대규모의 치수 사업과 심경(深耕)이 가능해짐에 따라, 토지에서의 생산량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의해 결정되었지, 더 이상 산천(山川)의 신(神)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또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들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자연만의 영역이었던 창조를 인간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의 영역은 더욱 줄어들었다.
  인지(人智)의 급속한 발달로 자연은 더 이상 외경의 대상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연 현상의 법칙성에 대해 지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신의 영역은 더욱 줄어들었다.
  춘추 시대의 정치적 혼란은 주(周)나라 통치 체제의 보증인인 천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추락시켰다. 천은 주나라를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했으며, 제후들의 도전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제후끼리의 빈번한 맹약의 파기는 그 맹약의 보증자로서의 천(天)과 조상신(鬼)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다. 이제 누구도 천(天)이나 귀(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생산력 발전에 따른 씨족공동체 내부에서의 계층 분화는 공동체의 수호자로서의 조상신의 필요성에 대해 깊은 의문을 제기하였다. 공동체가 파괴되면서 이제 가족이 생산 및 소비의 주체로서 독립함에 따라 공동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그에 따라 공동의 조상신이란 개념 자체도 무의미해지게 되었다. 생존경쟁에서 낙오하여 공동체의 보호 밖으로 방기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몰락을 방치한 조상신은 존재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공자는 바로 이러한 격렬한 변화의 와중에 살았다. 아직 관습적으로 천이 우주의 주재자로서 숭상받고, 귀신에 대한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이미 관습이라는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천이나 귀신의 사회적 존재 의의는 이미 소실되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변화의 반영이다. 귀신이 있다 없다고 단정할 수 없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상존하는 속에서(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귀신을 두려워하여 공경할 수는 있으나, 그 사회적 의미는 이미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이제 인간 세계에 관한 한 천, 귀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자가 말한 인(仁)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천에 의하여 보장받았던 인간 세계의 질서와 규범은 그 근간에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천, 귀신의 보호를 전제로 세워졌던 인간 세계의 질서와 규범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을 통제할 권위도 정당성도 상실하였다. 전통적인 질서와 규범은 이제 새로운 원리에 의하여 다시 만들어져야만 했다. 그 새로운 원리가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慈)은 마땅히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孝)을 무조건적으로 강제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태어나게 하고 길러 준 데 대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다. 이 효(孝)를 형제 간으로 확대하면 제(弟)가 된다. 효제(孝弟)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속하게 되는 혈연공동체의 기본적인 규범이요, 또한 그것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조직 원리다. 이 효제가 혈연공동체의 벽을 넘어 인간 사회 전반으로까지 확대된 것이 다름아닌 인(仁)이다. 이 인(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협동하는 공동체 생활, 즉 사회 생활이 가능하다. 공자의 인(仁)은 단순한 도덕 규범으로서 뿐만 아니라, 천과 귀신을 대체하여 인간의 공동체 생활(사회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 원리로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천, 귀신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내내 격렬하게 진행되어 갔다. 인간은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인간의 문제로 여기기 시작했다. 인간이 이제 인간 세상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 시작한 것이다. 천은 이제 더 이상 외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순자(荀子)는 천(天)을 그저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천은 인간 세계의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고까지 하였다(故明於天人之分 則可謂至人矣―순자 天論). 이제 인간은 인간 세계의 문제에 관한 한 인간 이외의 어떤 존재로부터도 영향받지 않게 되었다. 긴 인간의 천(天)으로부터의 해방 과정이 일단락된 것이다. 

  <참고> 안연 21에 先事後得이란 말이 있다.
  또 술이 20과 선진 11에서는 귀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21,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자는 동적(動的)이고 어진 자는 정적(靜的)이며, 지혜로운 자는 즐기고 어진 자는 장수를 누린다.”

