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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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에 관하여
  • 하석용
  • 승인 2013.03.0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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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유치원생들.JPG

우리나라 표준 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어휘의 수는 약 50여 만 개에 달한다. 이 많은 어휘 중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단어를 하나 고른다면 아마도 바로 그 “사랑”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무슨 조사 작업을 해 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억 만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을 비롯해서 노랫말 중 단연 으뜸이 아마도 “사랑”이라는 말일 것이고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는 문학 작품을 찾기가 어렵다.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와 사랑이라는 언어에 의탁하지 않는 TV드라마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비단 우리만도 아니고, 온 인류가 이같이 사랑에 매달리는 데는 생태학적으로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다양한 그럴 듯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좀 까칠한 분석이겠지만 번식을 위한 본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숙명적인 고독에 대항하는 유일한 대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집단을 형성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상호 소통하여야 한다는 생존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하여 필요적인 도구가 사랑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밖에도 인간의 살아가는 사정마다 사랑이 필요한 이유야 얼마나 다양하게 많을 것인가. 어떠한 이성적인 잣대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경우는 얼마나 많을 것이며 심지어 남과는 절대로 공유할 수 없는 나만의 사랑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아무튼 인간들이 모두 이 사랑이라는 것으로부터 떨어져 살아간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인간은 그로부터 삶의 행복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 아마도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사랑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라고까지 부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토록 거의 절대적으로 삶의 의미를 좌우하는 사랑이라는 언어의 개념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고, “사랑한다”라는 행위의 진행과 결과가 결코 인간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오히려 그 가치가 중대한 만큼 그로부터 입을 수 있는 피해는 치명적이기 쉽고 인간들의 사회적인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든 인류의 역사가 끝도 없이 확인하고 있다. 왜 그럴까.
 
물론 많은 인간의 불행이 그렇듯이 불행한 사랑이라는 것도 그 원인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미련함과 탐욕에서 비롯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냥 그렇다고만 치부하고 말기에는 그 가치의 중대함에 비추어 아쉬움이 남고 “성춘향과 이도령”의 경우 같이 성공적인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미련한 머리를 정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사랑한다는 개념은 무엇일까. 물론 “낭만적이거나 성적인 매력에 끌려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다.” “매우 좋아해서 아끼고 즐기다.”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여기다.” 따위의 사전적인 정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정의(定義)가 우리의 철학적인 고민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해도 자제력이 모자라면 스토커(stalker)로 접근 금지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을 위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도 자칫 조심하지 않으면 과잉보호라는 비난을 받기가 십상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아마도 좀 더 가치 지향적인 사랑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 것일 것이다.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사랑을 테마로 한 민속적인 문학작품들은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 따위와는 달리 춘향전을 비롯해서 대체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한 우리의 전통적인 시각 속에 아마도 무언가 서구와는 다른 사상적인 DNA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 연원을 “사랑하다”라는 어원에서 찾아본다.
 
본디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랑하다”라는 말은, 조선조에 들어와 “생각하고 헤아리다”라는 뜻의 한자말인 사량(思量)이라는 어휘에 “하다”라는 동사형 어미를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서적인 DNA가 담긴 언어라고는 할 수 없고, 우리 본래의 이에 해당하는 언어는 고려 시대의 가요인 사모곡(思母曲)에 그 사용례가 뚜렷이 남아 전한다. 여기에 고문을 옮기기도 복잡하여 전재를 생략하거니와 이 고려가요의 마지막 부분에 “어마님 같이 괴시리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 “괴시다”라는 말의 원형이 “고이다>괴다”이고 바로 이 언어가 우리 고유의 사랑하다 라는 뜻을 담는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이 “고이다”라는 말이 갖는 뜻이 실로 심대하다. 지금도 그 의미는 살아남아 여러 용도로 쓰이고 있지만 그 뜻을 모아 당시 우리 조상들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유추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 말을 옛 그대로 “귀여워하고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쓰고 있지만, 이 말은 ① 물이나 바람 같은 유동체가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모이는 것을 뜻하거나 ② 어떤 물체를 쓰러지거나 기울어지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받쳐 안정하게 하는 행위 ③ 제사 음식이나 웃어른의 음식을 정성스럽게 담고 쌓아올려 완성하는 행위를 표현 하는 말로 쓰이고 있고 옛부터 그 쓰임이 같다.
 
요약하거니와 우리의 선조들은 바람과 같이 유동이 심한 인간의 마음이 흐르지 않고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을 사랑의 감정이라고 관찰하였는가 하면, 동시에 상대방의 삶이 본디 불안정한 것이고 미완성의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스스로를 받쳐 그를 안정하게 하고 완성시키는 목적을 갖는 것이 사랑하는 행위라고 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어찌 달리 해석할 것인가. 세계적인 사랑이라는 언어 어디에 이 보다 더 가치지향적이며 철학적인 표현이 있을 것인가.
 
많은 비극적인 실패한 사랑의 사례들 속에서 우리는 거의 모두 사랑의 권력화를 본다. 사랑을 상대에 대한 소유와 지배의 근거로 삼고 이기(利己)의 수단으로 삼는 권력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더욱 깊은 고독의 확인과 단절의 고통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변덕을 넘어서는 극진한 자기 수련과, 헌신과 희생으로 상대의 가치완성에 자신을 바쳐 전념하며, 그에서 비롯하여 함께 완성을 기뻐하는 “춘향전”의 가치관이야 말로 “고임”의 철학이고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꿈꾸게 하는 가치의 지침이 아닐 것인가.
 
이 나라와 도시의 안팎에 “나는 이 나라를( 이 도시를) 사랑한다”라는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말이 넘쳐나는 모습에 심기가 불편하다.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이 나라와 이 도시를 통째로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불행한 착각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차제에 진정 “고임”의 철학을 회복하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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