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과 분노의 질감
상태바
좌절과 분노의 질감
  • 김영수
  • 승인 2012.10.04 18: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복지칼럼] 김영수 / 인천YMCA 갈산종합사회복지관장


1년 전 초로의 남자가 찾아왔다. 불쑥 찾아와 할 이야기가 있노라 말하는 그 분에게서는 미처 다스리지 못한 술 냄새가 풍겼고, 갖은 걱정으로 시달린 얼굴에는 풀지 못한 분노가 담겨있었다. 억울하고 분통한데 이를 풀 방법이 없어 앓던 차에, 아는 이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기에 날 찾아왔노라 하였다. 그리고는 품에서 작은 칼을 내려놓았다. 섬뜩한 마음에 이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그 칼로 누구를 죽여야 자신의 억울함이 풀릴까 물어보러 왔다 하였다. 달래어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힘도 없고 돈도 없어 사람 붐비는 데는 끼지도 못하고 적당한 길가를 옮겨 다니며 도넛이며 꽈배기 등을 파는 노점상을 하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재개발 지역의 빌라를 은행 빚을 얻어 구입하였다. 옮겨 갈 전셋집을 구하던 차에 재개발이 되면 입주권을 얻어 아파트에 입주하거나 이를 매도하여 차액을 남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가진 돈과 벌어들이는 수입을 생각하면 꿈도 못 꿀 내 집 마련이 어쩌면 가능하겠다 싶어 3,000만원의 대출을 받고 여기저기서 돈을 모아 1억의 돈을 마련하여 빌라를 구입하였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집값은 오를 터이니 안심하라는 부동산 사장의 장담에 계약하고 낡은 빌라에 이사를 했다.

그런데 곧 진행된다던 재개발은 제자리일 뿐이고 집값은 계속 떨어지기만 하였다. 아이들은 자라고 벌이는 그대로인데 대출이자와 친척들에게서 빌린 돈의 반환 독촉이 시작되어 잠 못 이루고 심장이 조여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중에 듣고 보니 재개발 이전에 반값도 되지 않았던 빌라의 매매가격이 배로 뛴 것은 부동산업자들이 서로 사고팔면서 값을 올렸기 때문이라 하였다. 작더라도 번듯한 집 한 칸 마련하자는 욕심을 잘못이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허리띠 졸라매고 매운 바람 맞으며 살아온 자신의 삶이 그리 부끄럽지도 않은데 다른 이들의 농간에 휘둘려 빚으로 빚을 메꾸는 처지에 놓이고 보니, 죽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묻고 싶어 칼을 품고 다닌다 하였다. 그런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복잡하고 아득하여 답답할 뿐이라 하였다.

듣고 보니 대답할 말이 궁색하였다. 토지와 주택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석도, 이윤 앞에 도의를 잃어버린 이들의 행태에 대한 비난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같이 한 숨쉬고 빚을 줄여 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무력한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야기 들어 주고 함께 고민해 주어 고마웠노라 말하고 어찌할 수 없는 가난에 가슴 시린 부모의 목메인 설움을 짙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세계화와 지식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른 산업의 재편의 흐름 속에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고용의 유연화와 그에 따른 만성적인 고용불안이라 설명되는 사회현상에 따라 재취업을 위한 직업교육과 일자리 창출이 중요한 정책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그래야 할 터이고 마땅히 그리해야 할 일이만, 왠지 마음에 닿지 않는다.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슴 시리고 희망 없는 삶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고통과 분노와 좌절들을 담기에는 너무 가볍고 당파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개인의 좌절과 분노는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좌절하고 분노하는 이들이 다수를 이루면 사회는 갈피를 잃게 될 것이다. 분노가 사회를 파괴하기 전에 분노에 공감하고 좌절의 인과를 따지는 사회적 노력과 합의가 필요한 때이다. 나는 두렵다. 이 분노와 좌절의 질감이 짙게 느껴지고 있기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