  <해설> 달리 해설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말이다.
  굳이 풀이한다면, 물이 항상 변화하고 움직이면서도 두루 흘러 막힘이 없는 모습이, 마치 지혜로운 자가 사물의 변화와 사리의 막힌 곳 속에서, 그 궁극의 도리를 찾아내고, 사리를 풀어내어, 그것을 즐기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요, 산이 온갖 것을 그 속에 안고서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어진 자가 인(仁)을 마음 속에 안고서, 그것에 안주하고, 자기 밖의 사물과 갈등함이 없이 장수하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22, 子曰 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제나라가 한 번 바뀌면 노나라에 다다를 것이요, 노나라가 한 번 바뀌면 도(道)에 다다를 것이다.”

  <해설> 제(齊)나라는 주나라 건국의 공신인 태공(太公) 망(望)이 세운 나라요, 노(魯)나라는 주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旦)이 세운 나라이다. 모두 주나라의 법제(周禮)에 따라 세운 나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치의 내용이 많이 변하였다. 당시 제는 강대국이었고, 노는 약소국이었으나, 공자는 노의 문물 제도가 제보다 낫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나라 간의 우열을 평가하는 기준을, 세인과 달리, 그 무력이나 경제력에 두지 않고, 문물 제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공자답다고 할 수 있다.

23, 子曰 觚不觚 觚哉 觚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고가 모서리가 없다면 어찌 고라 할 수 있겠는가? 어찌 고라 할 수 있겠는가?”

  <해설> 고(觚)는 사각(四角)의 모서리가 있는 술잔이다. 모서리가 있는 술잔인 고에 모서리가 없다면 고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이름과 실질이 일치해야 함을 지적한 말이다. 이렇게 이름과 실질을 일치시키는 것을 정명(正名, 자로 3)이라고 한다. 주자의 해설을 따랐다. 다산도 같은 견해이다.
  그러나 고주의 해석은 다르다. 고주의 마융(馬融)에 의하면 고(觚)는 예(禮)를 치를 때 사용하는 그릇으로, 한 되짜리를 작(爵)이라 하고, 두 되짜리를 고(觚)라고 한다. 참고로 세 되짜리는 선(鱓), 네 되짜리는 각(角), 다섯 되짜리는 산(散)이다. 정치를 할 때, 그 도를 얻지 못하면 이룰 수 없음을 비유한 말이라고 하나 무슨 뜻인지는 애매하다.
  한편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위(魏)의 왕숙(王肅)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을 훈계한 말이라고 한다. 아마 당시 고에 두 되 이상의 술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24, 宰我問曰 仁者 雖告之曰 井有仁焉 其從之也. 子曰 何爲其然也. 君子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재아가 묻기를 “어진 사람이라면 가령 누가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는 말을 하였을 때 우물 속까지 쫓아 들어가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찌 그렇겠느냐. 군자는 우물가에 갈 수는 있지만, 우물 속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럴 듯한 말로 속일 수는 있겠지만,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해설> 井有仁焉의 인(仁)은 신주의 유빙군(劉聘君)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人)이다. 재아의 질문은, 어진 사람이라면 가령 우물 속에 사람이 빠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안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우물 속까지 따라들어가 구해야 하느냐는 뜻이다.
  서(逝)는 우물가까지 가는 것이고, 함(陷)은 우물에 빠지는 것이다. 기(欺)는 이치에 닿는 말로 속이는 것이요, 망(罔)은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는 것이다. 군자는 도리에 맞는 그럴듯한 말에 속을 수는 있지만, 이치에 닿지도 않는 터무니없는 말에 속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군자는 우물 속에 사람이 빠졌더라도, 우물 밖에서 사람을 구하지, 우물 속까지 따라 들어가지는 않는다. 재아의 궤변에 가까운 질문에 대해 공자가 그건 어리석은 자나 할 짓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고주의 공안국은 井有仁焉의 인(仁)을 인인(仁人), 즉 어진 사람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황간(皇侃) 본(本)에는 인(仁)이 인자(仁者)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데 어진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청(淸)의 정호(鄭浩)의 『논어집주술요(論語集注述要)』라는 책에는 재미있는 해석이 실려 있다. 어진 사람은 사람을 구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물 속에 사람이 빠져 그를 구할 기회가 생겼으므로 우물 속에 인(仁)이 있다(井有仁)는 것이다. 인인(仁人), 인자(仁者)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한편 다산은 서(逝)를 해(害)를 피해 멀리 떠나는 것, 함(陷)을 이익을 얻으려다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정(井)은 정(穽)으로 함정이다. 다산에 의하면, 재아의 질문은, 어진 자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함정까지 쫓아 들어가 목숨을 바쳐 인(仁)을 구하는 것(殺身成仁)은 명예를 탐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이에 대해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는 해(害)를 피해 멀리 떠날지언정, 이익을 탐하다 구렁텅이에 빠지는 일은 없다고 한 것이라 한다.

  <참고> 재아의 궤변은 팔일 21, 양화 21에도 보인다.
 
25, 子曰 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널리 글을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단속한다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해설> 약(約)은 단속하는 것이요, 「約之」의 지(之)는 문(文)을 가리킨다. 즉 널리 배우고 그 배운 바를 예로서 단속한다는 말이다. 반(畔)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널리 글을 배우는 것은 도(道)를 알기 위함이요, 예로써 몸가짐을 단속하는 것은 행동거지를 바로 하기 위함이다. 도를 알고, 행동거지가 올바르다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참고> 안연 15에 같은 말이 있다.
  자한 10에는 博我以文 約我以禮라는 표현이 있다.

26,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공자께서 남자를 만나 보시자, 자로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시길 “내가 만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버릴 것이다.”

  <해설>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으로, 옹야 14에서도 언급했지만 품행이 방정치 못했다. 『사기』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가 그녀를 만난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간청 때문이라고 한다. 또 고주의 공안국(孔安國)의 해설에 의하면 그녀를 통해 영공을 설득하여 올바른 정치를 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직선적이고 정의감이 강한 자로로서는 공자가 남자를 만난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설(說)은 보통은 기쁘다(悅)는 뜻으로 해석하나, 여기서는 조기빈(趙紀彬)을 따라 이해한다(解)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시(矢)는 서(誓)로 맹세하는 것이다. 소(所)는 맹세할 때 쓰는 말로 여과(如果), 즉 “만일 … 한다면”이라는 뜻이다. 부(否)는 불(不)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염(厭)은 기(棄)로 버리는 것이다. 주자의 해설을 따랐다.
  옛부터 해석이 엇갈리고 있는 문장이다. 공자가 남자를 만난 것은 여러 기록으로 보아 사실이라고 생각되나, 그 이유가 불분명하고, 또 제자인 자로에 대해 맹세까지 하면서 해명하고 있는 모습이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공자의 면모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진(晉)의 채모(蔡謨)의 주장에 의하면 시(矢)는 진(陳)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공자가 자로에게 맹세한 것이 아니라, 천명(天命)에 대해 설명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 천명(天命)의 내용에 대해서는 같은 책에 인용된 위(魏)의 왕필(王弼)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남자를 만난 것은 시세(時勢)가 부득이했기 때문이다. 즉 천명이 막힌 것이다. 자로는 군자라면 마땅히 욕(辱)을 당하는 것을 방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승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자 공자가 말했다. 즉 운수가 막히고 트이는 것은 천명이 있는 것이니, 내가 운수가 막혀 세상에 쓰이지 않는 것은 하늘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予所否者」의 부(否)는 여기서는 아닐 부가 아니라, 비극반태(否極反泰)할 때의 막힐 비다.
  한편 다산은 이 내용이 노나라 애공(哀公) 2년(BC 493) 위령공(衛靈公)이 죽자 남자가 괴외(蒯聵)의 아들인 첩(輒)을 세워 임금으로 삼으려고 할 때의 일이라고 한다. 공자는 아버지인 괴외를 제치고 첩을 임금으로 세우는 것이 장차 위나라의 화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남자를 만나 순리대로 괴외를 불러들여 임금으로 세우라고 충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로는 괴외가 어머니인 남자를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첩의 편을 들었다. 이것이 자로가 기뻐하지 않은 이유다. 그러자 공자가 말하길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한 것이라고.
 
  <참고> 자로는 그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 도처에서 스승인 공자와 의견 충돌을 빚고 있다. 특히 남자와 같이,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을 공자가 만날 때면, 거침없이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양화 5와 7도 그러한 예이다.
 
27, 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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